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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始原)의 바다, 삶의 중심
이성배 시집 『이어도 주막』
이정훈
많은 사람들은 원시 지구가 만들어지면서 지구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궁금증을 가지고 탐구해 왔다.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 샤크 만灣에 가면 세계자연유산인 대규모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 분포지가 있다. 남조류藍藻類로 추정되는 ‘시아노박테리아’라는 생명체다. 이 생명체는 원시 고생대 바다에서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지구에 많은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해 왔다. 이는 지구 생명의 근원과 탄생의 과정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태고 적부터 바다는 생명체의 근원이었다.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한 때 해양(바다)문학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던 적이 있다. 바다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 대륙과 대륙, 대륙과 도서를 연결하는 교역과 문명의 통로이자 대자연의 위력과 경외감이 교차되는 삶의 무대였다. 카르타고, 스파르타, 그리스, 로마의 활약상과 통일신라시대 혜초慧超의 인도순례와 장보고張保臯의 해상활동부터 이븐 바투타Ibn Battuta의 해양탐험, 16세기 대항해시대와 명대 정화鄭和의 원정 그리고 조선시대 최부崔溥·문순득文淳得의 표류체험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양활동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운문으로서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시초는 「공무도하가」와 「해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말 거문도의 문장가 김류金瀏 선생의 『귤은전집』과 현해탄을 소재로 일제강점기 조선 청년들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자각과 극복을 노래한 임화의 『현해탄』(1938) 그리고 모더니즘 시의 개척자인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1946)에 이른다. 이러한 계보는 당대의 이생진, 류재만, 김선태, 김성식, 이윤길 등 수많은 시인들로 이어지며, 이들은 해양과 관련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성배 시집 『이어도 주막』(2019 애지)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성배 시인 역시 이러한 해양문학의 계보를 잇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지금까지 줄곧 바다시에 천착해 온 시인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시가 바다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내 몸에 바다가 있다//아프고 힘들 때/그 바다 볼 수 있다/피와 땀과 눈물이/생명의 시원이고/짠맛이 인생의 참맛이라고/몸에 소금을 남겨 두었다”(「바다에서 오다」)라고 했는데, 시인에게 바다는 어떤 공간일까?
이성배 시인의 『이어도 주막』에 나타난 중심축은 다소 진부한 듯 보이지만 바다와 인생이다. 지금까지 시인의 삶을 지배하고, 인생의 나침반이 정침을 지향하는 곳도 바다 혹은 그 언저리였다. 바다를 무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역사적 무게를 그는 온몸으로 껴안으며 치열하게 싸워왔다. 바다가 변화무쌍하듯이 인생 또한 파란만장하다. 그래서 그의 시도 바다를 닮았듯이 생을 입체적이고 전체적으로 조망하려 한다.
대자연의 서사시, 바다의 이미지
시집 전체를 읽어봐도 바다를 단순히 그리움이나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수부들의 희로애락이 깃든 삶의 현장으로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대자연의 모습 그 자체로서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 깃들어 사는 인간은 나약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서 재현된다.
녹슨 갑판 아래 죽음을 밟고 살아도
파도에 유서를 쓰지 마라
출렁거리는 문장
해독할 수 없다
바다는 하늘에 닿아 있고
바닷길 따라 하늘로 돌아간다
부풀어 오른 수평선에 뱃머리 마디마디
피멍울 맺혀도
그리운 이름 부르지 마라
소리조차 침몰하고 사랑마저 삼켜버리는
바다는 대답이 없다
-「바다에는 메아리가 없다」 부분
화자는 대자연의 섭리를 오래전에 터득한 선지자 같다. 냉혹한 바다의 실체 앞에서 감상적인 상념이나 푸념은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가 발을 디디고 선 곳은 어디일까? 천길 물 속 위로 솟아오른 파도 끝이다. 그곳이야말로 대자연의 힘과 숨결이 느껴지고 위대한 자연 앞에 인간이 미약하고 위태로운 존재로 보이는 조망점이다.
뿌리 내릴 흙 한 줌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
발 디딜 곳은 오로지
넵튠의 삼지창 끝
깊이를 알 수 없는 챌린저 해안이나
사라지면 돌아오지 않는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이물을 조아리고 고물로 부복하는
일보일배一步一拜 순례의 길
온 길 지워지고 갈 길 보이지 않는
길 없는 길 위에서
삼십 년 읽어도 해독할 수 없는
바다의 경전
평생 들어도 알 수 없는
바람의 독경
-「파도 끝을 밟고 서서」 부분
그 순례 길에서 화자는 ‘에피파니epiphany’를 겪게 된다. 바다는 “삼십 년 읽어도 해독할 수 없는 경전”이라는 사실, 그리하여 파도에서 경經을 읽는다. “삶이 무거워 자꾸 가라앉을 때/바다로 가자/ (…) /바다가 읽어 주는 푸른 경전/차가운 해풍 속에서/선원의 피가 뜨거워지고”(「파도에서 경經을 읽다」) 진정한 깨달음에 경지에 이르게 된다. 급기야 화자는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모든 것을 품어 안아 하나 되게 만드는 바다, 그 바다는 모든 것을 수용하며,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들 자신의 최후를 마치고 돌아가는 곳, 귀향이자 이상향인 이어도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물과 하나 됨을 이루게 되는 곳이다. 모든 생명체들이 그들의 모태인 “바다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바다로 돌아가다」)고 했던가? 어쩜 시인이 쓴 시들도 바다에서 왔으니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빛이 여과되고 소리가 차단된/가장 완전한 고독의 심연/삶의 굴레와 죽음의 공포 벗고/가장 완벽한 자유에 나침반 맞추어”(「인어를 찾아서」) 나가는 지점에서 그의 시가 빛나고 있다.
시 전편全篇과 다소 다른 느낌을 주는 표제시 「이어도 주막」도 모천회귀를 통한 이러한 하나 됨을 우리 역사와 견주어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어도에 주막 하나 지어야겠다
천지에서 헤어진 압록강과 두만강
다시 만나는 청청바다에
초가지붕 올리고 봉놋방 뜨끈뜨끈 데워 놓고
개다리소반에는 미역국과 파래무침
참가재미 한 마리 구워야겠다
동해와 서해로 흐른
구애하는 귀신고래 황홀한 노래
밤 새워 청해 들어야겠다
손바닥에 박힌 소금알 혀로 핥으며
파도에 갈라진 발바닥 서로 주무르며
파도소리로 하나 되는 첫날밤을
창호지 구멍으로 훔쳐보아야겠다
날이 새면 또 다시 흘러갈 난바다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만남을 위해 다시
그 봉놋방 장작불 지펴야겠다.
-「이어도 주막」 전문
다른 시와 다르게 사뭇 말의 가락이 느껴지는 운율이 살아있으며, 감성에 호소하는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다. 시제목 이어도는 엄밀히 말하자면 물 밑에 있는 암초지만, 제주도 사람들에게 있어 어부들이 죽어서 가는 이상향으로 알려진 섬이다. 시인의 시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주막, 초가지붕, 봉놋방, 개다리소반, 첫날밤, 창호지 구멍, 장작불 같은 시어들이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시대적 배경을 연상케 한다. 남북분단의 아픔을 노래하며, 우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통일이듯이 흩어진 물들이 합수되는 곳을 어부들의 이상향인 이어도로서 형상화 한 점이 이채롭다.
난바다에서 연안으로
그런데 그의 시에서 압권은 먼 바다에서 펼쳐지는 무용담(?) 같은 이야기보다 포구나 시장 같은 연안의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연안은 말 그대로 육지와 바다가 어우러지는 공간이며,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오손도손 정을 나누는 공간이다. 바다(해양)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바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다. 바다(연안)와 인간의 삶이 어우러지고 상호 소통하는 곳에 생명력이 있고 역동성이 있다. 인간이 소외된 공간으로서 바다는 너무나 쓸쓸하고 공허하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며 상호 소통하는 바닷가 포구의 시장이야말로 생명력 넘치는 풋풋한 삶의 현장이다.
사는 기 자갈밭에 딩구는 거 아이가
오데 쉬운 길만 갈 수 있노
내도 사람인데 우째 편케 살고 싶지 안컸노
부모 복 없는 년은 서방 복도 없다 아이가
원양어선 십년에 갑판장 되었다고
그리 조타 싸터마는
그 해 태평양 물구신 되었다 아이가
그게 다 내 복인데 한탄하몬 뭐하노
죽자 살자 살았다 아이가
자슥들이라도 부모 탓 안해쓰몬 시퍼
새벽도 밤도 몰랐는기라
그레도 삼시세끼 밥은 묵꼬 사니 그것도 오감치
에미 고생한다고 쏙 안 써키고 커준 것만 해도 고마운 기라
-「자갈치 아지매」 부분
정겹고도 구수한 사투리(탯말)의 시적 화자가 대화체로 풀어내는 개인적 삶에 관한 서사적 얘기가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갈치 아지매’의 삶이 애잔하면서도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온 바닷가 사람답게 듬직해 보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은근히 독자를 끌어당기는 웅숭깊은 입담이 느껴진다. 같은 대화체 시 「하선下船」도 마찬가지다. “ (…) 내는 고기를 쫓고 또 태풍은 나를 쪼차오고/죽을 똥 살 똥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니/벌써 여기 아이가/참말로 잠깐이제 잠깐인기라/이제 고마 내도 세상에서 내릴 때가 된기제/항구가 바로 코 앞이제//담배 하나 더 도고”라는 대목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한평생 어부로 살아온 바다사나이의 숨 가쁜 고백이 뛰쳐나온다. 그 동안의 고통, 숨 막히는 긴장감이 마지막 행 “담배 하나 더 도고”에 이르러 비로소 숨고르기를 한다.
하지만 몇몇 작품에서는 그러한 일상적 삶이 너무나 상투적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너는 고기보다 멍청하다. (…) 너는 잡힌 고기에게 먹이 주는 것 봤냐?”(「잡힌 고기」), “삶이 아무리 무거워도/세상 파도 아무리 높아도/그 세상 속에 있을 때”(「배」), “세상의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끊임없이 몸부림치는 나도/한 마리 멸치”(「멸치」) 이런 표현에서 기시감déjà-vu과 함께 시적 긴장감이 상쇄되고 만다. 오히려 시인이 자주 가본 적이 있고 접해봤던 시장 사람들을 묘사한 작품이 더 맛깔스럽게 느껴진다.
가득 실려 온 바다가 쏟아진다. 번쩍이는 비늘이 밝히는 어둠. 시퍼런 칼날의 춤사위에 부력 잃은 부레가 휘청거리고 쓸개도 파랗게 질려 나온다. 가르고 훑어내고 또 가르고 훑어내는 칼춤. 겹겹이 껴입은 옷에도 바람은 뼈 속을 파고든다. 비닐장갑 속 손은 아픔조차 얼었다. 납작해진 스티로폼 방석의 비명보다 허리뼈 펴는 소리 크게 들리는 새벽 세 시. 빈 뱃속 유혹하는 중참보다 더 고픈 잠의 허기. 따뜻한 라면 국물 해풍에 보시하고 쇠기둥에 등 붙인 영하零下의 쪽잠. 갈라도 갈라도 쏟아지지 않는 삶의 멍울 함께 잠드는 공동 어시장. 상자 안 고등어들도 빠져나간 바다를 껴안고 잠들고 있다.
-「공동 어시장, 새벽 세 시」 전문
사방이 고요해야 할 시간, 어시장의 하루가 새벽을 깨운다. 남들이 다 자는 시간에도 고단한 삶의 짐을 부리지 못해 추위와 허기에 지친 몸을 이끌며 새벽시간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시장상인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경험해 보지 않은 자라면 결코 쓸 수 없는 시요, 발품을 팔지 않고서는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다.
바다, 환경 그리고 생태계
시집 2·3부를 펼쳐보면 바다 생물 이야기가 나온다. 고래, 블루핀, 귀신고래, 말항고래 그리고 황제펭귄에 이어 멸치, 심해 새우, 보리 숭어에 이르기까지 많은 바다 생명체들이 등장한다. 그 중 고래에 관한 시가 빈도에 있어서 단연코 돋보인다.
오천만 년 전 바다로 간 고래처럼 아직 나는 바다에서 진화 중, 땅 위의 이전투구 벗어나 대양 누비기 위해, 머리뼈 부수어 콧구멍 정수리에 올리고 귀 뼈 뚫어 공기주머니 만들어야 하리. 디딜 곳 없는 두 발, 잡을 것 없는 두 손 지느러미 되어야 하리. 해풍의 냄새로 계절을 알고 바다 색깔로 해류 읽어야 고래가 될 수 있으리. 가끔 파도 위로 고개 내미는 것은 떠나온 땅을 향한 한 가닥 그리움의 숨쉬기. 파도의 날카로운 이빨과 바람의 미친 발톱으로 머리 부수고 사지 잘라 나는 고래가 되어 가는 중.
-「바다로 간 고래」 전문
고래는 예로부터 육지에서 바다로 이동하여 진화해 온 대표적인 포유류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귀신고래가 그들의 역사를 말해주듯이 화자는 진정한 바다사나이가 되기 위해 목하 진화 중이다. 자연의 순리에 거슬리지 않고 대자연인 바다에 순응하며 계절과 해류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훈련하는 중이다. 이제 그러한 고래도 “다시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었고, “피 묻은 작살 피해 떠난 후” 부재 속의 기다림으로 화자의 가슴 속에 각인된다. 화자는 은근히 오늘날 남획으로 사라진 고래를 통해 바다 생태계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황제펭귄」에서는 생존을 위한 허들링huddling 속에 알을 지키는 수컷의 부성애와 부화한 새끼에게 위 속에 저장해 두었던 먹이를 토해서 먹이는 부모 펭귄의 극진한 사랑을 노래한다. 또한 「멸치」에서는 “약한 것은 살기 위해 군집”을 이루는 자연의 섭리를 보여주며, “쫓는 자도 쫒기는 자도/살기 위한 몸부림이다”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다 생물에 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엄밀히 말하자면 시인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바다 생물이나 생태계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느낀 감흥을 노래한 시들로 보인다. 해양생태 환경변화에 대한 무한한 감동과 충격을 주기보다는 그러한 생명체를 통해 인간에게 주는 교훈이나 사실적 내용 전달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따라서 해양생태계에 관한 잘 엮어진 시라는 느낌은 들지만, 진정한 감동을 전달하는 시라고 말하는 데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다. 또한 바다 환경이나 생태계에 관한 화자의 인식 태도도 부지중에 생존 공간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하다. “평생/바다를 훔쳐 먹고 살았다/씨 한번/뿌린 적 없이”(「어부」)라고 했듯이, 경제활동과 관련된 인간중심의 사고로 바다 공간을 대하고 있다. 바다와 인간이 상호 작용하며 인간은 바다 생태계와 환경을 위해 노력하고, 바다는 또 인간에게 경제적 편익을 제공하는 상호 보완적인 모습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생존의 공간이자 포획의 공간이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 인간이 바다생태계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오늘날의 바다 환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지구 곳곳에서 감지되는 기후 변화와 남획에 의한 생물다양성 파괴, 국가 간 바다쓰레기 같은 환경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해양에 대한 깊은 성찰과 관심이 더 필요한 때다. 특히 인간에 의한 바다쓰레기-미세 플라스틱이나 그물 같은 어구- 발생으로 많은 해양생물들이 고통 받을 뿐만 아니라 그 피해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돌아오는 과정을 깊이 통찰해야 한다.
바다시의 난제와 전망
시집 전체를 읽다보면 시인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시적 공간이 ‘바다/연안’에 한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이성배의 시를 바다시에 국한하지 않고 서정시의 큰 틀에서 본다 할지라도, 시에서 다루는 바다는 어떤 공간이며, 어디까지가 바다시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인지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해양문학을 논할 때도 해양의 범주를 어디까지 보아야 할 것인지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적어도 인간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연안의 갯벌이나 도서지역에도 관심이 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섬들이 없는 바다는 너무 외롭고 허전하고 쓸쓸하다. 이성배 시인의 관심이 바다와 연안에서 갯벌, 도서지역까지 확장될 때-물론 「소매물도」라는 시가 한 편 있지만-, 그의 시가 시인이 바라는 바다시로서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음으로 그의 시에서 삶의 현장에 관한 고통과 슬픔의 강도가 엷게 느껴진다. 이는 현장 체험과 보고 들은 이야기 간의 괴리감에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대상을 묘사하는 스케일scale의 차이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유용주의 시 「성대 결절」(『어마니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 2019 걷는사람)에서 중국집 보이로 가는 아들과 이별해야만 하는 어머니의 슬픔이 어미소가 겪는 아픔과 오버랩 되는데, 이는 소장수가 어미소에게서 송아지를 데려갈 때 이장댁 외양간에서 일어나는 장면이다. 그 기억은 유년의 오랜 시간을 지나온 동안에도 현재인양 애잔한 슬픔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성배의 시의 배경은 난바다, 대양, 해구, 심연, 태풍, 산만한 파도 등 워낙 큰 공간이 등장하기 때문에 알상적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미묘하고도 섬세한 감정을 연출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을 수밖에 없고, 육지나 연안에 비해 삶터로서 접근성이 쉽지 않은 먼 바다라는 특성으로 대자연 앞에 인간의 감정은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진정성 있는 시를 쓰기 위해서 좋은 체험이 필요하다. 시집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그의 시가 체험에서 비롯된 시 이상으로 훌륭한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시를 찬찬히 살펴보면 몇 가지 오류, 옥의 티가 발견된다. 가령 「용오름」이라는 시에서 용오름 현상은 몹시 한랭건조한 상층부 기류와 하층부 바다의 난기류가 만날 때 대기불안정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잔뜩 달구어진 대마난류가/꽁꽁 언 리만한류 품어/하나 되는/동경 127도, 북위 27도”(「용오름」) 의 좌표 해상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곳은 ‘오키나와 나하’ 근처 해상이다. 오히려 우리나라 울릉도 해상에서 관찰되기 쉽다. 한편 「유빙의 항해」라는 시의 “파타고니아 이빨고기 감미로운 입맛은/날카로운 이빨 뒤에 숨어 있다/황홀한 오로라에 취한 항해사/오크나무 조타륜을 놓칠 때”라는 구절을 보면, 파타고니아 이빨고기(일명 메로)를 잡기 위해 마젤란 해협에서 조업 중임을 짐작케 한다. 이곳은 대략 남위 52도 부근으로 오로라 관측이 어려운 지점이다. 오로라는 남반구의 위도 65~75도 사이에서 잘 관찰되는데, 마젤란 해협보다 훨씬 남극점에 가까운 남위 62도 부근의 우리나라 세종기지에서도 오로라 관측이 어렵다.
시가 반드시 사실적 근거에 의해서 써져야 하는가? 물론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얼마든지 재창조될 수 있고, ‘시적 허용’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내용들은 시의 진정성을 살피는 데 있어 숙고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시의 진정성은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할 때 더 한층 진가를 발휘한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시집 전체를 모두 바다시로 썼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바다에 대한 시인의 염원과 회귀를 ‘아쿠아필aquaphile’ 측면에서 새롭게 평가해 볼 필요성이 있다. 지금까지 대다수의 문학작품들이 주로 육지부 시각에서 문학적 소재를 찾았다면, 연안과 대양으로 새롭게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는 비단 문학적 소재의 폭을 넓히는 계기를 넘어서 우리 문학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바다는 시원의 세계이자 모든 생명체 출현의 모태였다. 수많은 종種이 바다와 더불어 살아왔으며, 인간도 바다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바다이기에 대상을 바라볼 때 환경적·생태적 사유思惟에 이르는 새로운 영역까지 시상詩想이 확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유가 바다시로서 진정한 총체성을 구현하는 데 필요 불가결하며, 나아가 육지부와 해양부를 평등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이정훈 약력
2018년 계간 『문예연구』신인문학상(평론 부문)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노동현실과 인간존재의 경계에서: 백무산 시의 변모과정」,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共進化): 이문구의 작품 세계」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여순사건 사적지에 대한 다크투어리즘 적용 방안」 등이 있음.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