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성령, 인도하시고 알리신다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16장)
말은 불완전하다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위대한 의사소통 도구가 언어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많은 난점과 장애를 지닌 수단이기도 합니다.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지만, 온갖 불통과 오해 그리고 상처와 거짓이 말에서 빚어집니다. 고도의 논리와 추상적 사고가 언어 체계를 통해 전개될 수 있지만, 결국 말할수록 모순에 빠지고, 해명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통감하면서, 언어의 한계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세 친구가 눈 덮인 히말라야 정상을 보고 와서 소감을 말한다고 합시다. 한 친구는 사진을 보여주듯 전체를 장황하게 묘사하고, 다른 친구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을 집중하여 강조하고, 마지막 친구는 ‘너무 장엄하고 신비로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며 설명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탁월한 언어 구사력을 갖춘 사람일수록 더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라도 완벽하게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표현할 수 없다’라는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전달할 수 없는 경험과 감동을 불완전하게나마 전달하고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필요하고 의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 : 주님을 증언하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얼마나 말할 수 있을까요? 끝없는 밀림을 더듬는 소경의 지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수록 혼돈에 빠지고, 하나님에 대해 말할수록 오류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가늠할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인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모든 시도는, 어쩌면, 도무지 그분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세계를 경험하고 언어로 자신의 발견과 인식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인간 됨의 속성입니다. 이에 더하여, 성서는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밝히고 증언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자체로 신비이신 하나님을 부단히 알리고 말해야 하는 소명으로 우리는 부름받았습니다. 나무 한 그루에 대한 경험조차도 완전히 진술하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어떠한 해석, 논리, 주장, 명제로도 하나님을 적절히 서술할 수는 없습니다. 한데, 이를 인정하면서도 증언해야 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서의 가르침, 교회의 가르침
하나님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가르침은 성서의 말씀입니다. 성서 역시 언어로 기록되고 번역되는 까닭에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성서의 기록자들이 다수이고, 수천 년 동안 기록되었으며, 각각 다른 시공간적 배경과 이해와 경험을 통한 하나님 경험이기에, 때로 모순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성서가 하나님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성서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최고의 권위를 지닌 경전입니다.
생각해 보면, 성서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처럼 인간이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어떻게 관여하시고 섭리하시는지, 기후 위기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성서는 답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이천 년이고 보면, 신약성서의 가르침은 백여 년의 시간 속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성서 시대 이후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 언급되지 않은 하나님 경험을 새로이 합니다. 이렇듯 성서가 규명해 주지 않은 신앙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해명되어야 하는데, 교회는 교리라는 이름으로 중요한 가르침과 신조를 결정해 왔습니다.
삼위일체 교리
성서에 나타나 있지 않으면서도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신앙고백이자 교리가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삼위일체’가 그것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온 교회는 이 교리를 기념하는 주일을 정하여 지키면서 유례없는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이 교리가 이토록 지지를 받는 이유는, 흠잡을 데 없는 신학적, 이론적 완벽함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쩌면 본질적인 모순 위에 세워진 교리라고 단정해도 좋을 만큼, 삼위일체는 합리적 입증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삼위일체야말로 ‘하나님은 신비이시다’는 진리를 가장 크게 웅변하는 신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상아탑 속에 사는 신학자들의 창작물이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삼위일체는 연구실과 토론장에서 만들어진 비현실적인 신조가 아닙니다.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인식과 경험으로부터 삼위일체의 단초가 발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 속에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생명을 구원하시는 아들 예수, 하나님의 영으로 생명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각각 다른 셋으로 인식하면서도 하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경험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대해, 오랜 시간 신학자들이 언어로 설명하고 논리와 이론으로 다듬은 결과물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어설프게나마 하나님의 신비를 포착하고, 오묘한 구원의 섭리를 거칠게나마 이해하는 길입니다. 세 위격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모든 차원을 포괄하며, 하나는 궁극적인 근원이요 통합이신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 (12절)
예수의 고별사(13:31-17:26)에 있는 성령에 관한 다섯 담론 중 마지막 마당인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하시고자 할 말이 많지만 다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감당한다(basta,zw)”는 동사는 ‘들어올리다, 운반하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지다’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19:17). 지금은 말해도 제자들이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금 말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께서 다 가르쳐주신 것도 아닙니다. 어려운 물리학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듯,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에 관하여는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셨습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말하지 않거나 모르게 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말하지 않겠다는 얘기는 나중에 알 때가 오리라는 뜻입니다. 앞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중에도,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요(13: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13절)
예수께서는 곧 체포되고 죽으실 것입니다(18장). 미처 다 가르치지 않으신 진리를 나중에 예수의 입에서 듣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예수께서 다 하지 않으신 이 일을 성령이 오셔서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가르치실 성령이기에 “진리의 성령”이라고 불립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는 말씀은 고별사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길이신데, 그 길은 진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생명을 줍니다. 길과 목적지는 분리되지 않기에, 진리에 이르는 길인 예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성령이 이어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14:16-17). 진리의 영이라 불리는 성령은 예수의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너희를 진리에로 인도하실 것이다 (13절)
“인도(引導)”라는 말에 “길(道)”이 들어가 있지요. 인도하다는 헬라어 동사인 “호데게오(hodegeo)”는 “길(hodos)”이라는 명사와 “이끌다(ago)”라는 동사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인도하는 존재를 “인도자” 혹은 “안내자”라고 부릅니다. 길이 곧 인도자라는 의미로, 예수께서는 “내가 길이다 … 나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온다”(요14:6)고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 14)는 말씀에서도, 예수는 양들을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가신 이후에, 성령이 인도자이십니다. 부활과 승천 이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전제 아래, 교회의 가르침인 교리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목적지가 없다면 길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목적지가 정해져야 길을 나서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에 닿는 길을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지금 성령께서는 그 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생명의 진리에 닿으려는 이들이 이 길을 갑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이며 전혀 낯선 여행입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인도자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진리의 영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13절). 인도자는 인도받는 자들과 일체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와 하나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3, 14, 15절)
세 번 반복되는 동사 “알리다(anaggelo)”는 “선포하다(declare)”는 말입니다. 전달한다는 뜻의 ‘알리다’로 번역한 이유는, ‘들은 것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그(성령)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들은 것을 말한다”고 정확히 규명되어 있습니다(13절). 성령은 예수에게서 받은 것을 알리며(14절), 예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므로(15절), 성령의 알림은 곧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성령강림절 뒤를 이어 삼위일체주일을 지정한 교회력의 배치는 의미심장합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예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고, 성서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는 천 년이 넘는 진통 끝에 이 신조를 확정했습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알려주신다’는 약속이 없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허황한 교설에 지나지 않겠지요. 또한 오늘의 교회는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시대와 문제를 직면하면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알려주신다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모든 진리는 단번에 알려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음은 필연적입니다. 망망한 바다가 한눈에 조망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아는 진리는 불완전하고 진리의 길은 낯설지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안내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자를 따른다면 모르는 길이나 어두운 밤길도 갈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신비이신 하나님께 다다르게 됩니다. 그 길은 진리를 알게 되는 길이면서, 생명으로 충만한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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