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작
연적 외 4편
조경선
들어오는 길 있으면
나오는 길 있습니다
작지만 그 안에 큰 뜻을 채워 넣고
내 곁을 지키고 앉아 열리고 닫힙니다
숨구멍 손 뗄 때마다
쏟아내는 울음들
한 번 품은 생각은 물결 따라 퍼져나가
갇혔던 감정을 풀어 몸 낮춰 번집니다
천년을 걸어온 말
물방울로 읽어내도
그 속을 알 수 없어 몇 번을 기울이면서
제 속을 비워냅니다 하루 받쳐 공손하게
- 《정음시조》 2023년 5호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쌓인 게 너무 많아 찾아간 어느 암자
깨끗한 아침을 노스님은 또 쓸고 있다
큰 원을 그려가면서
따라가는 발자국
그것이 길이었을 때 울음마저 사라져
깡마른 뒷모습 비자루처럼 꼿꼿한데
나는 더 무거워졌다
바람도 멈춰 있다
고요마저 쓸린 자리 쉬시지요 물었더니
지금이 끝이 아니라 여기부터 시작입니다
누군가 버리고 간 말
아직도 남아 있다고
- 《시조21》 2023년 여름호
스치로폼 후생
사라져야 산다는 말에 최대한 가벼워진다
손자국에 패이고 바람에 밀려날 때
하얗게 뼈를 드러내도 끝까지 버텨낸다
여기저기 긁혀서 흩어지는 속울음
금 갈 바에야 깨지는 오늘의 불안 앞에
후생의 알갱이들은 뭉쳐지자 않는다
나쁘다는 낙인으로 몰아붙인 미래들
바스락대는 제자리 소리조차 물렁해져
아직은 살아있는데 날마다 죽어가는
- 《좋은시조》 2023년 가을호
어때요 이런 고요
외딴 집에 홀로 앉아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
낯익은 발자국보다 먼 소리가 먼저 들려
일몰은 남아 있는데 고요가 타오른다
어제 떠난 발자국 퉁퉁 불어 커질 때
저녁을 훔쳐보는 유일한 산 고양이
눈빛은 노을을 따라 조금씩 움직인다
쓸쓸한 곳 들춰보면 불씨들 살아날까
녹이는 곱은 손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사람처럼 어때요 이런 고요
- 《가히》 2023년 겨울호
풀 피
손으로 풀을 뽑는데 뿌리는 더 힘을 준다
손아귀에 잡힌 채 풀이 할 수 있는 건
제 몸을 끊어내는 일 그들만의 생존방법
사람들은 그럴 때 풀물이 들었다 하고
풀들은 온몸을 던져 피를 봤다고 한다
서로는 사는 게 달라
너는 풀 피
나는 풀물
숲으로 읽어내면 그날들 눈물이 될까
한 움큼 피를 보며 베어낸 땀의 하루
날마다 쓰라린 진액 손을 씻는 우리들
- 《오늘의시조》 2024년 18호
- 《정음시조》 2024년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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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품
제6회 정음시조문학상 - 연적 외 4편 / 조경선
김덕남
추천 1
조회 90
24.07.23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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