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김수영을 되짚는가?
박 설 희
“내 인생에 가장 보람 있고 잘 한 일? 이걸 지켜온 일이지요.”
미처 궁금한 것을 질문하기도 전에 김현경 여사 스스로 이곳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시간들을 펼쳐낸다. 50년간 15번을 이사한 굽이굽이 사연들. 그 과정에서 분실하거나 도난당한 김수영 시인의 자료들에 대해서. 용인 마북에 있는 지금의 아파트로 옮겨오기까지의 과정을 전하는 데 30분 걸렸으니 얼마나 자료 보관에 노심초사하며 힘들었는지 알 것 같다. 그러니 “이걸”에는 많은 것이 포함돼 있을 터였다. 김수영 시인에 대한 기억, 유품과 자료들, 아내의 자리.
“김수영 시인은 작품을 완성하면 나를 시켜 반드시 원고지에 정서시켰지요. 그래서 그의 작품을 습작시대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다 알아요. 등단작인 「묘정의 노래」도 내가 원고지에 정서했지요. 한 자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어요.”
어렵고 힘들 때 그의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며 그 시간을 견뎠고 지금까지도 늘 힘주는 분이 김수영 시인이라고 한다. 거실에 최근에 발간된 『김수영을 위하여』가 놓여 있다. 이미 다 읽어봤는데 김수영 시인의 글을 바탕으로 학문적 관점에서 풀어나가서인지 자신에 관한 부분에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광복 무렵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역사 속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김 시인과의 사랑과 이별, 재회와 영원한 이별 과정을 들려준다. 이야기를 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을 이종구와의 만남과 헤어짐까지도. 이야기들 사이에 김수영 시인의 창작 습관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한 달에 한 편 정도 완성했어요. 시 한 편 쓰는데 온갖 신경질 부리고 문짝도 성할 날이 없었어요. 그래서 주변에 주로 깨지지 않는 걸 두었지요. 다 쓰면 산고의 고통이 끝났다고 어린애처럼 좋아했어요. 기실은 애들과 내가 더 좋아했지요. 우리의 고통도 끝났다고.”
그 상황을 생각하다 보니 웃음이 나는 한편 안도의 마음도 든다. 매번 처음 쓰는 것 같은 백지 상태의 노고. 누구에게나 시 한편의 완성 과정이 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손에서 책을 놓은 적 없는 김 시인은 철학서적을 주로 읽었는데 특히 하이데거를 좋아해 김현경 여사가 하이데거 전집을 사드리기도 했다.
“박사 논문 쓰면서 질문들을 해 와요. 난해시가 많다구요. 「백의」는 김 시인에게 내가 직접 물어봤는데 구호물자로 산 우리경제 상황을 그린 거죠. 「도취의 피안」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에요. 내 생각엔 표현, 에스프리, 상상력, 기술 등에서 최고 걸작이지요. 김수영에게는 사랑의 시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를 잃고」 읽어보세요. 사랑의 허무가 깔려 있지만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생활과 시가 다르지 않았던 김수영 시인. 1960년에「김일성 만세」를 써놓고는 제목에 ‘잠꼬대’가 어떨까 궁리도 했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 꼭 발표하고 싶어 했지만 너무 과격하다고 해서 서너 군데서 퇴짜를 맞았다. 이 시에서 4․19 이후 등장한 장면 정권이 이승만 정권과 마찬가지로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때에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그는 근본적으로 시와 생활에서 절대자유를 추구했어요. 김수영의 시정신은 절대자유, 절대자연, 사랑이지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알 것 같다. 김수영 시인의 글을, 정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대 영문과 출신이지만 함께 습작을 하던 1945년 무렵부터 일찌감치 그의 시를 알아봤기 때문에 자신의 시를 접었다. 그와 다시 합치지 않았다면 아마 소설을 쓰며 살았을 것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김현경 여사와 일제 노리다케 찻잔에 담긴 커피를 마신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에 등장했던 바로 그 찻잔이다. 바느질을 해서 당시 유행하던 세트를 구입한 것인데 세월이 무색하게 문양과 색깔이 선명하다. 틈을 봐 슬그머니 내가 가지고 간,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고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는 김수영 전집을 내미니 “김수영의 여편네 김현경”이라고 적는다. 그러고 보니 김수영 시인도 시와 산문에 여편네라는 말을 종종 썼다.
“시에서 내 흉을 좀 많이 봤어요? 보석 같은 아내, 여보라는 말도 썼지만 가장 많이 사용한 게 여편네라는 호칭이에요. 그러니 여편네로 살아왔지요.”
그렇다면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충격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얼떨떨해 현실 같지 않았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아쉬워지고 사람의 죽음이라는 게 참 허무했어요. 그런데 생활이 앞에 놓여 있어서 우선 그걸 해결해야 했지요.”
옷집을 차려 옷을 만들기도 하고 미술관 디렉터 역할도 했다. 신용 지켜가며 열심히 했더니 생활이 됐지만 이후 관심을 돌린 박물관 일은 진행이 잘 안 됐다. 그 과정에서 굳이 김수영 시인의 부인임을 밝히지 않은 채 은둔과 침묵으로 지내오다가 세인들 앞에 나선 것은 2008년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이 발간된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직후였다. 직접 출판사에 찾아가서 자신이 육필원고 자료를 다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했다. 1974년에 민음사에서『거대한 뿌리』 발간 당시 자신이 건넨 원고 보따리에서 김 시인의 여동생 김수명씨가 자료를 일부 빼내놓은 것이라 한다.
자료를 보기 위해 김수영 시인의 서재에 들어가니 “常住死心”이란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김 시인이 달력 한 구석에 메모를 해놓은 구절을 돌아가신 다음에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은 것이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면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을 고맙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고 김수영 시인이 김현경 여사에게 설명한 적이 있다. 하이데거가 말했던가,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봄”에 대해. 김수영 시인의 시작(詩作)과 삶을 짐작케 한다.
서재에는 김 시인이 사용했던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들, 자료가 담긴 상자들, 고인의 책들과 손때 묻은 사전, 사진, 거울 등이 보존돼 있다. 나무 테두리를 두른 거울은 김수영 시인이 늘 옆에 두고 작품을 쓰다가도 수시로 들여다보던 것이다.
김수영 시인의 자료들을 다 보관하고 있다며 이것저것 설명하는 김현경 여사에게서 뭔가 절박한 게 전해져온다. 췌장에 돌이 꽉 차 있는데 다행히 수술을 안 하고 약으로 가라앉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다. 게다가 백내장 수술을 하는 등 이래저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제 86세. 전부터 김수영 시인의 자료를 보관할 문학관이나 기념관 건립을 염원해 왔는데 이 참에 결실을 보고 싶은 것. 많은 지자체들이 고향 출신 문인들을 기리기 위해 문학관 건립 등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정작 이상, 박태원, 임화, 염상섭 등 걸출한 문인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서울시에선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김수영 문학관이 힘들다면 ‘서울 문학관’을 설립해 서울 출신 문인들을 함께 기렸으면 좋겠어요. ”
김수영 시인의 묘소가 있는 도봉구에서 자료관을 추진한다는 얘기가 있기도 했지만 정작 대부분의 자료를 보존하고 있는 김현경 여사는 추진위원회에서 제외돼 있는 것에 서운함을 표시한다. 김수영의 가족이라야 미국에 가 있는 아들과 김현경 여사 뿐인데 제대로 유족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방학동 문화센터 건물 내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도 모양새가 초라하다. 구청에서가 아니라 서울시가 나서는 게 김수영 시인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걸맞는 게 아닐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시계를 보니 인터뷰를 시작한 지 벌써 네 시간 이상이 지났다. 인류를 위해 시를 쓰고 후세들을 위해 번역을 한다던 김수영 시인에 대한 회상과 추억의 힘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선 오늘 용인에 이백 밀리미터 가까운 비가 내리고 있다고 알린다. 창밖에는“움직이는 비애”가 오고 있고“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김수영, 「비」)는 목소리가 내내 귓전을 맴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여러가지 만감이 교차 합니다... 여러 풍경들....빗소리....연세든 어르신....그리고 지금의 제 모습...
하이데거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치워버렸는데... 허연 시인이 김수영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저도 김수영을 가장 좋아합니다. 현실이 반영된 시 쓰기. 말장난이 아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