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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과거의 짐’ 내려놓기에 대한 뛰어난 성찰과 표현의 능숙함 – 김성곤,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이 당대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번 후보작들은 모두가 수상 자격이 충분했다. 이 시대의 상처인 세월호 참사에 대한 죄의식을 다룬 작품도 있었고, 우리 사회의 첨예한 관심사인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룬 단편도 있었으며,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상실감과 소외감을 다룬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일견 아버지의 임종을 눈앞에 둔 자녀의 심리적 갈등을 다룬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심층을 들여다보면,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절박한 문제 – 즉, 이제는 극복하고 떠나보내야 할 어두운 과거의 유산 문제 – 를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에 은유적으로 투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 여자의 아버지가 어둡고 폭력적인 과거의 포상이라는 점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과도를 빼앗아 자신을 간병하는 착한 딸을 찌르려고 한다. 부모가 이혼할 때, 아버지가 가엾어서 아버지를 선택한 딸은 자신의 인생을 망친 아버지를 원망하게 된다. 사실, 아버지만 없었으면 그녀는 치료비를 대느라 지하실에서 살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해외 유학도 갈 수 있었을 것이며, 오랜 소원인 핀란드의 오로라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평생 지고 가야 할 숙명적인 짐이었고, 짊어져야 할 멍에였으며, 빛을 가리는 어둠의 표상이었다. 어두운 과거 속의 아버지가 자신의 미래를 망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을 은밀히 상상하고 죄의식에 시달린다. 사실, 그녀의 마음은 죽어가는 아버지보다는 병원에서 만난 남자 간호사에게 더 이끌리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오늘 밤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는 그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 속에 화장부터 고친다. 그리고 택시기사에게 무의식적으로 병원 이름이 아닌, 영안실 이름을 불러준다. 남자 간호사는 그녀를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구해주며, 죽음이라는 것은 마치 천국의 문을 여는 것과 같다고, 그러니 아버지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녀를 위로해 준다. 그러고는 결국 그녀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앞당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 후에, 그녀는 과연 죄의식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죽는다. 그러나 그는 과연 웃으며 천국의 문으로 들어갔는가? 그 남자는 그녀에게 사람이 죽으면 빛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과연 빛을 보았는가? 그녀 또한 이제는 눈부신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극복해야 할 과거와 혼란스러운 현재가 갈등하고 충돌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딜레마를,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딸이라는 탁월한 은유로 잘 형상화해낸 수작이다. 어두운 과거의 짐이 스스로 사라져주지 않을 때, 우리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폭력과 상처가 생겨난다. 어두운 과거를 물리적으로 제거했을 때, 과연 밝은 미래와 아름다운 오로라가 찾아올 것인가? <천국의 문>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대한 문제를 심도 있게 천착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김경욱 작가의 제40회 이상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_315쪽~317쪽
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여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장을 고치는 것이었다. _12쪽
핏기 없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바른 핑크색 아이섀도와 볼터치를 지우고 비비크림을 꼼꼼히 덧발랐다. 입술은 핑크와 베이지색 립스틱을 섞어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을 냈다. 옷도 여러 벌 입어보았다. 고심 끝의 선택은 중요한 자리에 입고 가려고 사둔 까만 벨벳 원피스였다. _12쪽
죽음이란 빛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사내였다.
“흐르는 강물은 바다를 만나는 순간 가장 고요하죠. 근원으로 돌아가니까. 아니, 근원의 일부가 되니까. 죽는 순간 우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에 휩싸여 깃털처럼 날아올라 거대한 빛의 일부가 돼요. 무한한 빛의 입자들이 먼지처럼 떠 있는 그 거대한 빛은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며 아름답게 물결치죠.”
사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지만 마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오로라 처럼요?” _19쪽
눈을 뜬 사내는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말했다. 직접 본 것이라고, 트럭에 치어 심장이 멎었던 반나절 동안 겪은 일이라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사람들은 왜 기를 쓰고 먼지를 닦아낼까요? 먼지는 우리가 결국 먼지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환기하기 때문이죠. 먼지에서 먼지로, 빛에서 빛으로. 사실 별이란 우주먼지 덩어리죠. 별과 사람은 구성 성분이 같다는 거 알아요? 우리가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은 빛으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일깨우기 때문이에요. 어둠을 두려워할 때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빛인 셈이죠.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_19쪽
처음 방문했을 때 여자의 주의를 끈 것은 익숙한 냄새였다. 젖내, 지린내,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야릇하게 비린 냄새. 놀랍게도 어린이집에서 날마다 맡던 냄새였다. 수액주머니나 오줌주머니를 옆구리에 낀 노인들의 거처에서 어린이집 냄새가 나다니. 여자는 의아했다. 둘 중 하나였다. 요양병원에서 생명의 냄새를 맡았거나, 어린이집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거나. 어쩌면 두 냄새가 본디 하나인지도 몰랐다. _20쪽
부모가 갈라설 때 여자는 아버지 곁에 남았다. 동생이 독립하겠다고 선수를 쳤고 엄마에게는 새 남자가 있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_21쪽
여자는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실감은 동생이 일부러 드러냈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의심에 이르기도 했다. 미친 생각이었다. 동생이 무엇 때문에? 격렬한 의심 끝에는 원하던 삶을 움켜쥐지 못한 게 자신의 나약함 탓이 아니라는 쓸쓸한 위안이 찾아오기도 했다. _22쪽
여자의 볼이 빨개졌다. 여자는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데 소극적이고 서툴러서 그런 순간이면 얼굴을 붉혔는데 그래서 되레 남자들의 눈길을 끌곤 했다. 잠재력은 충분했지만 둔감했다. 둔감하다기보다는 죄의식을 느꼈다. 대개는 불필요한 죄의식이었다. 불필요한 죄의식 속에서 여자는 평온을 얻었다. 그것은 여자가 몇 안 되는 구애자들을 조금씩 멀어지게 한 방식이기도 했다. 결혼이라는 청춘의 빛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순간에도, 그러니까 일몰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카페에서 반지 케이스를 앞에 두고도 여자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끼니, 아버지의 불면, 아버지의 발작, 말하자면 아버지라는 어둠. _25쪽
아버지만 떼어내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리라 기대했는데, 휴대폰을 최신형으로 바꾸고, 영어 회화 학원에도 등록하고, 오로라를 보러 떠날 수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아버지만 없다면. (……)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갈 때마다 시 외곽으로, 작은 평수로, 산동네로 세간을 옮기고도 요양병원 입원비 때문에 다시 반지하로 내려앉은 여자였다. 더 물러나야 한다면 이제는 땅속이나 하늘뿐이었다. _26쪽
이제 보니 아버지는 집에 있을 때보다 살이 오른 듯했다. 순간, 여자는 마음 한구석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관심을 끌려고 온종일 안달이던 아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마에게 안기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심정이랄까.
정작 살이 빠진 쪽은 여자였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_26쪽
“인간만이 웃을 수 있어요. 웃음이야말로 영혼이 있다는 증거죠. 인간에게는 그 영혼을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혈이 있어요. 천국의 문이라 불리는 혈 깊숙이 침을 찔러 넣으면 단잠에 빠져 미소를 지으며 저세상으로 가죠.” _32쪽
아버지의 미소에서 벗어난 뒤에도 여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아버지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저 행복한 표정이라니. 천국의 문이라도 열어젖힌 사람 같지 않은가. _32쪽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여자는 자신의 인생이 끝장나버린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여자의 남은 생을 걷어가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_37쪽
여자가 다시 전화를 건 곳은 경찰서였다. _37쪽
“행복한 여행자였으면 싶다.” _179쪽
“중요한 작가들은 삶의 고비에서 늘 먼저 섰다. 상황을 핑계로 삼고 처지에 양보한 놈치고 제대로 된 글을 남긴 적이 없어.” _181쪽
제40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선정 이유
2016년도 제40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김경욱 씨의 <천국의 문>을 선정합니다.
김경욱 씨는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 <아웃사이더>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로 소설집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 《베티를 만나러 가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등과 장편소설 《아크로폴리스》 《모리슨 호텔》 《황금사과》 《천년의 왕국》 등을 발표하고, 제37회 한국일보문학상, 제40회 동인문학상, 제53회 현대문학상, 제3회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한 문단의 중진작가입니다.
제40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게 된 <천국의 문>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해부를 통하여 다양한 서사적 기법을 구사한 것이 그 특징입니다. 간결한 문체가 빚어내는 풍부한 아이러니의 공간은 <천국의 문> 전반에 걸쳐 특징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서사 미학의 요소입니다.
또한 <천국의 문>은 단편소설의 정석을 보여주는 잘 짜여진 이야기라는 점이 그 특징이기도 합니다. 요양병원에서 치매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아버지의 죽음을 딸의 시선으로 처리하고 있는 이 작품은 한국의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노인과 병과 죽음 그리고 가족공동체의 해체 등, 여러 겹의 문제들을 한데 응축시켜 놓고 그 현재와 미래를 응시한 듯합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러한 문제들을 비정하리만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밀하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짧은 이야기의 시간 속에서 다루어지는 디테일한 묘사,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의 능란한 구사, 현대적 죽음 자체를 특이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점 등은 이 소설이 성취하고 있는 서사 미학의 탄탄한 기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작가가 주목 하고 있는 부성父性 부재의 현실과 가족공동체의 해체 문제는 이 소설의 결말에서 패러디의 방식을 통해 놀라운 반전反轉을 보여줍니다.
이상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소설 <천국의 문>에서 작가 김경욱 씨가 보여준 설득력 있는 능숙한 이야기 구성과 디테일의 구현, 시간의 능란한 구사와 서사 공간의 확대, 패러디의 감각과 그 주제의 새로운 해석 등을 높이 평가하여 2016년도 제40회 이상문학상 대상의 영예를 드립니다. 우수상으로 선정된 다섯 작품도 모두 대상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라고 할 것입니다.
2016년 1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회
권영민, 김성곤, 김인숙, 김종욱, 윤후명
저자 소개 : 김경욱
소설 외부로부터 혹은 이전 텍스트로부터 소재를 끌어와 재가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습과 응용이 빠른 영민한 작가 소설가 김경욱.
1971년 광주에서 6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소설 「아웃사이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2004년 단편소설 「장국영이 죽었다고?」로 제37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7년 단편 「99%」로 제53회 현대문학상을, 2009년 『위험한 독서』로 제40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최근작인 『동화처럼』에 대해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한국판 「첨밀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연애담”인 『동화처럼』에 대해 평범한 남녀가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하는 우여곡절을 통해 어른들을 위한 “현대판 동화로 아름답게 완성”되었다고 평한다. 동화로 시작해 연애소설을 거쳐 성장소설로 깔끔하게 마무리된 연애성장소설 『동화처럼』은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는 우리 시대의 소설가 김경욱이 들려주는 한 편의 동화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냄새로 가득한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다.
또한 「위험한 독서」는 소설의 독법을 소설쓰기의 소재로 삼고 있는 단편이다. 현대사회에서 문제되고 있는 개인과 개인의 소통의 단절을 독서법의 차이에서 찾아내고 있는 이 작품은 사물의 존재와 그 의미가 얼마나 주관적인 것에 의해 재단되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위험한 독서』는 김경욱이 가진 장점이 잘 드러난 소설집이다.
그 밖에는 소설집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1996), 『베티를 만나러 가다』(1999),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2003) 『장국영이 죽었다고?』(2005)와 장편소설 『아크로폴리스』(1995), 『모리슨 호텔』(1997), 『황금 사과』(2002)를 펴냈고,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서사창작과 교수로 있다.
출판사 리뷰
■ 소설가 김경욱, 2016년 제40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드디어 출간됐다. 한 해 동안 발표된 작품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중ㆍ단편소설을 합리적이고 공정한 심사 과정을 통해 선정하는 이상문학상은 한국소설 문학의 황금부분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탁월한 작품성을 지닌 수상작들로 이루어져 있어, 현대소설의 흐름을 대변하는 소설 미학의 절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2016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은 심사위원 5인(권영민, 김성곤, 김인숙, 김종욱, 윤후명)의 심사숙고 끝에 김경욱의 [천국의 문]으로 선정되었다. 김경욱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서사방식과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냉소적이고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작품으로 평단과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아왔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한 개인과 가족에게 드리워진 부성父性과 부정父情의 상실을 통해 상처 입은 가족 공동체의 모습과 그 해체를 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를 돌보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욕망하는 딸의 내밀한 시선은 파괴된 자신의 삶과 유예되는 아버지의 죽음 사이에서 참혹하게 길항한다. [천국의 문]은 한 인간의 죽음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죽음으로 치환하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남겨진 가족들의 존엄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아울러 단편소설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치밀한 시간 구성, 밀도 있게 처리된 디테일의 묘사 방식과 현대적 죽음 자체를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시각으로 그려낸 [천국의 문]은 한국문학이 얻어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과 자선 대표작 [양들의 역사] 외에도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우수상 수상작인 김이설의 [빈집],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 정찬의 [등불],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실을 맞이하는 순간과 시대적 아픔들을 끌어안는 작품들이 고루 포진하여, 독자들을 새로운 미래로 초대하고 있다.
■ 김경욱의 [천국의 문], 대상 선정 경위
2016년 1월 6일 이상문학상 본심이 열렸다. 본심 심사위원으로는 권영민 문학평론가, 김성곤 문학평론가, 김인숙 소설가, 김종욱 문학평론가, 윤후명 소설가가 참여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발표된 중ㆍ단편소설 가운데 문학비평가, 문예지 편집장, 문학 담당 기자, 문학 연구자 등 100여 명의 후보작 추천을 거쳐 예비심사 과정을 통과하여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다음과 같다. (가나다 순)
김경욱, 〈천국의 문〉
김미월, 〈도망가지 않아요〉
김이설, 〈빈집〉
김탁환, 〈앵두의 시간〉
윤이형, 〈이웃의 선한 사람〉
이기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이승우, 〈신의 말을 듣다〉
이평재, 〈엉겅퀴 마티에르〉
정 찬, 〈등불〉
한유주, 〈유령을 힐난하다〉
황정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심사위원들의 전체적인 인상은 소설적 소재와 기법에서 새로운 작풍이 괄목할 만하다는 평이 많았다. 각 심사위원들이 주목했던 작품을 각각 3편씩 천거한 결과 김경욱, 윤이형, 이승우, 김탁환의 작품이 가장 많이 거론되었다.
이승우의 작품은 주제의 무게를 놓고 볼 때 기존에 발표했던 소설에 비해 긴장감이 덜하다는 점, 김탁환의 작품은 글쓰기의 본질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전개 자체에 변화가 부족한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최종 선정 과정에서 김경욱과 윤이형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윤이형의 경우는 기법에 대한 작가의 독창적인 접근법을 모두가 높이 평가했지만 디테일의 처리에서 드러나는 안이함 등이 지적되었다. 김경욱의 경우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짧은 이야기의 시간 속에서 다루어지는 디테일의 묘사와 아버지의 죽음 자체를 해석하는 특유의 패러디 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 대상 수상작 [천국의 문], 그리고 주옥같은 5편의 우수상 수상작
[천국의 문]은 한 개인과 가족에게 드리워진 부성父性과 부정父情의 상실을 통해 상처 입은 가족 공동체의 모습과 그 해체를 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를 돌보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욕망하는 딸의 내밀한 시선은 파괴된 자신의 삶과 유예되는 아버지의 죽음 사이에서 참혹하게 길항한다. [천국의 문]은 한 인간의 죽음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죽음으로 치환하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남겨진 가족들의 존엄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대상 수상작 외에도, 아이를 갖지 못한 여자의 상실감을 채워지지 않는 빈방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김이설의 [빈집], 시대적 아픔과 고통을 맞이하는 개인의 내면을 통해 밀도 있게 그려낸 정찬의 [등불], 아름다운 유년의 환상과 세밀한 문체를 통해 글쓰기에 대한 자전적 소설을 완성한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 개인과 사회의 아픔을 불편해하며 결국 자신의 삶에 안주해버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 그리고 아이를 잃은 부부가 낯선 곳에서 깊은 상처를 확인하며 서로를 분실하게 되는 내용을 다룬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까지.
이상 5편의 작품은 시대적 아픔과 그 상실의 순간을 맞이하는 인간의 내면을 탐색하는 소설 미학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수작으로 우수상에 선정됐다.
■ 대상 수상 작가 김경욱의 ‘수상 소감’ 중에서
독자가 떠나간다고,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독자가 없다면 아무도 쓸 수 없게 되겠지요. 소설은 ‘혼잣말’이 아니니까요. 누군가에게 건네는 눈짓이며 손짓이니까요. 독자들의 사정이야 제 아둔한 머리로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끝까지 독자로 남아서 읽겠습니다. 작년 봄 아버지의 마지막 심장 박동을, 차가워지는 손목에서 뛰던 최후의 온기를 읽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에게 바라기만 하고 끝내 못한 말이 새삼 사무칩니다. “괜찮아요, 아버지. 다 괜찮아요.” ‘떨림’이라는 부끄러움을 죽비처럼 내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글쓰기라는 고독한 항해에 등불이 되어주는 작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천국의 문]에 대한 심사평
[천국의 문]에서 그려낸 치밀한 시간 구성, 밀도 있게 처리된 디테일의 묘사는 근래 보기 드문 소설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패러디에서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되는 탄식이 씁쓸한 여운으로 이어진다.
-권영민 문학평론가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극복해야 할 과거와 혼란스러운 현재가 갈등하고 충돌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딜레마를,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딸이라는 탁월한 은유로 잘 형상화해낸 수작이다.
-김성곤 문학평론가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이 된 김경욱의 [천국의 문] 역시 경계를 다루고 있지만, 그 경계의 소재는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은 소재를 단단하게 움켜쥐고 독자들을 어느 지점으로 몰아가 벽에 세게 부딪치게 만든다. 김경욱을 쫓아 밤길을 달리는 불안은 확실히 매혹적이다.
-김인숙 소설가
살아가기에 급급해서, 혹은 떠올리는 것조차 불쾌해서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가까운 미래, 부재와 소멸을 환기시키는 것은 소설의 오래된 임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김경욱의 작품은 삶이 죽음의 유예에 불과하다는 실존적인 사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김종욱 문학평론가
하나의 결과에 다가가는 면밀한 접근 방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배리背理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좀 가혹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삶은 그렇게 놓여 있다는 아픔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윤후명 소설가
목차
제40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선정 이유
1부 대상 수상작 및 그리고 작가 김경욱
대상 수상작 / 김경욱천국의 문
자선 대표작 / 양들의 역사
수상 소감 / 영원한 지망생
문학적 자서전 / 아버지의 무릎
작가론 / 김경욱은 늙지 않는다 · 윤성희
작품론 / 아이러니의 천국 · 유준
2부 우수상 수상작
김이설 빈집
김탁환 앵두의 시간
윤이형 이웃의 선한 사람
정 찬 등불
황정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3부 선정 경위와 심사평
심사 및 선정 경위
심사평
-권영민 주제의 해석과 기법의 능란함
-김성곤 ‘어두운 과거의 짐’ 내려놓기에 대한 뛰어난 성찰과 표현의 능숙함
-김인숙 끔찍한 세월의 끝에 깊게 울음소리를 내는 문학의 향기
-김종욱 개인의 실존과 삶의 아이러니
-윤후명 삶의 아픔 살아나
김경욱 「양들의 역사」
김경욱이 수상작과 함께 실은 자선 대표작이다. 이렇게 치이고 저렇게 치이고, 내부로부터 그리고 외부로부터 치이는 우리가 겪은 그 이렇고 저런 사건사고들이 조심스럽게 다뤄지고 있다. 그 조심스러움은 한국인이지만 일본인 행세를 하는 주인공인 택시 손님이라는 설정으로 조심스럽게 소설에 안착되어 있다.
김이설 「빈집」
“소파에 앉아 둘러본 새 아파트는, 흡사 인테리어 잡지책에서 막 오려낸 사진처럼 말끔하고 정갈해 보였다. 수정은 그 순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낀다면 바로 이 순간에 느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완벽한 그림이 아닐까? 다른 여자들도 이런 순간이면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수정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p.126) 새 아파트에 입주한 젊은 주부, 아직 아이를 갖기 전인 삼십대 중반의 여성이 갖게 되는 심리를 그려냈다. 우리 내부에 있는 흔하디 흔한 욕망과 그 욕망의 허위성에 대해 지극히 일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탁환 「앵두의 시간」
책에 실린 다른 소설들이 거의 정확히 단편 소설의 분량인데 반하여 김탁환의 소설은 중편 분량이다. 어린 시절 병을 앓은 이후 시골에서 앵두 나무를 키우며 지내는 외삼촌, 치숙은 쓰는 인간이고 읽는 인간이고 보는 인간이다. 소설은 그러한 외삼촌과 연을 맺고 지내는 나의 이야기이다. “헛돌고 있지 않아? 네가 조선시대에 밝은 건 대학원에서 조선 후기 소설을 전공했기 때문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주객을 바꾸지 마. 조선시대를 쓰려고 소설가가 된 게 아니잖아? 물론 인간에 대한 고민을 푸는 장으로 과거의 어느 시기를 고를 순 있겠지. 조선시대도 좋고 고려시대도 좋고 삼국시대든 고조선이든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그 역은 곤란해. 조선시대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소설이 아니라 연구를 했어야지. 문헌을 뒤지고 논문을 썼다면 그래도 몇 걸음 정돈 학계에 기여를 했을 거야.” (p.196) 치숙 癡淑, 의 의미를 뒤지다 채만식의 소설 《痴叔》을 알게 되었다. 부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아저씨를 통하여 나를 비판하고 있다는 소설 《痴叔》 과 <앵두의 시간> 속 癡淑 을 슬쩍 겹쳐놓아보고 싶어졌다.
윤이형 「이웃의 선한 사람」
“... 저는 제 머리 뒤쪽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어요. 총알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죠. 그래서 상상할 필요가 없어요. 몸의 방향을 바꿔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 거기서 방향을 바꾼다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미 봐서 아는 일들만 계속, 계속, 계속 다시 봐야 한다면 결국 정신을 놔버리지 않겠습니까?” (p.243) 나의 딸을 구해준 남자, 이웃집의 선한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자이다. 그는 나의 딸과 스치고 나서 나의 딸의 미래를 보았고 바로 그 장소에서 나의 딸을 구했을 뿐이다. 소설에 실린 몇 편의 소설에서 세월호 사건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이 소설에도 그 그림자가 살짝 겹쳐지고 있다.
정찬 「등불」
<이웃의 선한 사람>이 세월호의 그림자가 살짝 드리운 소설이라면 <등불>은 보다 명확하게 그 그림자와 겹쳐 놓은 소설이다. (컨테이너에서 합숙을 하던 유치원생들이 화재로 사망한) 씨랜드 사건에서 어린 딸을 잃은 남자, 시간이 흘러 화물 트럭을 모는 그 남자가 들른 밥집, 아기를 키우며 지내는 여자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다. 남자와 함께 트럭을 탔던 그 여자와 그 여자의 아기는 그 배에 타기는 한 것일까... 등불, 보이지 않는 이 절망의 시대...
황정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은 부부, 그들은 지금 유럽을 여행 중이다. 자식을 앞세운 참척의 고통, 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소설 또한 세월호를 떠오르도록 만든다. 숲으로 떠난 여행, 그리고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야유회에 사용될 물건들, 그렇게 아이를 들쳐 업고 뛰어내려온 이후 다시 들르지 않은 그곳, 유적처럼 남아 있을지 모를 물건들에 대한 이미지가 꽤 깊숙이 새겨진다. 이러한 잃음들은 이들의 여행까지 따라온 것만 같다. 그렇게 이 부부는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서로를 잃어버리고 있다.
[출처] 천국의 문 : 2016 제4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김경욱 등|작성자 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