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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박영규, 웅진지식하우스)
고려, 고구려, 백제, 신라 비밀과 신비로 가득찬 천년왕국의 문을 두드리며........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 신라를 새롭게 만난다. 열린 눈과 마음으로 찾아가는 천년왕국 신라의 비밀. 세 성씨가 하나의 왕조를 일군 나라.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왕호를 사용한 나라. 왕후가 왕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고 그 아이가 왕위에 오른 나라. 사위가 왕위를 잇고, 여왕이 존재했던 유일한 국가 신라. 신라는 동시대 존재하던 고구려나 백제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신라만의 독특한 역사는 미처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신비에 싸인 ‘또 하나의 신라’를 만나게 해 준다. 보잘것없는 소국이었던 신라가 삼한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며, 천년동안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신라인들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편견과 그릇된 가치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신라를 맞이한다.
기원전 57년, 시조 박혁거세가 건국한 신라는 56대 임금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항복할 때까지 장장 992년이라는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고려와 백제, 가야와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위기를 겪으며 비교적 늦게 발전했지만, 꾸준히 힘을 기르고 지혜를 모아 삼국을 통일하는 것은 물론, 길고 화려한 역사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신라 왕조 1000년]은 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을 비롯한 10여 명의 학자들이 펴낸[삼국사기]와 일연의[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엮었습니다. 각 시대별 왕과 중요 인물들, 주요 사건 또한 빠뜨리지 않고 담았고, 발해와 가야의 역사까지 다루어 고대의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가장 작고 약했던 신라가 가야를 병합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며 삼국을 통일하고 1000년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신라 10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김용만, 백명식 | 주니어김영사)
왜 신라의 역사인가?
한 나라가 1,0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삼국 시대의 고구려(高句麗)는 700년, 백제(百濟)도 700년을 지속했고, 고려(高麗)는 500년이 되기 전에 망했고, 조선(朝鮮)은 500년 동안 유지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나라가 바로 신라(新羅)이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신라가 외국 세력인 당(唐)나라를 끌어들여 동포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다 차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비난의 소리가 있다.
"왜 신라보다 힘센 고구려와 백제는 삼국 통일을 하지 못했을까? 백제는 642년에 대야성을 빼앗으면서 신라를 멸망시킬 뻔했는데, 왜 불과 18년 뒤에는 거꾸로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는 살아남았지?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만약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신라를 크게 초기, 중기, 통일신라 시대로 나누었다. 그 기준은 6부 연합국으로 이사금, 마립간이 존재했던 시대를 초기 신라로, 왕으로 호칭을 바꾸기 시작한 지증왕 시대부터를 중기 신라로,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를 통일신라로 구분하였다.
세계 문화유산과 빛나는 과학 기술의 나라, 신라
수도 경주는 국보 22점과 수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다. 1997년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뒤, 2000년에는 경주시의 5개 역사 유적 지구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사 내에는 국보 23호인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우리나라 최고의 탑으로 인정받고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다.
신라가 문화유산이 발전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은 과학 기술 분야의 발전 덕분이었다. 당시 천문대였던 첨성대에서 과학자들은 밤마다 별자리를 관측하고,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알아내 농사와 생활에 필요한 여러 지식들을 연구할 수 있었다. 특히 수학은 정교한 건축물을 만드는 데 폭넓게 활용되었는데, 석굴암, 사찰, 탑, 불상 건축에서도 비례의 균형미를 가능하게 했다. 수학은 또한 논과 밭의 넓이를 계산하여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기준이 되어, 통일신라 이후 넓어진 국토를 다스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들의 뛰어난 활약
신라에는 손에 꼽을 만한 인물들이 많다. 신라 초기 눌지 마립간은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간 두 동생이 걱정되어 편안한 날을 보내지 못하자, 충신 박제상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볼모들을 구해온다. 자신을 희생한 경우로는 527년 불교를 신라에 들여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차돈도 있다. 562년 신라가 가야를 공격하게 되었을 때, 15세의 어린 화랑 사다함이 기병 5000명을 지휘하여 가야 성을 함락해 대가야를 병합한 적이 있다. 사다함 같은 어린 화랑들의 용기가 진흥왕이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힐 수 있었다. 632년 우리나라 최초로 여왕이 된 선덕 여왕은 능력있는 인재들을 기용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여 정치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때 기용된 인재들이 바로 김춘추(나중에 문무왕이 됨)와 김유신 장군이었다. 이들은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9세기에는 장보고가 청해진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해적들을 소탕해서 신라 사람들의 더 이상 노비로 팔려 가는 일이 없었고, 상인들도 안심하고 무역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894년 진성 여왕 때,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친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있었고, 신라를 대표하는 유적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든 김대성이 있었다.
이처럼 자신을 희생해 나라를 지킨 사람들 덕분에 신라는 1,000년 왕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고구려 7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거대 제국으로 긴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 알려진 고구려 역사도 알려준다.
■백제 7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앞선 기술력과 세련된 문화를 자랑하는 백제는 드넓은 바다를 무대로 세계와 교류한 해양 강국이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린 백제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막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신라의 왕위계통도
제1부. 삼국시대
(제1대 혁거세왕에서 제29대 태종무열왕까지)
박씨 왕조
•제1대 혁거세거서간(赫居世)(B.C57~A.D4)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이름을 서라벌이라 함. 왕21년에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쌓음. B.C27년 천일창(槍天日)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A.D4~A.D24) :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를 격퇴.
•제3대 유리 이사금(留璃尼師今)(A.D24~A.D57):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인 ‘도솔가’ 등을 지음.
석씨 왕조
•제4대 탈해(脫解) 이사금(A.D57~A.D80):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 탄생.
박씨 왕조
•제5대 파사(婆娑) 이사금(A.D80~A.D112):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 살게 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제6대 지마(祗摩) 이사금(A.D112~A.D134):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王)
•제7대 일성(逸聖) 이사금(A.D134~A.D154):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제8대 아달라(阿達羅) 이사금(A.D154~A.D184):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 등 내치에 힘씀.
석씨 왕조
•제9대 벌휴(伐休) 이사금(A.D184~A.D196): 탈해왕의 손자
•제10대 나해(奈解) 이사금(A.D196~A.D230): 벌휴왕의 손자
•제11대 조분(助賁) 이사금(A.D230~A.D247): 벌휴왕의 손자. 제귀왕(諸貴王)
•제12대 첨해(沾解) 이사금(A.D247~A.D261):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김씨 왕조
•제13대 미추(味鄒) 이사금(A.D261~A.D284): 김씨 왕가의 시조.
석씨 왕조
•제14대 유례(儒禮) 이사금(A.D284~A.D298):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제15대 기림(基臨) 이사금(A.D298~A.D310):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고침.
•제16대 흘해(訖解) 이사금(A.D310~A.D356):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김씨 왕조
•제17대 내물 마립간(奈物 麻立干)(A.D356~A.D402):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王)이라고도 함.
•제18대 실성(實聖) 마립간(A.D402~A.D417):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訥祗)를 시기하여 죽이려하다가 도리어 피살됨.
•제19대 눌지(訥祗) 마립간(A.D417~A.D458):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 458년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제20대 자비(慈悲) 마립간(A.D458~A.D479): 왕 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羅濟)동맹을 맺음.
•제21대 소지(炤知) 마립간(A.D479~A.D500)
•제22대 지증(知證) 마립간(A.D500~A.D514): 휘는 지대로(知大路), 왕(王)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울릉도)을 점령함.
•제23대 법흥왕(法興王)(A.D514~A.D540): 휘는 원종(原宗). 51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함.
•제24대 진흥왕(眞興王)(A.D540~A.D576):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마운령 진흥왕순수비를 건립. 562년 대가야 멸망시킴.
•제25대 진지왕(眞智王)(A.D576~A.D579): 휘는 사륜(舍輪).
•제26대 진평왕(眞平王)(A.D579~A.D632): 휘는 백정(白淨).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A.D632~A.D647): 휘는 덕만(德蔓).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A.D647~A.D654): 휘는 승만(勝蔓).
중대. 김씨 왕조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A.D654~A.D661): 휘는 춘추(春秋). 백제를 멸망시킴.
제2부. 통일시대
(문무왕부터 제50대 정강왕까지)
•제30대 문무왕(文武王)(A.D661~A.D681):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제31대 신문왕(神文王)(A.D681~A.D692): 휘는 정명(政明),명지(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제32대 효소왕(孝昭王)(A.D692~A.D702):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제33대 성덕왕(聖德王)(A.D702~A.D737):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慧超)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제34대 효성왕(孝成王)(A.D737~A.D742):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아들.
•제35대 경덕왕(景德王)(A.D742~A.D765): 휘는 헌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를 창건.
•제36대 혜공왕(惠恭王)(A.D765~A.D780):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함.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聖德大王)신종(神鐘)을 주조.
하대. 김씨 왕조
•제37대 선덕왕(宣德王)(A.D780~A.D785):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제38대 원성왕(元聖王)(A.D785~A.D798):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 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 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제39대 소성왕(昭聖王)(A.D798~A.D800):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짐.
•제40대 애장왕(哀莊王)(A.D800~A.D809):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제41대 헌덕왕(憲德王)(A.D809~A.D826):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됨. 친당정책. 백영에 명하여 패강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제42대 흥덕왕(興德王)(A.D826~A.D836):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왕의 손자요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張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陵)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제43대 희강왕(僖康王)(A.D836~A.D838):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 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제44대 민애왕(閔哀王)(A.D838~A.D839):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金悌隆)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희강왕을 죽게 하고 왕이 됨.
•제45대 신무왕(神武王)(A.D839):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로 죽었다고 함.
•제46대 문성왕(文聖王)(A.D839~A.D857):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제47대 헌안왕(憲安王)(A.D857~A.D861):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줌.
•제48대 경문왕(景文王)(A.D861~A.D875): 휘는 응렴(膺廉)
•제49대 헌강왕(憲康王)(A.D875~A.D886):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제50대 정강왕(定康王)(A.D886~A.D887):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허약하여 즉위2년만에 죽음.
제3부. 후삼국시대
(제51대 진성여왕부터 제56대 경순왕까지)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A.D887~A.D897): 휘는 만(蔓).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제52대 효공왕(孝恭王)(A.D897~A.D912):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박씨 왕조
•제53대 신덕왕(神德王)(A.D912~A.D917):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제54대 경명왕(景明王)(A.D917~A.D924):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에 구원을 청했으나 실패.
•제55대 경애왕(景哀王)(A.D924~A.D927):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자살함.
김씨 왕조
•제56대 경순왕(敬順王)(A.D927~A.D935):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 후 화랑도의 영향으로 즉위했으나 935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