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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아!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장)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13절)
유산을 분배하면서 우애가 좋아지는 형제를 본 일이 있습니까? 아무리 공평무사하게 유산을 나눈다 해도 제각각 불만스럽습니다. 더구나 유산이 많을수록 다툼도 커져서 회복될 수 없는 파경에 이르기 십상입니다. 재물의 영향력은 하나님을 능가해서, 신앙적 차이로 관계가 깨어지는 일은 드물지만, 재산 때문에 가족이 파산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일단 유산 분배를 두고 불평이 생긴 상황에서,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몫을 나누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유산 문제를 가지고 예수를 찾아왔다는 것은 그가 신앙공동체 안에 속한 인물임을 방증합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겪으신 일이지만, 누가의 신앙 공동체가 경험하는 사건이라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원시 교회를 분열시킬 뻔했던 최초의 위기는 구제 물품 배분의 형평성을 놓고 벌어진 갈등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합니다(행6:1-6). 재물을 두고 생겨나는 충돌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차이가 없습니다. 신앙으로 저절로 해결될 사안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14절)
형제 간의 불만이 없도록 깔끔하게, 예수께서 유산 배분 갈등을 정리하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5:5로 나누든, 6:4로 나누든, 양쪽 다 흡족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탐심에 이끌리는 이 형제들에게는, 마지못한 타협은 있을 수 있으나, 만족할 만한 타결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유산 분배 판결을 내리든, 형제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께는 이 문제에 관여하여 재판장의 역할을 하시려는 의사가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지겠다는 데에서 생겨나는 충돌이기 때문에, 적정한 선이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많이’, 남보다 ‘더 많이’의 기준에서는, 풍성함 혹은 넉넉함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풍성함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오병이어의 급식(9:10-17)이 있습니다. 빈 들에서 예수께서는 오천 명이 먹을 양식을 넉넉히 제공하셨습니다. 그 넉넉함이란 그들이 지금 먹고 배부를 만큼, 즉 필요한 만큼의 기준에서 볼 때 넉넉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원하는 대로 양식을 소유하도록 했다면, 오천 명의 양식을 한 사람이 독차지하고서도 그는 부족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15절)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원하는 것은 탐심이 아닙니다. 일용할 것, 필요한 것을 가질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고, 하늘의 아버지인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들을 헤아리시고 주신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눅12:22-31). 하나님의 “풍성하심”이란, 원하는 대로 주심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것에 부족함 없이 주신다는 점에서의 풍성함입니다. 이 기준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은 풍성하십니다. 그 풍성함을 구하는 것은 탐심이 아닙니다.
탐심이란 (필요한 것보다) 더 가지려는 욕구입니다. 여러 벌의 옷이 있는데 더 원하고, 필요 이상의 양식을 저장하려 하며, 잉여를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아야, 혹은 남보다 더 많아야 하는 욕망은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중독과 같습니다. 술로 술 중독을 고칠 수 없듯이, 재물로 재물 중독을 고칠 수 없습니다. 끝없이 욕망하는 탐심을 채울 길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리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많은 소출을 거둔 부자가 있었다 (16절)
부자라고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부정한 축재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당한 노력이나 보상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그렇습니다. 그가 부당이득을 취하거나, 이웃의 것을 갈취하거나, 일꾼들을 착취했다고 추정할 단서는 없습니다. 그가 부자가 된 것은 밭이 그에게 많은 소출을 내주었기 때문입니다(16절). 그러니 그가 많은 것을 갖게 된 것은 복을 받은 것이라 해야 옳습니다.
소유가 많아진 이후의 행동도 그다지 비판받을 짓은 아닙니다. 넘치는 소출을 간수하고자 창고를 더 지었고, 일을 잘 마치고 나서 이 모든 일을 기뻐했을 따름입니다(17-19절). 부자의 이런 처사를 부러워할 사람은 있겠지만,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돌연한 죽음을 맞습니다. 죽음이 꼭 벌인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있어선 죽음이 심판처럼 들이닥칩니다. 이 부자의 소유는 부당하지 않고 그의 계획도 불의한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20절)
그를 악하다고 할 수 없으니, 그에게 덮쳐온 파국의 이유를 ‘악함’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이었을까요? 비유는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20)라고 칭합니다. 어리석음이 비운을 초래했다는 얘긴데, 과연 어리석음이란 것이 죽음을 부를 만큼 치명적인가요? ‘악함’은 타인에게 저지르는 잘못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음’은 자신에게 가하는 해로움입니다. 이 부자는 악한 사람이 아니기에, 피해를 당한 타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어리석었으므로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는 결말을 맞습니다. 의외이면서 치명적이지요.
어리석음이 지닌 결정적 문제는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죄를 죄라고 가려내고 악을 악이라고 밝혀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알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악과 선은 밤과 낮처럼 구분될 수 있으나, 어리석음과 지혜는 일몰과 일출의 어스름처럼 모호합니다. 죄악은 상처를 남김으로써 알려지지만, 어리석음은 죽음에 이르면서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가 악하고 영리했다면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겠지만, 악하지 않고 어리석은 부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끝내 모릅니다.
어리석음 1 : 내 곡식, 내 물건, 내 영혼
이 부자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수확을 위해서는 부지런함이 기본이 되어야 하지만, 부지런함이 곧 풍작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풍성한 소출은 사람의 노력 이상의 운(運)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결과입니다. 말하자면, 이 부자의 많은 수확은 일종의 기적이요, 은혜요, 복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이 많은 결실이 “내 것”이라고 단언함으로써, 그 결실에 내포된 중요한 진실을 부정해 버립니다.
풍성한 소출에 가능하게 된 요인들에 대하여, 부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함께 수고하는 동료들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이 기적과 은혜와 복이 전적으로 나의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부자는 어리석음의 길로 빠집니다. 은혜를 받고도 그것이 은혜임을 모름이 어리석음입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영혼을 가리켜 “내 영혼”이라고 일컫습니다. 은혜 베푼 분을 모를 뿐만 아니라, 영혼을 주신 분까지도 부인하고 있음입니다.
어리석음 2 : 곳간을 더 크게 짓다
곡식이 많아졌으니, 곳간을 더 크게 짓는 건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곳간을 넓히는 것은 받은 복을 잘못 관리하는 어리석음의 첩경입니다. 많은 재물과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실족하고, 부흥하는 교회들의 빗나감은 곳간을 키우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주신 분의 뜻을 무엇인지 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곡식은 먹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부자의 밭에서 난 곡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먹혀야 할 곡식을 창고에 쌓아 두고 소유로 삼음으로써, 부자는 양식으로 세상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릅니다. 쌓아놓은 곡식은 생명을 부양할 수 없기에 더 이상 양식이 아니며, 저장된 양식은 반드시 썩습니다. 양식을 축적함이 필요한 양식을 부족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부자는 모르고 있습니다.
어리석음 3 : 많이 쌓아 두었으니 즐거워하자
이 부자는 타인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로 높은 요새를 쌓고, 그 성채 속에서 자신과만 이야기하며, 언제까지나 거기에 안주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많이 쌓아 두었으니 즐거워하자’라는 말은 재물이 그의 영혼까지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소유가 풍부한 만큼 자신의 존재도 영원하리라는 환상에 빠져 있으며, 심지어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것까지 망각합니다.
자기 소유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부자에게, 많은 재물은 하나님과도 같습니다. 재물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느 시대에나 팽배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소유에 기대어 사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재물은 언제나 가장 강력한 우상이며,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라고 간파한 에베소서의 통찰은 예리합니다(5:5). 탐심은 눈을 가려 진실을 못 보게 합니다. 내가 소유한 것이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 이 엄연한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은, 소유를 사랑하고 의지한 결과입니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20절)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오고,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의 진실이 천둥처럼 확연해지는 때를 맞이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가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어리석음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은총 중 하나입니다. 소유가 영혼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 영혼뿐만 아니라 소유도 내 것이 아니며 그것을 주신 분이 찾을 때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음(15절)을 깨닫는 것이 구원입니다. 재물이 부요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21절) 사람이 생명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둔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재물)을 세우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선악과처럼, 재물은 탐심을 일으키고, 탐심은 가장 중요한 진리를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유산을 탐하는 형제는 자신들이 형제임을 잊고 있습니다. 비유 속의 부자는 많은 소유로 인해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요구하십니다(눅12:32-34; 18:18-30; 19:1-10). 초대교회는 자기 소유를 팔아서 모두가 필요한 대로 나누는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행2:42-47; 4:32-37). 산상수훈에서의 첫 번째 복은 “하늘나라는 가난한 이의 것이다”(마5:3)라는 선언입니다. 재물에 의존하지 않는 삶은, 하늘 아버지께서 풍성하시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가능한 생명의 길입니다. 탐심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넉넉하다는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를 누리며 기뻐하는 삶이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은 저장해 놓은 소유로 유지되지 않고, 전적으로 은혜를 힘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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