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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징(天澄), 천일(天溢) 조부의 입곤양 내력 추측
천징(天澄), 천일(天溢)조부의 입곤양 내력을 분석해 보면 명쾌하지 못한 점이 있다. 족보를 보면 강호선조의 5세손이 성편(聲遍 號 愛日堂)이고, 성편(聲遍)의 5세손이 천징(天澄 號 遯窩)과 천일 (天溢 號 遯齊)이다. 천징(天澄 號 遯窩)과 천일(天溢 號 遯齊) 형제분이 집성촌인 거창을 떠나 세동(가는골)으로 세거지를 옮긴 것이다.
세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글쓴이를 기준으로 13대 조부모인 성편(聲遍), 12대 조부모인 구령(耈齡), 11대 조부모인 재륜(再綸)의 3대 조부모의 묘(墓)를 실묘(失墓)한 것이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로는 천징(天澄)과 천일(天溢) 조부(祖父)께서 이곳으로 급박하게 이사를 오면서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 묘(墓)만 진주 북방 토동 안산으로 모셔 와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1980년대 들어서 실전(失傳)한 3대의 조부모(祖父母) 묘(墓)는 설단(設壇)을 하였다.
천징(天澄)과 천일(天溢) 조부(祖父)는 왜 이곳으로 세거지를 옮겼으며 거창과 교류가 원활하지 못해 실묘(失墓)까지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사료(史料)를 고찰해 보면 고난을 겪은 가족사나 역사에서 명쾌하게 밝혀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는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글쓴이는 천징조부(天澄祖父)와 천일조부(天溢祖父)의 호(號)와 덕천재(德川齊)에 기록된 세거사유인 '개기유위어세이사욕잠광회적(蓋其有違於世而思欲潛光晦迹也)'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고자 한다.
천징조부(天澄祖父)의 호(號)는 돈와(遯窩)이다. 돈(遯)자는 사전에는 ‘둔’자로 적혀 있으나 고유명사일 경우 ‘돈’자로 읽는다. 돈(遯)자는 “숨다, 달아나다, 도망치다.” 는 뜻이고, 와(窩)자는 “움집, 굴, 우묵하다” 는 뜻이다. ‘은거하여 숨어 지내다’는 의미이다. 천일조부(天溢 祖父)의 호는 돈제(遯齊)이다. 제(齊)자는 “가지런하다, 재빠르다, 민첩하다.”는 뜻이다. ‘민첩하게 숨다’는 의미이다. 호가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숙명적으로 세상을 등지고 음지에서 살아가야 할 피할 수 없는 부득이 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 덕천재(德天齋) 현판에 '개기유위어세이사욕잠광회적(蓋其有違於世而思欲潛光晦迹也)'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대개 세상을 어김이 있어 세월을 숨겨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추고자 했다’는 뜻이다.
또, 산호정 중수 상량문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中年興廢之不常(중년흥폐지불상) 大約氣數之所關(대약기수지소관)
豈稀本裔之所羞 (기희본예지소수) 實是士友之臺鬱(실시사우지대울)
중년의 흥폐는 일정하지 않아서, 대체로 운수에 달려 있어 어쩔 수 없다네.
어찌 본 손들이 부끄러워하는 바가 적었겠는가? 진실로 모든 사우들의 마음에 맺힌 바이네.
천징(天澄)(號 遯窩)조부는 1690년에 태어나서 1770년에 돌아가셨는데 80살 까지 사셨고, 천일(天溢)(號 遯齊) 조부는 1693년에 태어나서 1753년에 돌아가셨는데 60살까지 사셨다. 거창 안음(안의의 옛이름)에서 급박하게 이곳 세동으로 옮겨와 몸을 숨기면서 살아야만 했던 사실에 대해 알아보고자 그 시대에 안의, 거창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 연계해 추측해 보면 이러하다.
영남지방의 선비는 파당적인 입장에서 보면 남인이다. 점필자 조부께서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중앙의 당상관 벼슬을 그만두고 스스로 한직인 수령을 자청하여 낙향한 후 여러 제자를 길렀는데 그때 배출된 인재 중에는 나라의 동량재가 많다. 이들을 흔히 사림파라 불렀는데 그 사림파가 남인이다.
조선시대는 붕당정치를 했는데 당파 싸움이 심했다. 임금이 보위에 오르면 임금을 보위하는 신하들이 서로 붕당을 만들어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끌어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다른 당은 배척하였다.
집권 세력에서 밀려난 당파는 하는 수 없이 세자에게 연줄을 대어 그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집권하리라는 기대를 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사례를 보면 조선 18대 현종(1659년) 때 기해예송으로 서인이 주도권을 잡는가 하면 현종 말년에는 갑인 예송으로 남인이 주도권 잡기도 한다. 19대 숙종(1674-1720) 재위 기간 동안 붕당정치가 제일 심했다.
허건의 역모 사건으로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등용한 경신환국, 장희빈의 아들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을 쫓아내고 남인을 등용한 기사환국, 인현황후 복위 운동으로 서인을 다시 등용한 갑술환국 등 주도권 다툼을 위한 당쟁이 계속된다.
숙종은 1717년 노론(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갈림)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를 하는데 독대 내용은 세자인 장희빈의 아들 윤(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으므로 연잉군(숙빈 최씨의 아들)으로하여금 세제를 삼도록 부탁한다.
경종이 즉위 때는 소론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경종이 병약함을 이용하여 노론에서 연잉군을 세제로 삼고 수렴청정을 건의하였으나, 소론의 반격으로 수렴청정은 거두어들이게 된다. 경종은 즉위 4년 만에 죽게 되는데 독살 설에 휘말린다. 병약하고 위장이 좋지 않던 경종에게 연잉군이 제공한 간장게장과 생감을 먹고 복통을 호소했는데 인삼과 부자를 처방했다. 이것은 음식 조합의 상극이라 한다. 현대 의학으로 볼 때 간장게장은 식중독을 잘 일으키고 생감은 소화를 방해한다고 한다. 이것을 두고 지금도 논란이 되는 경종의 독살설이다. 연잉군이 바로 21대 영조 임금이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다. 무수리란 궁궐 안의 주 임무는 물 긷기·불 때기 등 여러 가지 허드렛일이다. 황후가 되기에는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이다.
연잉군이 임금이 되면 후견인 격인 노론이 정권의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론 세력이 밀려날 것을 우려하여 소론은 남인들과 손을 잡고 경종이 억울하게 독살되어 죽임을 당하였다고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연잉군(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왕위 계승을 반대하며 대안으로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옹립할 것을 도모하며 반란 계획을 꾸민다. 거사를 위해 전국적인 조직망을 만들어 실제 반란은 변방에서 시작하여 서울로 진격할 것을 모의했다.
한편, 왕위에 오른 연잉군(영조)은 탕평책을 쓴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노론이 영조 즉위를 기회로 소론 세력을 제거할 상소를 올렸는데 수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1727년 정미환국(영조가 탕평책으로 소론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하려는 노론 측 인사를 파면시킨 사건)으로 소론 정권이 유지되게 함으로써 소론의 거사 명분이 약화 된다. 그러므로 동조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최규서에 의해 모반 계획이 고변되기에 이르렀다. 또 김중만 등은 역모 세력들의 취군 동태를 파악해 고발하기도 했다. 모반 계획이 발설되었음을 안 반역 세력은 먼저 선수를 쳤다. 이인좌가 반역의 중심인물이었다.
1728년 3월15일,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로 자칭하고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에 진입해 충청 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호남과 영남의 일부 지역에서도 호응하였다. 호남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이 유배중인 박필몽 등과 연결해 전라감사를 연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영남은 정희량이 고향인 안음(현 함양 안의·거창 위천 일대)의 고현창(古縣倉)을 열어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봉기했다. 안의와 거창지방에서 동조 세력을 규합한 후 안의와 거창은 물론 함양, 산청, 합천까지 병합하며 기세를 드높인다. 난에 동조한 세력이 1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인좌(李麟佐)가 주모자였기에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지만, 경상우도에서 정희량(鄭希亮)이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 난이 무신년에 일어났기에 무신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실은 전국 규모의 반란이었다. 호서·호남·영남 지역은 물론이고 경기, 평안도까지 반란군이 결성되어 있었다. 반란을 이끈 삼두마차는 호서의 이인좌, 호남의 박필현(朴弼顯), 그리고 영남의 정희량이었던 것이다.
정희량은 반란의 주모자인 이인좌와 세교(世交)를 매개로 포섭되었으나, 그가 반군의 중심인물이 되었던 데는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기반이 큰 작용을 했다. 정희량은 경남 안음 일대에서 상당한 지역적 기반을 갖추고 있던 사족 가문인 초계 정씨(草溪 鄭氏)였다.
이인좌가 청주성(淸州城)을 점령할 때부터 반군들은 군중(軍中)에서 경종의 위패를 받들었다. 자신들의 거사가 경종의 복수임을 강조하여 반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함이었다. 청주성을 점령한 반군들은 도성을 향해 기세 좋게 쳐들어갔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주력 이인좌군이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대패하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응 등에 의해 청주성에서 밀려나 상당성에서 패하였다. 결국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를 비롯해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된다.
한편, 영남지방에서 초기에는 유생들과 선비들이 주축이 되고, 관군 탈영병, 지방 향청 세력, 농민, 사찰 승려, 가동(노비) 등이 대거 동참함으로써 세력이 급팽창했다.
동조하는 민심 또한 높았다. 그러나 이인좌가 생포되고 북쪽으로 진격하던 정희량의 군사도 선산, 상주, 웅진이 동조하지 않게 되면서 막히게 된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어 우회하여 호남으로 진격하려 하였는데 팔량령에 막혀 후퇴하여 거창으로 돌아온다. 결국 정희량도 생포되어 처형을 당하게 된다.
이들은 거사를 해서 경종의 복수를 하고 왕자의 적통이었던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던 것인데 밀풍군은 영문도 모르게 역모에 가담한 것처럼 엮어져 1729년에 처형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에 분개한 영조는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이 사건을 영남 지역의 반란으로 규정지었다. 나아가 영남을 반역향으로 지목해 일체 과거 응시를 중지시키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사실 이인좌는 영의정을 지낸바 있는 준경의 후손으로 청주 송면 출신이다. 그리고 그가 난을 일으킨 지역도 충청도 청주였다. 영남의 여러 현들은 청주에서 비롯된 반란에 호응한 동조 지역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영조는 이인좌난을 영남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단정 지었다.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바로 이 지역이 남인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인좌의 당색이 소론 강경파이긴 하지만 그는 남인 강경파인 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다.
영조는 영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호응도 이곳이 남인 고장이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래서 난 이후 남인의 등용은 제한되었고, 비록 이 난과 직접 관련이 없었다 해도 영남인은 출사나 진급에 제한을 받았다.
난을 평정한 영조는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움은 물론, 반역 가담의 중심축이었던 안의 현을 없애고 거창과 함양에 예속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후 50년 동안 영남 사람들은 과거를 볼 수 없도록 과거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 여파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지속되는데 무려 135년 동안 영남 지역에서는 정,종 3품 이상인 당상관을 배출하지 못하는 홀대를 받았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의 연암집에 수록된 처사 이성택(李聖擇, 1686∼1742)의 비문인 ‘이처사 묘갈명(李處士 墓碣銘)’에서 안음현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안음현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신 사태에 참여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진 현상들이었다.
“(1728년 7월 안음현이 폐지된 후 안음현 사람은) 논[畓]의 물도 이웃 고을 사람에게 먼저 빼앗기고 대낮에 무덤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가도 말한마디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입만 조금 움직여도 도리어 역적으로 욕을 퍼부었고, 이예(吏隸 : 아전과 하인)들은 양읍(주:거창․함양)에 분속 되어 마치 포로나 노예처럼 취급됐으며, 유생들에게까지 군정(軍丁)의 충원이 요구되는 형편이어서, 그 고초가 뼈에 사무쳐도 호소할 곳이 없다.” (연암집 ‘이처사 묘갈명’)
조선왕조실록 1728년 6월 10일·14일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영조가 말하기를 ‘큰 역적들이 모두 왕법(王法)에 복주(伏誅)됐는데도 흉적(凶賊)의 남은 무리들이 반역할 마음을 고치지 않고 감히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두고 있다. 경상우병사의 계본(啓本: 보고서)을 보니, 곤양(昆陽 : 사천시 곤양·곤명·서포면, 하동군 진교·금성·금남면 일원)에 던져진 흉서(凶書)는 아주 놀라운데 그 글을 보면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남은 종자임을 알 수 있다. 이들 남은 흉적을 빨리 잡아 고가(藁街, 장안성에 죄인을 효수한 거리)에서 효수(梟首)하지 않는다면 남은 역적의 간담(肝膽)을 어떻게 깨뜨리며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좌우포청에 분부하여 각별히 기찰(譏察 ; 탐문)하여 체포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 및 좌우병사에게 일체로 하유하여 기필코 포착하게 하여, 잡아 바치는 자에게는 마땅히 2품직을 제수하고 상을 후하게 주겠다.’ 그 후 기찰이 이명근(李命根)과 김처삼(金處三) 등의 의심스러운 정상을 알아냈으므로 국청(鞫廳)에서 잡아와 국문(鞫問)했고, 고발이 많이 있어 모두 잡아와 국문했으나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는데, 이명근과 김처삼 등은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는 등 60여 명을 처형했으며, 나머지는 다 참작하여 처치했다.” (영조실록 4년 6월 10일·14일)
무신사태에 연루된 사람이 ‘나라의 반이 됐을 정도’로 무신 봉기는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깊은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1728년 4월 24일 영남 안무사(安撫使) 박사수와, 1729년 3월 10일 영남 안핵사(按覈史) 오광운(吳光運)이 영조에게 말한 것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나라의 반쪽이 역적이 됐으니, 어디서 인재를 찾아 얻어 임용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물리친 사람들을 융화시켜 모두 기용한 뒤에야 국세(國勢)가 튼튼해질 것이다. 신(臣)이 승정원(承政院)에 앉아 있다가 마침 재신(宰臣: 2품 이상 벼슬)을 만났는데, 소장(疏章)을 또 올리고 서울을 떠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영조실록 4년 4월 24일)
“흉얼(凶孽)의 지류(支流)가 거의 나라의 반을 널리 차지하고 있으니, 마땅히 유무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는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청컨대 폐고(廢錮)된 집안들을 소통(疏通)시키도록 하소서.” (영조실록 5년 3월 10일)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과 같이 무신사태 후 영남의 많은 유생들은 과거를 치르지 못하게 정거(停擧)를 당했으며, 1728년 9월 궁궐을 지키는 경상도 출신 금위군들이 합천 출신 금위군 80명은 무신년에 조성좌의 심복으로 역적을 따랐기 때문에 함께 근무를 설 수 없다고 하는 등 합천 출신 금위군들이 배척을 받았고, 겹눈동자를 가진 합천 가야의 정인홍의 증손이 민심을 현혹한다고 1729년 4월 장살됐다. 급기야 1729년 5월 노론인 우의정 이집(李㙫, 1664∼1733)은 “안음현(安陰縣)은 역적을 따른 고을이니 종자를 남기지 않고 진멸(殄滅)시켜야 하는 지역”으로 매도했다. 안음현은 1728년 7월부터 1736년 1월까지 약 8년 동안 폐현(廢縣)돼 거창과 함양에 분속(分屬) 되는 차별과 수모를 받았으며, 1767년(영조43)에는 ‘의(義)’로운 지역이 되라는 뜻에서 안의현(安義縣)으로 개명되었다. 이러한 몸부림이 일부 효과가 있었는지 1737년 3월 3일 노론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도내(道內)에 있는 인재들을 천거하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하자, 영조가 이를 받아들여 천거한 인재들을 발탁(등용)한다. 이 상소에도 경상좌도와 달리 경상우도는 반역향으로 대하고 있으며, 그래서 특별히 진작시켜 다시 선비의 고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상소했다. 용인 출생인 민응수는 1746년(영조22) 11월 우의정에 오른 노론 대신이다.
“예안의 이수연(李守淵: 이황의 6세손), 안동의 김세열(金世烈), 비안(比安: 의성군 비안면 일원)의 권빈(權䎙), 안음의 신수이(愼守彝), 금산의 조세붕(曺世鵬: 조위 후손)은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 자로서 똑같이 등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영남은 사부(士夫)의 기북(冀北: 인재의 고장)인데, 오로지 우도(右道)는 근래에 와서 풍습이 더욱 변천해진데다가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나왔기 때문에 추로(鄒魯)의 고장을 도리어 촉인(蜀人: 역적)으로 대하고 있다. 만일 특별히 진작(振作)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자포자기하여 글을 읽는 종자(種子)들이 영원히 끊기게 될 것이다. 이는 영남인(嶺南人)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또한 조정의 근심이기도 하므로, 무신년(1728년 무신란) 때 공을 세운 합천의 강지은(姜趾殷)과 정희운(鄭熙運: 정여창 후손), 거창의 이휘(李暉) 등 세 사람은 발탁하여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감동하도록 하소서.” (영조실록 13년 3월 3일)
그러나 1737년(영조13) 7월 1일 노론의 거두이며 좌의정인 청사 김재로(淸沙 金在魯)가 경상좌도(안동지방)는 좋게 평가하고 경상우도(거창,합천,진주)는 죄악시(罪惡視)하는 분리정책을 공개적으로 영조에게 표출한다.
“좌도(左道)는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살았기 때문에 삼가고 신칙(申飭 :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하는 기풍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우도(右道)는 조식(曹植)이 살았기 때문에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풍습이 도리어 유폐(流弊)가 됐다. 그 폐단으로 조식의 제자에 정인홍이 있었다.” (영조실록 13년 7월 1일)
이처럼 김재로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우도 분리정책’이 표면화되고, 경상우도를 역적의 고을로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1738년 8월 9일 병조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다음과 같은 상소를 한다.
“대저 호서(湖西: 충청도) 사람들은 심지(心志)가 굳지 못하고 호남 사람들은 교활하여 변하기를 잘하는 것은 모두 산천(山川)이 흩어져 달려가는 형국(形局)이기 때문이다. 영남에 이르러서는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두텁고도 높고 흐르는 냇물이 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유(大儒) 가운데 사현(四賢)이 모두 영남에서 나왔다. 오늘날 (안동 등) 영남에 인재가 전혀 없는데, 이는 조가(朝家: 나라)에서 키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 영남을 폐기한 것이 기사년(1689년 숙종15년 기사환국)부터 비롯됐는데, 기사년에 편당하는 사람들이 분의(分義: 분수)를 침범하고 의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것은 그 죄가 진실로 하늘에 닿는 것이었지만, 갑술년(1694년 숙종20년 갑술환국) 이후의 사람들은 죄를 범한 자의 자손이 아니었는데도 뒤섞어 영구히 폐고(廢錮)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이황의 영남상도(上道)는 예의를 숭상하는 풍습이 있어 사사로운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없는데, 조식의 하도(下道)는 기절(氣節)을 숭상한 것이 폐단으로 남아 법을 어기는 등 불순하여 흉역 정인홍이 태어나고, 결국 (무신기병) 흉역 정희량이 나타났다.” (영조실록 14년 8월 9일, 승정원일기 영조14년 8월 10일)
이를 보면 무신란 발발 원인을 우도의 조식과 정인홍에게 돌리면서, 이제는 노골적으로 ‘경상좌우도 분리 정책’을 펼쳐 안동 의성 예천 영천 영양 봉화 등 경상좌도는 포용·등용하고, 진주 합천 거창 함양 고성 함안 고령 등 경상우도는 차별적으로 대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천보는 1761년(영조37) 영의정에 오른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처럼 집권 노론 세력들은 ‘경상좌우도 분리정책’을 공개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경상우도는 역적의 땅으로 고착화됐을 뿐만 아니라, 무신사태의 사상적 연원을 조식(曺植)에게 돌리고, 조식 정인홍 조성좌 정희량을 같은 묶음으로 하여 경상우도를 가혹하게 차별했다. 이로써 합천 삼가 초계 안음(안의) 거창 함양 진주 산음(산청) 함안 의령 고령 성주 등을 비롯한 경상우도의 남명학파는 인조반정에 이어 더욱 빈사상태(瀕死狀態)에 빠지게 됐다.
천징, 천일 할아버지 호와 덕천재의 기록으로 볼 때 그 난에 연유되어 이곳으로 피신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할아버지들께서 거창에서 살았다는 것과 1728년 당시 천징 조부는 39세, 천일 조부는 36세이고, 아들인 운갑 조부는 22세, 인갑 조부는 18세, 우갑 조부는 8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전역 인구가 72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안의 거창의 인구도 몇 천 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명분을 중시하는 남인의 기질을 가진 선비였기에 명문거족인 정희량과 뜻을 같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신의 난이 평정된 이후 난에 가담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분을 속이기 위해 은둔 지역에서 숨어 들었다. 덕유산 자락이나 지리산 자락의 산청 덕산이나 삼장, 하동의 청학동과 화개, 사천이나 진주로 스며들어 신분을 숨기고 살았음을 관찬의 기록이나 문중기록(가승, 족보, 지방지)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 남록은 무신의 난을 피하기 좋은 천혜의 성자였다. 천징, 천일 조부께서 처음 갈티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갈티는 오늘 날 하동 위태이다. 청학동과 고개를 사이에 둔 오지였다. 후에 하동 북방으로 세거지를 옮긴 후 다시 사천 세동으로 옮겨 살았다.
영조는 천징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6년을 더 산다. 만약에 천징과 천일 조부가 그 난에 가담을 했다면 당연히 고향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손자 때나 조심스럽게 계촌을 대어 거창에 갔으리라 짐작된다. 어릴 때 할머니 아버지께서 그토록 선산 김가 강호파라는 것을 강조하셨던 것은 잠광회적(潛光晦迹)을 하더라도 근본을 잃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
어버지께서 어릴 때 들려주시곤 하던 이야기 생각난다. “만약에 족보 경오보를 구할 수 있다면 우리 본촌이 거창보다 큰집인 것을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셨다. 그 말씀에 내포 되어 있는 것은 우리들이 피신해 있는 동안 기록이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었다고 본다. 내가 족보와 역사의 기록을 살펴본 바로는 그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았다. 몇 년전 병규 형님께서 대구 계명대학도서관에서 경오보(1690:숙종)를 기미보(1739 영조) 열람해 보았는데 특별하게 다른 기록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글쓴이가 소회를 기술한 것은 깊이 연구된 사적 기록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옛날 조모님과 선고께 들었던 이야기나, 거창 지역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나, 입곤양 조부의 호에 암시된 의미와, 덕천재에 기록된 글의 정황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본 것이다.
참고로 덧붙이고자 함은 산호정기를 지은 회봉 하겸진선생과 덕천재기를 지은 중재 김황선생은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유학자이시다. 이런 분들은 가문이 반듯하지 않는 집안에는 자신들의 글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이 선비들의 불문률이다. 그런 분들이 글 속에 아쉬움을 표한 부분은 우리 문중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