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栗谷) 이이(李耳) 십만 양병설 진위
4월 3일 경남유교대학 강의를 맡으신 분은 충남대학교 명예교수이신 황의동 교수였다.
栗谷(율곡) ‘理氣之妙(이기지묘)의 조화정신’을 이야기할 때 栗谷(율곡)이 經筵(경연)에서 10만 양병 설을 주장했다고 이야기했다.
경연(經筵)은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유학 경전, 역사서 등을 강론하면서 정국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이런 자리에서 논의된 주요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진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런 내용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교수님께 질의를 했다. ‘율곡이 10만 양병 설을 주장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사계 김장생이 스승인 율곡의 사후에 스승의 일대기를 정리하여 쓴 율곡행장에 처음으로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행장기록 내용은 1583년(선조 16년) 이이가 병조판서 시절 선조에게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 배치하여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건의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구체적 장소 날짜 등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이이가 쓴 「시무육조(時務六條)나 다른 상소문들을 보면 "군사를 정비하고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 적이 있다. 그때 서애 류성룡이 "사태가 급박하지 않은데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불러올 수 있다"며 반대했고, 선조 역시 이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훗날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목격한 율곡의 제자들이 스승의 선견지명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이이가 강조했던 국방 강화론을 '10만 양병'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삽입하여 과장되게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여기에서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후에 통렬히 반성하며 쓴 懲毖錄(징비록)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懲毖錄(징비록)이란 지난날의 잘못을 징계하여 후일을 삼간다. 는 뜻의 기록이다.
징비록에는 자신이 모셨던 왕의 무능함도, 조정의 분열도, 자신의 오판도 숨김없이 기록한 회고록이다.
懲毖錄(징비록)에서 비중 있게 언급한 내용이 기축옥사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란이 터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당시 조정의 극심한 당쟁과 기축옥사의 폐해를 꼽았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류성룡은 국방력 약화의 근본 원인은 기축옥사로 인해 수많은 인재가 희생된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 옥사 과정에서 동인 측의 유능한 선비와 무관들이 대거 제거되거나 유배를 갔는데, 류성룡은 이를 두고 "전쟁을 앞두고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들을 스스로 없애버린 격"이라며 안타깝게 여겼다.
3년 가까이 이어진 기축옥사는 선비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조정의 신료들은 온통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정작 일본의 침략 징후에는 눈을 감게 되었다. 내부의 적을 잡느라 외부의 진짜 위협을 방치했다는 통렬한 반성이 '懲毖(징비)'의 핵심이다.
기축옥사를 발생시킨 정여립에 대해서도 류성룡은 언급했다.
정여립이 재능은 있었으나 성격이 거칠고 과격하여 결국 화를 자초했다. 는 식의 인물평을 남기면서도, 그 사건이 확대되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과정(서인의 영수 정철의 주도)에 대해서는 정치적 재앙으로 묘사했다.
정여립 역모사건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배경은 이러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10월 2일 선조 임금은 황해감사 한준이 은밀하게 조정에 보낸 서신을 받았다. 안악 군수 이축이 와서 역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는 내용의 보고서인데 역모의 주동자는 정여립(鄭汝立)이었다. 정여립은 전주 출신으로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갔다.
정여립은 25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하고, 성혼과 이이를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곤 했다.
1584년 우의정 노수신이 정여립을 천거했다. 노수신은 김효원과 심의겸 사이에 인사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동인 김효원의 편을 들었던 일로 인해 동인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정여립은 노수신의 천거로 수찬이 된 후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을 헐뜯었다. 이로 인해 선조 임금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정여립은 서인 사람들을 비판하고 동인인 유성룡 등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서인 측에서 그를 비난하자 벼슬을 접고 전라도 금구로 내려가 그곳에 별장을 짓고 학문을 강론한다고 위장하여 사람을 모았다. 그리고 황해도로 가서는 변승복, 박연령 등 정치 불만세력을 포섭했다.
마침내 정여립은 반란을 결심하고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모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서울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전에 승려 의암의 밀고와 정여립의 제자인 조구의 자백으로 역모는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안악 군수 이축이 황해감사 한준에게 보고했고, 한준이 조정에 장계를 올린 것이다.
결국 기축옥사(1589년)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구실로 서인이 동인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주도한 인물들과 안타깝게 희생된 대표적인 선비들을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기축옥사를 주도한 서인의 주요 인물로는
당시 수사를 담당한 본부인 포도청과 추국청을 장악했던 서인 강경파들이 중심이 되었다.
정철은 우의정으로서 재판장 격인 '위관'을 맡아 옥사를 총지휘했다. 평소 대립하던 동인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추궁하여 '독철(毒澈)'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가혹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송익필은 정철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지략가이지만 서자의 굴레를 안고 산 인물로서 감옥에 갇힌 정여립의 서신 등을 분석해 배후 인물들을 지목하는 등 수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기획자'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성혼은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철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비록 직접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인의 입장을 대변하며 옥사가 확대되는 데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한응인은 수사관으로서 직접 심문을 담당하며 매우 잔인하게 형문을 가해 동인 선비들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앞장섰다.
기축옥사로 인해 희생된 동인의 핵심 인재 1,000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났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는
동인의 영수 이발이다.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하다 죽었으며, 그의 80대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도 형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여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우리 진주 지역 등에서 신망이 높았던 최연경은 모반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가공의 인물 '길삼봉'으로 몰려 옥사했다. 류성룡이 그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끝내 구하지 못해 훗날 큰 회한으로 남았을 정도다.
이조판서를 지낸 백유양은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옥사했다. 그의 죽음은 동인 관료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호남의 저명한 학자 정개청은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학문적 깊이가 깊었던 인물이라 호남 유림의 큰 손실이었다.
기축옥사는 단순히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제거한 사건을 넘어, 국가적 인재 재앙이었다.
이 사건이 임진왜란을 발발케 한 단서가 되었다.
일본의 스파이 스님 현소(玄蘇, 게인소)가 1589년(기축옥사 발발기)부터 1590년까지 조선 통신사(황윤길, 김성일 등)를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한양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어에 능통했으며, 조선의 고위 관료들과 교류하며 내부 정보를 수집하는 스파이 역할을 겸했다.
현소가 기축옥사의 현장인 한양에 머물며 서소문 밖 형장에서 매일같이 선비들이 처형되거나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선의 조정이 일본의 침략 대비보다는 내부의 '반역자'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 국방은 뒷전인 상태임도 간파했다.
현소는 일본으로 돌아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쓰시마 도주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보고를 올렸다.
"조선은 지금 내란 중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인해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죽이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어 외부의 침략에 대응할 여력이 전혀 없음을 알렸다.
"인재들이 사라지고 있다": 조선의 유능한 선비들과 장수들이 옥사에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을 가서 군사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방비가 허술하다" : 조선 정부가 일본의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성곽 수축이나 군사 훈련보다는 당파 싸움에 몰두하고 있다는 실상을 보고했다.
현소의 보고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임진왜란)의 결심을 굳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기축옥사는 내부적으로는 인재를 잃고 국론을 분열시켰으며, 외부적으로는 적국인 일본에 "지금 공격하면 조선은 쉽게 무너진다."는 잘못된 확신을 준 뼈아픈 역사의 장면이 되었다.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이 시기를 그토록 비판적으로 기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축옥사로 인한 유능한 행정가와 무관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불과 3년 뒤 터진 임진왜란 때 국방 사령탑이 부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축옥사 이후로 당쟁은 더욱 깊어져 동인(훗날 남인과 북인)은 서인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고, 이는 조선 후기 내내 보복과 숙청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시작점이 되었다.
특히 이황과 조식의 학맥을 잇는 영남 사림과 호남 사림이 큰 타격을 입었다.
서인 세력은 조선이 망할 때 까지 권좌에 앉아 권력을 휘둘렀는데 그것이 오늘 날 정치에 까지 그 맥락이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강의 하신 황의동 교수도 서인의 맥락에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애 류성룡(퇴계의 제자)은 징비록에서 기축옥사를 일으킨 서인을 강력하게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다. 육곡 행장은 율곡사후 13년이 지난 1597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 났다. 기축옥사로 희생이 많았던 지역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싸우기 보다는 도망가서 굶어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기축옥사를 주도한 서인세력에 대해 하늘을 찌를 듯한 원망을 사계 김장생이 율곡행장에 10만 양병 설을 기록하여 서인에 의해 점철된 역사의 오욕된 기록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기술한 것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나는 가져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