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1. 이성계
정 성 삼
고려 지배층의 부패상이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달라도 현대 사회에서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은 OECD 34개 국 가운데 부패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지목받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는 개혁과 혁신이다. 개혁과 혁신은 위정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새로워지고자 하는 자각과 이를 실천하려는 행동윤리가 필요한 시대이다.
1392년 7월, 고려 공양왕이 34왕(王), 475년간 이어온 나라를 왜 이성계에게 넘겨주고 멸망했는가? 고려를 망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신라천년 후, 48년간의 후삼국시대가 열려 치열한 경쟁을 통해 918년 6월 왕건이 고려를 세웠는데 조선은 고려 지배층의 부정부패로 인한 사회적 변화가 새왕조를 열었다.
조준의 토지개혁 상소문에 의하면 “고려 백성들은 송곳 하나 꽂을 곳이 없다.”고 했다. 권문세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농토의 경계가 강이나 산으로 그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세도가들이 경제권력을 상징하는 넓은 농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지방탐관오리들이 중앙에 벼슬이 높고 권세있는 세도가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착취한 부정부패로 얻은 것이다. 결국 백성들이 먹고사는 토지문제가 고려왕조의 중심인 왕권을 무너뜨리게 하는 요인이 되어 새왕조, 곧 조선이 들어서게 된 원인(遠因)이 되었다. 게다가 백성들은 몽골의 영웅인 징키츠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 세운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왔고, 잦은 왜구칩입으로 전쟁의 고통과 그로 인한 나라의 혼란이 가중되어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시중에는 신라 도선의 도참설인 “이씨 성씨를 가진 사람이 임금이 된다.”는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이 나돌고 있었다. 이성계도 ‘서까래 셋’을 등에 지고 산을 오르는 꿈을 꾸고 무학대사에게 해몽을 부탁했는데 무학대사가 “당신이 임금이 된다.”는 말에 자신을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성계 자신도“이씨 성씨를 가진 사람이 임금이 된다는 여론의 중심에 선 사람이 누구일까?”‘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원나라가 명나라로 버뀔 때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주원장이 한족(漢族)을 규합하여 명나라를 세우고 원나라를 중원 북쪽으로 몰아내고 있을 때 공민왕은 원나라로부터 독립하려는 정책을 펴나갔다.
이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가 함흥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쌍성총관부 관리로 있었는데 고려출신들을 차별하자 공민왕을 도와서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고 99년 만에 고려 옛땅인 지금의 강원도 안변지방 철령 이북 땅을 되찾는데 기여했다. 이자춘은 그 공으로 개경(개성)에 들어갔으나, 1356년 함경남도와 강원 북부지역인 삭방도 만호(만 가구를 다스리는 관리)겸 병마사라는 벼슬을 받고 동북면으로 돌아갔는데 4년 후 1360년 병사하자 이성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로강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처할 때 제일 먼저 입성하여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원나라가 고려에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되찾기 위해 여진족 출신 나하추로 하여금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과 홍원 지역으로 쳐들어오자 고려 조정에서 동북면 도지휘사 정휘를 보내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패하자 다시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적을 물리쳤다.
한반도에서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아 민생고가 겹쳐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이성계는 아버지를 따라 1356년 21세 때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에 참전한 이후로 53세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년 간을 전쟁터에서 적을 맞아 싸웠으나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맹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성계는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벼슬이 올라가 마침내 위화도회군의 성공으로 부수상격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조선개국의 단초가 된 위화도회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신흥국가인 명나라 임금 주원장이 “원나라가 철령 이북 땅을 다스렸으니 당연히 그 땅은 우리가 다스려야 한다. 고려가 그 땅을 내놓지 않으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겠다.”고 하자, 우왕은 총리에 해당하는 문하시중 최영의‘요동선제공격론’을 받아들여 요동정벌에 나선다. 사령관 팔도도통사 최영,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를 임명하고 1388년 4월에 출병하여 5월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 5만 군사가 머물며 요동공격을 엿보고 있었다. 마침 장마로 압록강 강물이 불어나 병사들이 섬에 갇히자 이성계는 급히 우왕에게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리는 것이 옳지 않다. 둘째,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다. 셋째, 요동공격의 틈을 타 남쪽에서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크다.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와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으며,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철수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쳐들어가 궁궐을 지키고 있던 최영을 제압하고 고양으로 유배시켰다가 처형하였고 우왕도 폐위하여 강화도로 유배시켰다.
이성계는 삼봉 정도전을 대사성에 천거하고 조민수와 함께 세운 우왕의 아들 창왕을 정몽주·정도전·남은·조준 등이 왕씨(王氏)가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고 하는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우다)을 내세워 폐위시키고 20대 신종의 7세손 정창군이 마지막 공양왕으로 옹립되었으나 창왕 폐위를 반대한 조민수의 과거 행적을 들춰내어 강력하게 비판하고 유배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성계는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새시대를 열어갈 지도자상을 보여주고 마침내 군왕(君王)이 되는 길을 열었다.
이때 조정에서 이색과 정몽주는 고려사회를 개혁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온건파이고, 정도전·남은·조준 등은 개혁 급진파이다.
급진파들은“나라의 임금이 임금노릇 못하면 임금 자리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임금을 세운다.”는 맹자의 혁명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고, 이 역성혁명(易姓革命)사상은 중국에서 나라가 자주 바뀌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맹자」 서적을 금서로 지정한 적이 있으나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맹자의 혁명론이 우세하여 드디어 새로운 나라를 열게 되었다. 정몽주는 공양왕의 스승이 되어 정사를 보좌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공양왕의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낙마하여 크게 다쳤다는 말을 듣고 정몽주가 대간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조준 등을 탄핵하고 그들을 유배시켰다.
이성계의 조카사위 변중량이 스승 정몽주에게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의 병문안을 만류했다.
“지금 이방원 일당이 선생님을 죽이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정몽주는 제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성계의 집으로 갔다. 정몽주를 맞은 이성계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성계는 정몽주가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성미 급한 방원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가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사주로 조영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성계는 정몽주가 피살당했다는 말을 듣고 방원을 질책했다고 한다. 이성계는 정몽주와의 인연이 남달랐다. 홍건적을 맞아 싸울 때나 왜적을 물리칠 때 정몽주가 부원수로 함께 하여 개인적인 인연을 맺어 왔다. 포은은 31세 때 스승 목은으로부터 동방이학조(東方理學祖)라는 말을 들은 성리학자이다.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본 하여가(何如歌)와 이에 답한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는 후세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왔다.
何如歌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此亦何如 彼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우리도 다 같이 얽어져서 백년까지 하리라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丹心歌 정몽주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임향한 일편단심가실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방원은“고려면 어떻고 조선이면 어떻냐, 우리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함께 하자.”라고 정몽주를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고려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충성심을 드러내었다.
포은은 피살된 후 역적으로 몰렸다가 10년이 지난 태종 원년에 양촌 권근이 태종에게 “포은 같은 사람을 역적이라 한다면 누가 조선을 위해 충성을 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태종은 포은을 영의정부사로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세종 때 자식이 부모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의 효자, 충신, 열녀들의 사례를 그림과 이를 칭송하는 시로 엮은 「삼강행실도」를 편찬했다. 이 책은 성리학적 사회윤리서이다.
세종은 정몽주를 삼강행실도 충신전에 그의 충절을 기록하고 문종은 문묘에 종사케 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충절이었지만 조선 선비들에게도 충절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오백년 조선의 역사를 유지해 나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드디어 이성계가 58세 때 위화도회군 4년만에 1392년7월 17일 개경 수창궁에서 백관들의 추대로 고려왕에 올랐다.
임금자리에 오를 때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선언하였으나 새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국호와 도읍지, 그리고 국가체제를 바꿔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