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계보를 이은 김숙자와 김종직의 생애 조명
김종직(金宗直, 1431 ~1492)은 최초의 사화(士禍)인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서를 제공한 인물로 유명하다.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조정 핵심세력으로 길러 훈구파의 실정을 바로잡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림파의 영수였다.
그는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의 후광을 배경삼아 그는 자기 문인들을 여러 분야의 관직에 진출시켰다.
김종직이 정치권에 등용된 시기는 세조때이다.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해 세조~성종 2대에 걸쳐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훈구파의 안일한 형태를 바로 잡아 개혁을 하려는 사림파가 충돌함으로써 반목과 대립이 심했다.
성종은 훈구파의 해악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사림학파에 더 힘을 실어 주어 김종직으로 하여급 개혁을 주도하게 했다.
성리학의 계보를 살펴보면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사람은 길재이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 정계에 진출한 이는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인물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그의 문하생으로는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유호일, 남효온 등이다.
부친 김숙자는 고려 후기의 성리학자 길재 제자로 학식이 뛰어나고 (소학) 실천을 중요시하여 성리학 학맥을 이은 인물이다.
경상도 고령과 개령, 성주 등지에서 수령과 교수직을 역임했으며, 밀양에 거주하던 박홍신의 사위가 되면서 밀양에 정착했다. 김종직은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 사림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총명해 암기에 능했으며 날마다 수천 자씩을 기억해 갔다고 한다. 15세에 이미 시문에 능해,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20세가 안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에는 정계에서 그다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성종 시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직접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다시 중앙으로 진출했으며, 이때부터 영남 사학의 거두로서 또한 성종의 근위 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이와 함께 그의 제자 최부,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요직에 등용되기에 이른다.
과거에 합격한 후 김종직은 출세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인정받았던 그의 글 솜씨가 빛을 발했다. 그는 관직 초기 승문원의 직책을 담당하면서 애책문과 옥책문 등을 작성했으며, 예종 승하 당시에는 교지를 받들어 시책문(諡冊文)과 만사(挽詞)를 지어 올리는 등, 특유의 글 솜씨를 인정받았다. 그 외에도 사헌부와 홍문관, 예문관의 직책을 두루 거치며 당대의 엘리트들에게 주어지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에 앞서 1455년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그 해 세조의 즉위를 축하하는 ‘동당시’에 종형 김종석과 함께 응시해 형제가 모두 합격했다. 그는 세조의 찬탈(세조 찬위)을 비판했으나 세조의 조정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성종 때까지 벼슬살이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의 ‘조의제문’으로 많은 사림이 후대에 죽었으며 그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자였다. 때문에 이황, 허균 등 많은 후대의 유명한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종직은 이른바 ‘영남학파’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당대에는 경상도 ‘사당’(선비당)이라고 불렸다. 초기 유학에서는 붕당, 당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지만 송나라대 이후 성리학 체제에서는 오히려 이익을 탐해 모인 소인당에 맞서 도학을 중심으로 ‘군자당’이 결집해야 한다는 논리로 전환되었고 성리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주자는 임금까지도 군자당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인군위당’(引君爲黨)을 주장했다. ‘사당’이라고 불린 것 자체가 이미 훈구척신들과는 구별되는 사림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육성한 제자들은 훈구파와 갈등을 일으켜 몇 차례 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노골적으로 유자광을 조롱하거나 멸시했는데 그 이유는 유자광이 노비 출신의 어머니를 둔 얼자 출신 주제에 고위직에 오른 것을 건방지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자광은 종 출신 서자로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이후 예종, 성종, 연산군 때까지 요직을 지냈다.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해 죽인 일이 있는데(남이의 옥사) 김종직은 이러한 유자광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함양의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를 보고 절경에 감탄해 아전에게 필묵을 시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그런데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유자광의 시가 함양 동헌 현판에 새겨있는 것을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 내어 불사르게 했다. 이로 인해 유자광과의 악연이 시작되었으며, 또한 이는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기도 했다.
한편 수제자 김굉필이 김종직이 문장에만 치중한다며 스승을 비판한 일도 있었다. 1484년 10월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등용된 뒤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자 김굉필은 이를 비판했다. 이때 김굉필을 비롯한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스승이 훈구파에 맞서 조정을 바로잡아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오히려 중직에 임용되자 김종직은 조정에 건의 하나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김굉필이 김종직의 뒤를 이어 사림의 영수 역할을 하였다.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전통이 정통 성리학 공부에 몰두한 제자 김굉필, 정여창,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로 이어지면서 이들과는 달리 김종직은 조선 문묘배향 18현에서도 제외된다. 송시열을 비롯한 후대 성리학자들의 평가는 김종직을 정몽주와 김굉필을 이어주는 종주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다. 현대 사림의 계보표를 보면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사림의 계통으로 확실하게 인정해주는 인물이다. 이는 김숙자가 길재의 제자였고 김숙자는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후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수록한 (조의제문)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극돈 등의 비난을 받아 공론화되었다가 세조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압수당한 뒤 불살라졌다. 이극돈은 자신이 상중에 술을 마시고 기생을 출입시킨 것을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을 못 마땅히 여기다가 조의제문의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했으며 중종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금산의 경렴서원, 개령의 덕림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