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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알래스카주의 인디언 원주민들은 아침에 태양이 북미 대륙의 최고봉(6,194m) 위로 솟아오르는 일출과 저녁에 이 봉우리 너머로 전개되는 일몰(日沒)의 광경을 관찰하고, 예로부터 이 산봉우리를 ‘태양의 집’이란 뜻으로 ‘데날리(Denali)’라고 불러 왔다. 그런데 1897년 이 산을 처음 발견한 미국인 탐광자(探鑛者) 디키는 이 산을 무명봉으로 오해하고, 당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윌리암 매킨리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매킨리(Mount Mckienly)’ 라고 명명하여 오늘날까지 이 봉우리는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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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킨리의 북동쪽 초등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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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번, 수직도 3,000여m 남벽에 등반 가능성 제기
매킨리는 고갯마루인 데날리패스(5,547m)를 사이에 두고 남봉(6,194m)과 북봉(5,934m) 쌍둥이 봉으로 이루어진 설산으로, 고도는 6,000m급에 속하지만 등반 고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북쪽 맥고나걸계곡의 베이스캠프(1,074m)에서 정상까지의 표고차가 5,120m나 되고, 서쪽 카힐트나빙하 상의 베이스캠프(2,316m·현재는 카힐트나 패스 아래쪽 3,078m 지점)에서 정상까지 수직 고도가 3,878m(현재는 3,116m)이고, 남쪽 카힐트나빙하 남동 지류 상의 베이스캠프(2,195m)에서 정상까지 수직고도가 3,999m로서 히말라야의 K2나 에베레스트의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의 등반 고도 3,000m를 훨씬 능가한다.
또한 이 산은 북극권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5월 산 중턱의 최저 기온이 영하 40도에 육박하며, 동계에는 영하 50도 이하까지 떨어질 때도 있다. 또한 최고 시속 240km를 웃도는 허리케인급 강풍이 몰아치는가 하면 정상 공기 속의 산소 희박도가 히말라야의 7,000m급 봉우리들과 맞먹어, 세계에서 등반하기 가장 어려운 산 중의 하나로 꼽힌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악천후의 예측이 불가능하고, 현수 빙하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바람에 숨은 크레바스가 다수 생성되어 등반 시에 안전했던 루트가 하산 시에 죽음의 트랩(trap·올가미)으로 급변하기도 한다. 잦은 폭설에 따른 대규모의 눈사태, 돌발적인 고산병, 저체온증 등으로 인해 이 산에서는 많은 산악인이 목숨을 잃었다. 단독등반하고 하산 시에 사고를 당한 일본의 유명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 우리나라의 고상돈, 1992년의 11명 산악인 등, 지금까지 희생자들의 총계가 알프스의 죽음의 벽 아이거 북벽 희생자 수를 훨씬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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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킨리 초등자 허드슨 스턱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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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파커 교수와 브라운 두 사람이 북동쪽의 기나긴 멀드로빙하로 진출 중에 거대한 빙폭(하퍼 빙폭)이 등로를 차단하자 북동릉의 일부 구간으로 우회하여 빙폭 위쪽 빙하(하퍼 빙하)를 이용하고, 정상 설원과 설벽을 돌파한 후 정상을 코앞에 둔 6,096m 지점에서 허리케인의 기습을 받아 퇴각했다. 그 다음해 허드슨 스턱 전도사 일행이 이 루트를 완등하며 초등했다.
1947년 미국의 전설적인 산악인 브래드포드 워시번 박사와 그의 아내 바바라 여사 등이 하퍼 빙하 위쪽 데날리패스에 도달했고, 거기서 좌측 정상능선상 5,989m 지점의 아치디컨 암탑을 지나 변형 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했다. 1951년 워시번 박사 일행이 서쪽 카힐트나패스, 웨스트 버트레스, 데날리패스, 우측 정상능선으로 이어지는 최단 코스를 개척해 오늘날의 매킨리의 노멀 루트가 되었다.
1961년 이탈리아 캐신 대가 매킨리의 남벽 사우스 버트레스 루트(캐신 리지)를 개척했다. 1963년 미국 하버드대 산악반이 북봉의 위커샘 루트를 개척했고, 1977년 대비드슨 일행이 웨스트 스퍼 루트를, 톰슨 일행이 남쪽 사면 직등 루트를 개척했다. 1984년 이탈리아 산악인 레나토 카사로토가 단독으로 기나긴 북동릉 직등 루트, 일명 ‘돌아오지 않는 능선(Ridge of No Return)’ 루트를 개척했다. 이밖에 라인홀트 메스너 일행, 더그 스코트와 두갈 해스턴 등도 신루트를 개척하는 등, 지금까지 이 산에 20여 개의 루트가 개척되었다. 이 산은 미국 알래스카주의 외진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접근이 매우 어려워, 등반가들은 주로 ‘하늘 택시’라는 별명이 붙은, 바퀴 대신 미끄럼판이 부착된 경비행기로 다가간다.
미국 산악인 위시번 박사는 스위스에서 시리즈로 발간되던 등산서적 <The Mountain World 1956-1957>에 매킨리의 수직고도 3,000여m의 남벽 루트 등반 가능성을 제기했는데, 세계의 어떤 산악인도 이 루트에 도전하려고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1958년 발터 보나티와 자일 파트너가 되어 카라코람의 가셔브룸 4봉(7,925m)을 초등한 이탈리아의 유명 산악인 카를로 마우리가 최초로 매킨리 남벽 등반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당시 50대의 산악인 리카르도 캐신을 등반대에 초빙했다. 그런데 마우리가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던 도중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이 등반대를 이끌 수 없게 되어, 캐신이 등반대 대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레코의 산악회, 즉 ‘거미들’ 출신의 젊고 등반기량이 뛰어난 산악인 5명(잭 카날리, 지지 알리피, 로마노 페레고, 뤼지노 아이롤디, 아니발레 추키)을 이끌고 매킨리로 향했다.
캐신은 현지 사정에 밝은 미국의 유능한 산악인 봅 굿윈을 이탈리아 등반대에 초빙하고, 미국 보스턴에 들러 자신들의 등반을 격려해 준 보스턴 과학 박물관장인 워시번 박사를 방문했다. 워시번 박사는 캐신에게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매킨리의 방대한 양의 사진과 지도를 보여주며 사우스 버트레스를 등반하라고 조언했다.
캐신은 6월 9일 앵커리지에 도착해 이탈리아의 현지 교민 스토코, 페트레카의 도움을 받아 장비 일부와 식량을 구입했는데, 이 교민들은 캐신 대장에게 자신들을 등반대에 참가시켜 달라고 졸라댔다. 캐신은 미국 산악인 굿윈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 그의 참가가 불투명해지자, 마지못해 두 사람의 교민들을 등반대에 참여시켰다. 캐신 대장은 등반 장비와 대원들을 산 밑까지 수송해 줄 캐나다 경비행기 조종사 돈 셀던을 고용한 후 그의 경비행기에 탑승하고 매킨리 남벽을 가까이서 세밀하게 정찰했고, 사우스 버트레스의 바위와 얼음 절벽의 위용에 압도당했다.
6월 중순 조종사, 셀던이 매킨리 등반대원들과 장비를 먼저 탈키트나까지 수송하고, 이어서 산 밑의 카힐트나빙하로 수송하기 시작했다. 미국 산악인 봅 굿윈이 알래스카의 산행을 마치고 드디어 이탈리아 등반대에 합류했다.
조종사 셀던은 이탈리아 대원들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해, 남쪽 베이스캠프(2,195m)보다 4km 위쪽 카힐트나빙하의 동쪽 지류 상 3,444m 지점에 몇 개의 짐을 투하해 놓고 대원들을 그곳에 착륙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카힐트나빙하 동쪽 지류상 눈밭의 상태가 나빠서 셀던의 착륙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어 카날리, 알리피 두 대원과 미국 산악인 굿윈이 남쪽 베이스캠프에서 카힐트나빙하 동부 지류 상 그들의 새로운 베이스캠프 예정지까지 장비 이동을 책임졌다.
캐신은 베이스캠프에서 며칠 동안 현지교민 스토코와 페트레카의 행동거지를 관찰했는데, 그들은 가혹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마저 책임질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캐신은 그들이 등반 중에 사고라도 당하는 날에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에게 등반대의 탈퇴를 종용했다.
그들은 7월 1일부터 3일까지 폭설이 계속되어 등반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들은 탈키트나에서 기상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잡았던 많은 양의 송어를 그곳까지 운반하여 빙하 냉장고 속에 보관해 두었는데, 그것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교포 스토코와 페트레카는 여러 날 동안 계속되는 악천후의 시련을 견딜 수 없게 되자 7월 4일 앵커리지로 돌아갔다.
사우스 버트레스는 매킨리의 남서벽과 남벽의 경계선에 위치한 화강암 능선이다. 카힐트나빙하의 동쪽 지류에서 이 능선에 붙기 위해서는 우선 최초의 난코스인 가파른 쿨와르를 돌파해야 했다. 7월 6일 수요일, 정오에 구름 사이로 약간의 햇빛이 내리비치자 대원들은 즉시 사우스 버트레스로 이어지는 거대한 쿨와르 우측의 노출된 암벽에 붙었다. 그들은 폭설의 방해를 받았지만 가파른 구간으로 등반을 계속하여 고정 자일을 설치하고 하산했다. 3년 전 이탈리아 대가 가셔브룸4봉을 초등할 때는 노래 솜씨가 가수 뺨치는 마우리, 보나티, 고비, 체니가 선창하고 대원들이 합창하여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보냈는데, 이번 등반대에는 그런 가수들이 한 명도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지루했다.
- 알리피 대원-등산화를 부상 동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크램폰도 없이 하산했다
희생과 우정으로 더욱 빛나는 리카르도 캐신 대의 사우스 버트레스 초등기-
좌절이라는 ‘지옥’과 희망과 낙관이라는 ‘천국’ 넘나들어
다음날은 맑은 날씨였지만, 계곡 밑에 모여 있던 검은 구름 덩어리가 조만간의 일기불순을 예고하며 그들에게 만용(蠻勇)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해 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각자 장비와 식량이 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거대한 쿨와르 측벽의 고정자일로 등반하여 전날의 최고 도달 지점을 통과했다. 카날리 대원이 얇은 얼음이 덮인 슬랩에서 선등하다가 이내 녹초가 되었고, 알리피 대원은 더 어려운 난코스를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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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킨리 서릉 노멀루트. 바위 아래 데날리 패스에서 좌측 설사면으로 등반로가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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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예상대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등반을 계속했다. 알리피 대원은 피톤 한 개를 설치하고 첫 번째 오버행은 돌파했으나, 두 번째 거대한 화강암 오버행 밑에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라며 등반을 포기했다. 캐신 대장은 페레고 대원에게 루트 개척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좌측으로 트래버스하도록 지시했다. 페레고 대원이 그쪽으로 등반하여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자, 캐신 대장이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페레고 대원에게 접근했다. 그들이 도달한 위치는 능선 상의 첫 번째 작은 안부였다. 날은 저물고 안개가 점점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루트 개척에 난항이 예상되자, 그들은 그 날의 일과를 마감하고 하산했다.
추키, 알리피, 카날리, 페레고 4명의 대원들이 전날의 최고 도달지점인 첫 번째 콜(col)에서 좌측으로 루트개척을 재개했다. 굿윈과 캐신은 등반 중 적당한 장소에 식량과 장비를 데포시켜 놓고 하산했다. 캐신 대장은 복잡하게 얽힌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사우스 버트레스의 하단 난코스 등반에 대원 전부를 투입해도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사우스 버트레스의 설릉과 빙하에 도달할 때까지는 팀을 2개조로 나누어 등로 개척과 휴식을 교대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캐신 대장은 추키, 페레고 두 대원과 루트개척에 나서서 그들이 전날까지 개척했던 루트를 포기하고 새로운 루트 개척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그들은 사우스 버트레스의 하단을 등반 중에 실망과 좌절이라는 지옥과, 희망과 낙관이라는 천국 사이를 자주 오가야 했다. 그들은 65도 경사의 베르글라 슬랩, 오버행 암벽, 화강암 첨탑들을 돌파하며 루트를 개척하느라고 파김치가 되었다. 얼음과 바위의 절벽, 오후마다 계속되는 폭설, 그리고 사람을 날려보낼 정도의 강풍이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들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수 차례 퇴각을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또 다른, 수직에 가까운 빙벽과 암벽의 미로로 루트 개척을 재시도했다. 불굴의 산 사나이 캐신은 자신의 기나긴 절벽 등반 여정에서 매킨리의 사우스 버트레스 하단 등반에서처럼 불확실성과 난관에 봉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실토했다. 그들은 전날 포기했던 루트에 다시 붙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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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킨리 남벽. 맨 왼쪽 능선이 캐신 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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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카날리, 알리피, 아이롤디, 세 대원들은 화강암 슬랩을 돌파하고 마치 뱃머리처럼 튀어나온 오버행의 암벽 좌측의 난이도 4~5급의 디에드르(diedre, 코너) 밑에 어렵사리 진출했는데, 디에드르는 너무 가팔라서 등반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절망상태에 빠졌다가 마침내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들이 좌측의 가파른 두 번째 쿨와르(나중에 일본대가 사우스 버트레스를 재등할 때 돌파하여 ‘일본대 쿨와르’로 명명됨) 안으로 내려서기만 하면 두절되었던 등로가 다시 열릴 수 있었다.
그 쿨와르의 상단은 사우스 버트레스 능선상의 암탑 뒤쪽에 위치한 두 번째 콜로 이어져 있었고, 그 콜 위쪽은 날카로운 설릉이 사우스 버트레스의 중간지점에서 시작되는 조그만 현수(懸垂)빙하로 이어져 있었다. 이 두 번째 쿨와르는 워시번 박사가 그들에게 선물한 지도상에 남벽의 3,563m 지점에 위치한다고 분명하게 표기된 바로 그 쿨와르였다. 그들은 위시번 박사가 지적한 두 번째 쿨와르의 출발점이 그들이 등반했던 첫 번째 쿨와르의 출발점보다 200m 위쪽 빙하 상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때까지 엉뚱한 쿨와르 속에서 생고생을 하며 정력을 낭비했던 셈이다.
그들은 우선 두 번째 쿨와르 속으로 자일하강을 했다. 이 쿨와르의 수직 구간은 돌파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들은 쿨와르 좌측으로 횡단하고 나서, 빙벽의 갈라진 틈과 짧은 암벽으로 수직구간을 우회한 후 그 위쪽으로 올랐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잠시 구름이 갈라진 틈으로 그들이 등반하고 있던 거대한 두 번째 쿨와르의 상단에 위치한 능선상의 두 번째 콜(col)이 확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두 번째 쿨와르의 등반 난이도가 4급 이상이라고 판단했지만, 무난히 돌파할 자신감이 충만했다.
캐신 대장은 베이스 캠프에서 이탈리아 산악회에 보고할 서류를 작성하고, 그때까지 촬영된 비디오 테이프를 검토했다. 추키 대원은 결막염에 걸렸고, 페레고 대원은 손의 상처가 감염되어 루트 개척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카날리와 알리피 두 대원이 다시 루트 개척에 나섰다. 캐신 대장이 미국 산악인 굿윈에게 루트 개척에 함께 참여하도록 권고하자,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기꺼이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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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강풍과 영하 35도의 강추위가 몸 속으로 파고들어
7월 9일 밤에 강풍이 베이스 캠프를 강타, 그들은 텐트가 파괴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 태양이 솟아올랐지만, 계곡 아래쪽에는 여전히 악천후를 예고하는 검은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아침 7시에 전날 루트를 개척했던 3명의 대원은 질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루트 개척에 나섰다. 캐신 대장은 베이스캠프에서 보고서 작성을 완료했는데, 그때 강풍이 윙윙거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사나워지다가 오후 5시에는 위력적인 강풍이 그들의 튼튼한 파미르 텐트를 쓰러뜨릴 기세였다. 텐트 자락은 광란의 펄럭거림으로 고막을 파열시킬 듯한 소음을 계속 냈다. 마치 계속 퍼부어 대는 기관총 소사를 방불케 했다.
캐신 대장이 식량을 저장해 둔 텐트를 살피러 밖으로 나갔다가 강력한 질풍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하마터면 눈밭에 그냥 쓰러질 뻔했다. 강풍이 서서히 기세를 누그러뜨리자 이번에는 폭설이 기승을 부리며 쏟아져 내렸다. 캐신 대장은 악천후 속에서 루트를 개척 중인 대원들의 안전에 관해 노심초사했다. 잔뜩 긴장한 채 그들이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밤 9시 반에 전신에 얼음 갑옷을 뒤집어쓰고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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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신 리지의 제1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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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아침 아이롤디 대원이 앞장서고 추키 대원은 제1 캠프에 설치할 파미르 텐트를 짊어지고 뒤따랐다. 캐신 대장은 맨 뒤에서 그들의 등반활동을 촬영하며 등반했다. 그들이 능선 상의 거대한 암탑 아래의 두 번째 콜, 즉 제1캠프 예정지에 도착한 후 캐신 대장은 제1캠프를 가능한 한 더 위쪽에 설치할 의향으로, 대원들에게 루트 정찰을 지시했다. 아이롤디 대원이 가파른 설벽으로 등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추키 대원이 캐신 대장의 지시를 따라 우측으로 등반하여, 캐신 대장이 사전에 발견했던 세 번째 쿨와르 쪽을 향해 두꺼운 빙벽을 힘겹게 트래버스하고 쿨와르 밑에 도달했다.
추키 대원은 캐신 대장의 확보를 받으며, 빙벽에 신설이 덮여 등반이 까다로운 쿨와르에 여러 개의 피톤을 설치하며 40m를 오르고 나서, 그곳은 눈과 얼음의 가파른 절벽뿐이어서 텐트를 설치할 마땅한 장소를 발견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캐신 대장이 그곳에 올라갔고 추키 대원은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고 능선 마루를 향해 등반을 계속했다. 캐신 대장이 뒤따라 그 구간을 오를 때, 당장에라도 판상 눈사태가 발생해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 내릴 듯하여 공포심에 떨었다.
그들이 능선마루에 도달했을 때 짙은 안개로 인해 가시거리가 짧아 위쪽 빙하를 정찰할 수 없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고, 아이롤디 대원이 아래쪽 쿨와르 속에서 혹한에 시달리며 하산을 애원하여 그들은 제1캠프 예정지에 짐을 데포시켜 놓고, 고정자일을 이용하며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게 지루하게 이어졌고, 겨우 자정 무렵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캐신 대장은 루트 개척에 나서는 페레고, 카날리, 알리피에게 능선상의 콜 4,084m 지점의 작은 눈 선반에 제1캠프을 설치하고 비박한 후 능선 마루에 올라 현수 빙하로 이어지는 최상의 루트를 정찰하도록 지시했다.
7월 13일 페레고, 카날리, 알리피는 제1캠프를 출발하여 설릉으로 등반을 계속했고 추키, 아이롤디, 캐신 대장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했다. 그날 카날리, 알리피, 페레고는 사우스 버트레스의 날카로운 설릉 상에 1km 길이의 루트를 개척했는데, 설릉은 두꺼운 빙벽에 가루눈이 덮여 있어 등반이 무척 힘들었다. 그들은 사우스 버트레스 중간 지점에서 시작되는 현수 빙하의 베르그슈룬트 벽 밑 4,328m 지점에 도달하여 제2캠프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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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신 리지 하단 암빙설 혼합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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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캠프로 내려온 알리피와 카날리는 다음날 제2캠프로 짐을 운반한 후 현수 빙하 위쪽의 벽 등반에 나설 계획이었고, 탈진한 페레고 대원은 휴식차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다음날 추키와 페레고는 등반 장비를 짊어지고 제1캠프로 올라갔다. 미국 산악인 굿윈은 휴가 기간이 만료되어 아쉽게도 등반대를 떠나야 했다. 날씨가 청명하여 캐신 대장은 베이스캠프에서 쌍망원경으로 남벽의 가파른 빙벽, 거대한 오버행 벽들, 크레바스들, 돌기한 디에드르들을 샅샅이 정찰할 수 있었다. 카날리와 알리피 대원이 현수빙하의 베르그슈룬트를 건너 우측 스퍼 중앙쪽으로 등반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다음날 추키 대원과 페레고는 제1캠프를 출발해 기나긴 설릉 마루를 오르고 현수빙하에 도달하여, 전날 카날리와 알리피가 돌파했던 침니를 올랐다. 두 사람은 이어서 사우스 버트레스의 최난 구간인 난이도 5급의 얼음 디에드레를 돌파하고 나서, 5,182m 지점에서 제3캠프 후보지를 발견한 후 제2캠프로 하산했다. 아이롤디 대원과 캐신은 파미르 텐트 1동, 식량, 등반장비를 짊어지고 제1캠프에 도달했다.
7월 16일 아침 캐신과 아이롤디는 제2캠프로 올라가는 도중, 하산하는 추키와 페레고를 만나 그들에게 제1캠프 아래쪽 루트에 데포시켜 둔 모든 장비와 식량을 제1캠프까지 운반하도록 지시했다. 캐신과 아이롤디는 제2캠프까지 파미르 텐트를 운반한 후 그곳에서 제3캠프 예정지까지 네팔 텐트 2동을 운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제2캠프에 도달했을 때 내리기 시작한 눈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일기불순으로 인해 모든 등반계획을 연기했다.
다음날도 눈이 내려 6명의 전 대원이 등반을 중단하고 제1캠프에 집결했다. 이튿날 늦은 오후 눈이 그치자, 전 대원들이 제2캠프로 올라갔고, 다음날 아침 그들이 3명씩 두 자일 파티를 나뉘어 능선 상의 현수 빙하를 중간쯤 올랐을 때 셀던이 조종하는 경비행기 소음이 들려왔다. 그는 미국 산악인 굿윈을 싣고 가면서, 곡예비행을 하여 이탈리아 대원들에게 행운을 전했다.
이탈리아 대원들은 5,182m 지점에 도착하여 작은 테라스의 얼음을 깎아내고 2인용 네팔 텐트 2동으로 제3캠프를 설치하고, 비좁은 텐트에 3명씩 들어가 잠을 잤다. 이제 그들은 사우스 버트레스의 가장 위험한 난코스 구간을 전부 돌파한 셈이었다. 등반대원 전원은 등정이냐 퇴각이냐 양자택일할 의도였기 때문에 등정할 때까지 베이스캠프로 내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맹위를 떨치는 혹한 속에서도 너무 피곤한 나머지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밤새 내리던 눈은 아침에 그쳤다.
7월 19일 추키, 페레고, 아이롤디가 한 팀, 알리피, 카날리, 캐신 대장이 또 한 팀의 자일파티가 되어 등반을 시작했다. 카날리와 캐신을 제외하고 4명의 대원들은 유럽 밖의 등반이 최초였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역력했지만, 정상을 향한 열정은 뜨거웠다. 그들은 사우스 버트레스의 마지막 돌출 바위 스퍼(spur)를 곧장 오르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루트에 관해 상의했다. 캐신은 좌측 가파른 눈과 얼음의 쿨와르 쪽으로 오를 것을 제안했다. 이 쿨와르는 정상 바위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은 악천후 속에서 최종 난코스를 돌파했다.
눈이 그치자 북동쪽에서 무시무시한 강풍이 몰아쳐 그들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고, 그들은 사나운 강풍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이상적인 루트인 능선 마루 상으로 등반하지 못하고 능선 측벽을 이용했으나 등반이 더 느리고 어려웠다. 그들은 영하 35도의 혹한 속에서 추위로 전신이 마비될 것 같았다. 캐신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촬영을 접어야 했다.
그들은 마지막 구간이 시작되는 바위 밑에 도달했다. 고소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바위처럼 단단한 얼음과, 밟자마자 얼음 껍질 속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가루눈의 적설 지대가 교대로 나타나서 등반이 무척 힘들었다. 그들은 오직 생존본능으로 이 모든 고초를 견디었다. 그들이 정상 바위를 오르는 데도 고난도의 등반이 이어졌다.
그때 갑자기 예기치 못하게 정찰기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찰기는 그들의 머리 위로 세 번 회전 비행하면서 몹시 지친 그들에게 위로를 보냈다. 그들이 착용한 딱딱하게 얼어버린 등산화는 그들의 발에 들러붙어 하나로 응고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날리는 자신의 발이 얼어서 무감각해졌다며, 걷기조차 힘들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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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시간 동안의 폭설 이겨내고 전원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귀환
그들은 7월 19일 등반을 시작한 지 17시간 만인, 극지방의 밝은 백야(白夜) 11시에 매킨리 정상을 밟았다. 대원들은 강풍 때문에 정상에서는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여 침묵 속에서 눈빛으로 등정을 축하한 후, 잠시 서로 포옹했다. 캐신은 그런 혹한 속에서 장갑을 끼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은 손가락 동상을 자초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위업을 기록하기 위해 알리피 대원의 카메라로 사진 촬영을 하려 했다.
그들은 얼어서 마비된 손으로 배낭에서 미국 국기, 알래스카 깃발, 자신들의 고향 레코의 깃발, 그리고 이탈리아 알파인 클럽 깃발을 꺼내어 아이스 피켈에 매달고 등정사진을 촬영했다. 그 순간 대원들의 얼굴에는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온 승리의 미소가 밝게 빛났다. 나중에 선명하지 않기는 해도 한 장의 사진이 그들의 등정을 입증해 주었다. 그들은 매킨리 정상에 자신들의 고향, 레코의 수호신, 성 니콜라스의 조각상과 십자가를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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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신 리지 도입부를 이루는 재패니스 쿨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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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신은 자신의 저서<50years fo Alpinism>에 기록했다.
“우리들은 모두가 매킨리의 정상에서 안전하게 하산할 때까지는 난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에서 등정의 희열을 만끽할 만큼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이탈리아 산악인들의 하산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등반 중에 한 차례 과일 통조림과 시럽을 먹은 것 외에는 아무런 식사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정상바위 밑에 내려왔을 때, 카날리는 고산병으로 인해 헛구역질만 계속했다.
그들이 매우 가파른 쿨와르를 하산하려고 할 때, 캐신은 직감적으로 무엇이 스치는 듯한 불길한 소리를 듣고 얼른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 순간 자신과 자일을 묶은 카날리가 빙사면으로 막 굴러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했다. 노련한 클라이머 캐신은 본능적으로 번개처럼 설사면에 엎드리는 동시에 아이스 액스를 눈 속에 깊이 박아 동료의 추락을 저지해 불행을 막았다.
다행히 카날리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지만, 헛구역질은 계속했다. 캐신은 맨 뒤쪽에서 하산하면서 카날리의 추락에 대비하여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카날리는 제3캠프까지 하산하는 동안 고산병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어 여러 차례 추락을 반복했다. 그 때마다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던 캐신이 재빨리 동료의 긴 추락을 막아서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그들은 트래버스 구간에 도착하여, 짐 무게를 덜기 위해 필요 없게 된 피톤과 카라비너를 버렸다. 혹독한 기상상태도 하산의 난관을 부채질했다.
강풍은 잦아들었으나 폭설이 내리고 있어서 그들은 추락을 염려했다. 그들이 탈진상태에서 어느 한 사람의 추락은 3명의 자일 파티 전원의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서 느리게 하산을 진행했고, 그 결과 얼음 침니 위쪽까지 하산하고 나니 많은 체력이 소모되었다. 추키 대원의 보살핌을 받으며 환자 카날리가 먼저 침니로 자일 하강했고, 확보해 주던 나머지 대원들이 뒤따라 내려왔는데, 언 손으로 자일을 회수하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경비행기 조종사 셀던과 워시번 박사가 사전에 이탈리아 산악인들에게 마운트 매킨리 정상의 혹한에 잘 대비하라고 조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리피 대원을 제외하고 모두 현지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내피가 없는 등산화를 착용했다. 이탈리아 산악인들은 알프스 절벽 등반의 달인들이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아니면 언어장벽 때문에 매킨리의 실정에 대한 정보제공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하여간 매킨리 등반에는 남극대륙이나 에베레스트의 등반장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어설프게 알프스 등반장비로 도전하다가 결국 발에 동상이 걸려 큰 낭패를 당했다. 알리피 대원만 사슴가죽으로 만든 내피가 있는 등산화를 착용하여 발에 동상이 걸리지 않았다.
6명의 클라이머들은 23시간 동안 거의 휴식을 취하지 못했고 또한 음식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채 7월 20일 오전 6시경 말그대로 녹초가 되어 제3캠프까지 하산했다. 그들은 즉시 눈을 녹여 음료수와 뜨거운 식사를 준비했다. 팀닥터의 역할을 겸한 캐신 대장은 카날리 대원의 양쪽 발이 심한 동상에 걸려 이미 부어오른 상태로 푸르딩딩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연고(Foille cream)를 바르고 마사지해 주었다.
대원들은 카날리 대원의 저하된 사기를 진작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눈은 계속 퍼붓고 있었고, 캐신은 동상에 걸려 잘 걷지 못하는 카날리 대원을 데리고 어떻게 난코스 절벽을 무사히 하산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들은 2인용 텐트 두 동 속에 각각 3명씩 들어갔기 때문에 잠자리가 협소하여 밤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캐신 대장은 카날리 대원의 상태가 악화될까 염려하여 잠을 설쳤다. 그는 동료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밤새 그의 언 발가락들을 계속 움직여 혈액 순환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양쪽 엄지발가락에 약한 동상을 입었다. 이탈리아 클라이머들은 강풍과 폭설 때문에 제3캠프에서 24시간 이상 동안 혹한에 시달리며 꼼짝도 못하고 발이 묶여 있었다.
그들은 7월 21일 오전 11시 캐신, 카날리, 추키가 한 조가 되고, 아이롤디, 알리피, 페레고가 다른 조가 되어 하산을 준비했다. 그런데 카날리 대원의 양쪽 발이 심하게 부어올라 등산화를 착용할 수 없었다. 알리피 대원이 희생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자신의 사슴가죽 등산화 외피를 카날리 대원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네 켤레 양말과 등산화 내피만 착용했다. 그래서 알리피 대원은 크램폰을 착용할 수 없어서 미끄러운 절벽을 하산하느라고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는 동료를 위해 자신의 발가락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기 때문에 그의 위대한 희생정신은 찬양받아 마땅했다.
그들이 제2 캠프 위쪽의 현수빙하를 하강 중에 크램폰을 착용하지 못한 알리피 대원의 발이 미끄러지며, 그는 빙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페레고 대원이 제동을 걸었지만 실패하며 두 사람이 함께 추락했고, 종국에 가서는 다른 자일 파티의 노련한 클라이머 캐신이 그들의 자일을 재빨리 움켜잡아 기적적으로 두 사람의 추락을 저지했다.
그들이 파김치가 되어 제2캠프에 도달했을 때 아이롤디, 일리피, 페레고 팀은 탈진상태에서 회복하기 위해 그곳에서 비박하려 했다. 그러나 캐신은 장시간의 휴식기간 중에 카날리 대원의 건강상태가 더욱 악화되자 그가 걷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카날리, 추키를 데리고 하산을 계속했다. 짙은 안개와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은 제1 캠프까지 무사히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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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시번 박사 부부의 북봉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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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오전 11시 그들은 베이스캠프를 향해 하산을 재개했다. 캐신이 ‘이탈리아 원정대의 구세주’라고 명명했던 두 번째 쿨와르 속의 고정로프는 눈투성이, 얼음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고정자일 구간에서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작은 눈사태의 폭탄세례를 받았다. 세 사람은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두 번째 쿨와르로 빙하까지 계속 하산하지 못하고, 첫 번째 쿨와르의 고정자일을 이용하며 하산했다.
캐신이 바위 슬랩을 하산 중에 한쪽 크램폰이 갑자기 벗겨지며 적설 속으로 굴러 떨어져 분실했다. 첫 번째 쿨와르 밑 빙벽에서 캐신은 거대한 눈사태에 파묻혔지만, 고정자일을 꽉 잡고 긴 시간 동안 버티어냈기 때문에 무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캐신은 나머지 크램폰 마저 분실하여 하산이 매우 힘들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속담을 상기시키는 실수였다.
세 사람은 쿨와르 밑의 심설 속을 헤엄치듯 빠져 나와 악천후 속에서 베이스캠프까지 기적적인 하산을 완료했다. 그들은 우선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여 미친 듯이 굶주린 배를 채웠다. 캐신은 카날리의 동상에 걸린 양쪽 발을 계속 마사지해 주었다. 밤새 카날리 대원의 신음 소리에 두 사람은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7월 23일, 75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내리던 폭설이 그쳤다. 태양이 매킨리의 남벽을 비추자, 수십 차례의 거대한 눈사태가 얼음 덩어리, 바위 덩어리와 함께 굉음을 내며 계속 쏟아져 내렸다. 베이스캠프에서 캐신 대장은 아직도 하산 중인 동료들의 안전이 염려되었다. 그 날 밤늦게 아이롤디, 알리피, 페레고가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동료들이 모두 베이스캠프에 모이게 되자, 그들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매킨리 남벽 버트레스 등정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워시번, “북아메리카 등반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찬사
7월 24일 등반대원들은 텐트자락을 이용해 들것을 만들고 카날리 대원을 카힐트나빙하 남동 지류 상의 설상 비행장으로 옮겼다. 경비행기 조종사 셀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앵커리지의 병원에서 캐신 대장, 페레고, 아이롤디는 단기간 동상치료를 받았고, 카날리 대원은 장기간 입원해 재활치료를 받은 후 자신의 가이드 직업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훗날 카날리는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다가 사망했다. 미국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는 “가장 위험한 조건 하에서 뛰어난 업적을 성취”한 것을 찬양하며 축전을 보냈다. 이탈리아 대통령 지오반니도 축전을 보냈다. 그러나 가장 큰 축하는 워시번 박사가 “캐신 일행은 그 때까지 북아메리카 등반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고 찬사를 보낸 일이었다. 그 후 매킨리의 사우스 버트레스는 ‘캐신 리지’로 명명되어 매킨리의 고전 루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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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피 대원-등산화를 부상 동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크램폰도 없이 하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