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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가족들이 TV 볼 때 대화가 없는 이유는?(강신주)
[강신주의 정치철학 특강 2부 ⑤, ⑥]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 테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게 우리가 보기에 노무현이 이겨야 하는 드라마, 구경거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투표하기 전에) 노무현 후보의 공약이 뭐였는지 다 아셨어요? 노무현 후보가 뭔가 괜찮은데 배신당하고 있다는 느낌과 정몽준 후보는 나쁜 사람 같다는 느낌과 예전의 청문회 이미지까지 더해져서 하나의 스타가 탄생했고 그 스타의 후광은 상당히 컸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는 굉장히 비판하잖아요. 노무현 대통령은 FTA를 체결하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안했어요. '그분께서 우리가 모를 깊은 뜻이 계세요'라고 생각했죠. 그런 점에서 노무현은 우리에게 스펙타클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 VS 철학>의 저자 강신주 박사는 프랑스의 사상가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 이론을 빌려 "스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러한 경향은 대의민주주의 정치부터 광고, 영화, 예술의 분야를 막론하고 적용되는 것"이라며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는 철학의 입장에서 20세기에 나온 가장 강렬한 책은 인간이 어떻게 스펙타클(구경거리)에 포획되어 있는지를 다룬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La Sociééu Spectacle>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 박사는 지난 3월 9일과 16일에 걸쳐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정치철학 특강-스펙타클 테제'라는 주제로 강의를 가졌다. 그는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교재로 진행된 강의에서 "현대 사회는 스펙타클(구경거리)이 지배하는 사회"라며 "지배 권력이 스펙타클을 통해 제공하는 이미지들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스펙타클'에 어떻게 지배당하고 있나
1967년에 발간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는 역사가 생긴 이래로 권력자들이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스펙타클(구경거리)을 활용해왔다는 내용의 테제(주장) 221개로 구성된 책이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기 드보르는 권력에게 개인의 시선을 빼앗는 도구로 사용되는 스펙타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면서 각각의 개인에게 주체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억압을 인식하고 극복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스펙타클은 무엇이고 개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강 박사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쓰인 '스펙타클'은 쉽게 말하면 '구경거리'"라며 '시선을 끌어 개인이 생각을 안 하게끔 만드는 볼거리나 이미지들'은 모두 스펙타클"이라고 설명했다. TV에 나오는 스타 연예인부터 유명한 정치인, 대의정치, 지적인 담론, 돈, 지식인까지 우리의 삶 주변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요소들은 모두가 스펙타클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스펙타클들이 우리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는 것. 그는 "기 드보르는 책을 통해 이 스펙타클들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나 삶을 대표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TV에서 게임 속 이미지에 익숙해진 아이 하나가 실수로 친구를 실제로 칼로 찌르는 장면이 CCTV에 잡힌 걸 봤습니다. 그 아이가 친구를 찌르더니 굉장히 놀라요. 찔린 아이 반응이 게임이랑 다르거든요. 시각적인 이미지, 스펙타클에 사로잡혔다는 의미는 이런 겁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거기 남자분. 옆에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대놓고 쳐다볼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하기 어렵죠? 그런데 TV에서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나온다고 상상해 보면 어때요? 대놓고 봐도 아무렇지도 않죠? 스펙타클의 여자는 쉬워요. 그래서 남자를 충족시켜 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 드보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경거리를 던져놓고 그걸 우리가 응시하면 그 구경거리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각인되고 우리의 행동까지도 결정한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이렇게 스펙타클에 갇혀있습니다."
강 박사는 "이러한 기 드보르의 비판은 사실 '표상(représentation)'에 대한 철학적 비판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어 'représentation'은 정치적으로는 대표나 대의제를 의미하고 인문학적으로는 '재현' 또는 '표상'으로 쓰인다. 결국 <스펙타클의 사회>는 어떤 실체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과연 그 실체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부터, 정치적으로 뽑힌 대표가 자신을 뽑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욕망을 제대로 대표하는지까지 포괄하는 넓은 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강 박사는 "자본주의가 선전하는 신상품들이나 스타들에 매료되는 사회, 주도적으로 정치적 신념을 표현하지 못하고 대표자들의 이야기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사회, 모든 사람들이 삶의 주인이 아니라 삶의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사회가 바로 스펙타클의 사회"라며 "권력에 의해 스펙타클이 활용되는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인간을 자신의 삶에 대한 구경꾼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스펙타클에 취해 있으면 자기의 제스처를 못내고 남의 제스처를 흉내냅니다. TV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뚱뚱한 거 보셨어요? 못 보셨죠? 왜 그럴까요? 우리는 그걸 흉내를 내요.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못 하고,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도 못 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어요. 이게 스펙타클의 사회예요. 이런 삶이 편한가요? 권력 혹은 자본이 매번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 때마다, 자신의 스타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광대처럼 살아가는 삶은 편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스펙타클의 또 다른 특징은 이미지와 표상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도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강 박사는 "스펙타클이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단절시킨다"고 지적했다.
"여러분들 저녁에 집에 가면 온 가족이 앉아 있죠. 대화합니까? TV를 끄면 어떻게 됩니까. 다 각자 방으로 가지요? 엄마는 사과 깎아서 옵니다. 하지만 대화는 없어요. 그러다 정전이 되면 어떤 기분 드시나요? 이제 뭘 해야 하나 싶어지지 않나요? 스펙타클은 이런 식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킵니다."
내가 뽑은 '대표', 과연 나를 대표할까?
그렇다면 권력이 스펙타클을 이용해서 개개인을 '구경꾼'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 박사는 "권력이 힘을 미치는 유일한 방법은 개인들이 연대하지 못하도록 분리하는 것"이라며 "유사 이래 권력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을 (저항하지 못하는) 관조적 주체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의 사활을 걸고 스펙타클을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강 박사는 정치적 스펙타클로서의 대표제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로마시대의 콜로세움이나 히틀러가 개최했던 올림픽, 거대한 쇼들 역시 스펙타클들"이라며 "히틀러 이후에 정치세력들은 누구나 히틀러 흉내를 내서 장엄하게 쇼를 연출하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끌 방법을 궁리한다"고 지적했다. 현대 정치에서 각 정당들이 여는 대규모 전당대회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정치적인 대표의 논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억압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며 프랑스의 68혁명을 예로 들었다.
"프랑스 68혁명은 드골 정부와 기득권 세력이 지향하던 경쟁 교육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 고등학생들이 합류했고 곧 노동자들도 총파업으로 합류했지요. 수많은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즐거운 노동, 즐거운 교육을 꿈꿨던 68혁명의 분위기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드골을 망명 직전까지 몰고 갈 정도로 강렬했지만 노동 총연맹이라는 좌파 연합과 프랑스 공산당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배신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프랑스 68혁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요, 특히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억압을 없애주겠다'고 말해왔던 프랑스 공산당이 결정적인 순간에 '억압받는 자들'을 배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강 박사는 "프랑스 공산당이 노동자를 배신했던 것은 '대표자'라는 자신들의 위치에 위기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들이 대표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억압을 극복하게 되면 그들에게 대표는 더 이상 필요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68혁명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1960년대 프랑스 내부에서 있었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운동(Situationist International, SI)이었습니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운동의 특징은 노동자든 학생이든 각자 주어진 상황에서 억압을 극복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대학생과 고등학생, 노동자가 한데 모일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큰 정치적 전복이 아니라 나한테 주어진 억압을 넘어서려고 했던 거지요. 기 드보르는 이 운동을 이끌었던 양대 사상가 중 하나입니다."
강 박사는 "<스펙타클의 사회>는 구경거리에 사로잡혀서 인간과 인간이 만나지 못하는 이야기"라며 "스펙타클의 구조는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 작동을 하는 것이고 우리가 권력과 자본에게서 억압받지 않으려면 활동하고 대화하고 연대하는 주체로 변화해야 한다는 통찰들이 기 드보르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들"이라고 말하며 강의를 마쳤다.
첫댓글 억압을 넘어서려!! 여기에 꽂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