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찬가 누가복음 1:50-53절
사람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고 풍랑이 일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폭풍우에 휩쓸려 다 죽게 되자 한 사람이 제안을 합니다. 우리 가 우리 죄 때문에 죽으면 다 지옥에 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마침 배안에 신부님이 계시는데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하자 신부님께 죄를 다 고해하고 나면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으니 어서 고해성사를 합시다. 가만히 듣고 있다보니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급박한 상황속에서 돌아가면서 한사람씩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다 고해성사를 하자 고해성사를 제안했던 사람이 자 이제 이 신부님을 인신공양합시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대신 짊어지셨으니 그 모든 죄와 함께 바다에 드려지면 신도 그 노여움을 풀고 우리를 살려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힘을 모아서 그 배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다 짊어지신 그 신부님을 바다에 인신공양했더라는 이야깁니다. 매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같지만 이게 오늘날의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강절기를 보내고 있는데 우리 예수님이 자기 죄에 대한 면죄부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잖아요. 사람이 살다보면 잘못할 수도 있고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런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돌이키고 그래서 더 성숙하고 더 넓은 품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신앙생활하는 거지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무책임하게 타자에게 전가하고 자기는 아무런 바뀔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그 종교가 주는 안락과 편안함에 안주하기 위해 신앙생활하는게 아니잖아요. 위의 이야기는 이런 어쩌면 무책임하고 말도 안되는 비상식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풍자한 이야기일찌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나로하여금 자신이 저지른 죄와 실수에 대해 회피하거나 도망치도록 유도하는 그런 무책임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복음성가를 듣다가 정말 어렸을 때 많이도 불렀던 복음성가를 듣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던 복음성가인데 이제는 막 걸려요. 목의 가시처럼 막 걸려요.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병든 몸이 상한 몸이 위로받기 원합니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 저는 기독교 풍토에서 자라면서 내가 크리스챤으로써의 자긍심보다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개념보다는 온갖 죄로 물들여진, 그래서 벌레만도 못한(벌레는 의문의 1패) 존재라는 가학적 세계관에 가스라이팅 당해왔습니다. 교회를 나오면 젤 많이 들었던 말이 죄인이라는 말이예요. 교회에서 하는 기능이 구원의 기능이 있다보니 구원하려면 죄인이 되어야하잖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는 죄인을 만드는 공장이더라구요. 안 아픈 사람도 병원에 가면 다 환자처럼 보이는 것처럼 죄를 짓지 않아도 교회 다니면 다 죄인이 되고 교회는 그렇게 인간의 존재를 가스라이팅 시켜왔습니다. 물론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 자기 연약함과 한계를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창세기 2장 이후에 보면 인간 존재의 현실이 어떤지 인간은 어떤 한계를 지녔는지 자세히 나옵니다. 그런데 성서는 창세기 2장전에 창세기 1장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조된 생명의 아름다움과 존엄과 그 고귀함, 인간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원복적 존재의 현실을 적지 않은 세월 놓치고 살았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존재의 한계와 죄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죄성을 가진 인간조차도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 존엄함을 먼저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교육부에서 아동부 교사회의를 하는데 김효정 집사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성탄절에 뭘할까 이런 저런 자료를 찾으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자료는 많은데 대부분의 자료들이 하나님 우쭈쭈하는 것 밖에는 없는 거예요. 성탄절, 예수님이 태어나셨는데 그분이 왜 우리에게 소중한지 그분의 탄생을 왜 기뻐해야하는지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엑키스에 대한 내용은 없고 전부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우쭈쭈하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김효정 집사님도 어느새 우리교인이 다되셨다라구요. 이상하게 그게 불편하더라는 거예요. 옛날에는 교회에서 그렇게 행사를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면서 찬양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고 그런 식의 행사에 아무런 생각없이 참여했는데 예수님 축하하는 날에 그분과 관련된 삶의 내용이 없어서 있는 걸 찾으려니 고생이더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안에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우쭈쭈하는 내용은 많은데 실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해야하는지 예수가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현실을 쳐다보고 있는데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고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의 신앙은 아니라는 겁니다. 대속신앙으로 죄에 대해 회피하게 하고 구원신앙으로 인간을 죄인으로 가스라이팅하고 경배신앙으로 인간의 삶의 현실에 대해 탈현실화하게 하고 이런게 기독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을 잉태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는 기독교신앙의 엑키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잉태한 어머니 마리아는 배속의 아이를 보면서 세상을 뒤집어 엎는 전복적인 세상을 노래합니다. 세상에 교만한 사람들, 함부로 힘을 남용하는 사람들 다 끌어내리고, 비천하고 주리고 내 몰린 사람들 다시 돌아와 모두가 환대되는 대동세상을 노래합니다. 이게 어디 사회, 물리적 세상에서만 그렇겠습니까? 내 내면의 세상안에서도 정말로 뒤집어 엎어야할 전복적인 세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머리로는 그 사람이 왜그런지 다 아는데 화가 나고 미운거예요. 내 안에서 용서가 안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내 앞에 있는 소중한 그 사람을 놓치고 있는 거죠. 교만하고 함부로 힘을 남용하는 권력의 세상이 저기 정치하는 사람들안에도 있지만 내 내면에 세계에도 가득한 거죠.
마리아는 그런 폭력성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외부로부터 누군가가 해결해줄 것 만 같은 메시야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내 죄, 우리의 죄에 대해 오늘 여기서 내 삶을 전복시키는 삶을 노래합니다. 외부 개입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변화하고 성찰하고 더 사랑해 나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도 개인도 내면도 전복시키는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잘났다고 하는 것들 눈에 보이고 화려하게 그 성과들을 자랑하는 것들 이면에 그 모든 것들을 떠받치고 견인해가고 드러내주고 밝혀주는 수없이 많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가난하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 생명이 있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존엄성, 그 소중한 것들이 당당하게 존중받고 가치있게 여겨지는 세상을 노래합니다.
이런 거죠. 지난주에 벽제 승화원에 다녀왔는데 매주 수요일에 봉사를 오시는 불자 어르신이 한분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승화원에만 매주 수요일에 오시는 게 아니라 봉사란 봉사를 안다니시는 데가 없으시더라구요. 이분이 영등포에 사시는데 어떤 날은 승화원에 오셔서 장례자원봉사자로 활동하시고 어떤 날은 영등포에 있는 청소년 쉼터에서 아이들 안전과 관련 자원봉사를 나가시고 어떤 날은 병원의 어르신 보조로 자원봉사를 나가시고 다 무료구요. 무척이나 바쁘시더라구요.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예요. 매일 새벽에 예불을 드리신데요. 그리고 예불이 끝나면 불당 청소를 혼자서 다 하신데요. 그리고 하루를 자원봉사로 시작해서 자원봉사로 끝내신데요.
처음 자원봉사를 시작한 게 22년 전이래요. 불당에서 만난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하루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 봉사하러간다고 하니까 호기심에 나 따라가도 돼? 그 한마디에 처음 간 곳이 영등포 노숙인의 집이었답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 22년 동안 자원봉사를 하시면서 살아오신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말이 자원봉사가 만병통치약이래요. 청소하니까 몸 건강해지지 돈 받고 하는 게 아니니 사람들이 당연한 듯 말하지 않고 고마워하죠. 누군가에 자신의 몸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니까 삶의 동력도 되고 그래서 지금까지 별 병원도 안다니고 건강하게 잘 지낸데요.
그래서 제가 우리교회 “내가 만난 예수 시리즈”오셔서 한번 삶의 예기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자를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신 이야기 아름답지 않아요. 그랬더니 교회에서 그래도 되요?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 않나요? 저희는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예요. 그랬죠.
세상에 잘났다고 하는 화려한 인생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누구처럼 자신의 삶에 책임져야할 것들을 외주하지도 않아요. 매일 같이 예불을 드리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좀 더 성숙한 자기 변화를 꿈꾸면서 매 일상에서 비천해 보이는 사람들 주리고 힘든 사람들 곁에서 작고 초라한 아픔들을 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아끼는 초콜릿을 먹듯이 조금씩 조금씩 충실하면서도 온전히 살아내는 그 불자의 삶이 온몸으로 부르는 마리아의 찬가요. 예수님의 삶이더라는 겁니다.
거대한 제국의 질서만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게는 내 안의 질서를 전복시켜가면서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고 성스러운 변화를 꿈꾸며 하나님이 만드신 온갖 생명들 그것이 비록 작고 초라하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고이 맘 담아 품으며 온 세상을 사랑의 온기로 품어가는 지금 여기에서의 온전한 삶, 그래서 춥고 배고픈 이들 조차도 따뜻한 겨울이 될 수 있도록, 갇히고 포로된 이들이 열리고 자유할 수 있도록, 내몰리고 배제된 이들이 다시 공동체 안으로 회복되고 다시 환대될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일상 이것이 곧 대강절의 예수님, 그리고 온몸으로 절규하며 그런 세상을 노래했던 마리아의 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도 이런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