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식탁 누가복음 19장 1-9절
살아있다는 건 늘 신비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건 변화하고 움직입니다. 변화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건 모두 죽은 것뿐입니다. 동녘이 몸을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백석과
풍동에서는 도서관과 지역아동센터의 몸을 입었었고 행신에서는 수학카페와 연대를 했었고 다양한 부서를 조직해서 생명평화 연대의 길을 함께 했었습니다. 이제는 공동체운동과 지역공동체와 다음세대 동녘 신앙인들을 위해 새로운 몸을 입었습니다.
저희가 비전토의를 하면서 이를 위한 3단계의 과제를 설정했었죠. 건물을 안정화 시키고지역을 위한 일들을
모색하고 장기적으로 지역안에서 생활속에 뿌리 내리는 신앙공동체로써의 길들을 열어가자 했습니다. 이제
그 1단계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과히 하느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 대한 일들은 먼훗날 이야기꺼리로 남겨두구요. 이 일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신 모든 분들 특별히 이 일의 재정적인 부분을 기획하고 방법을 제시하고 실제 될
수 있도록 추진해 나가신 재정위원회 분들 그리고 불철주야로 공간을 탐색하고 직접 많은 곳들을 가보시고 이렇게 좋은 곳을 잘 찾아주신 공간 위원회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가장 앞에서 진두지휘하시면서 추진해 주신 오광식 집사님, 그리고 이일들을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함께 이룬 여러분 모두, 여러분들을 통해 마음주시고 역사하시고 일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이 공간에서 드리는 첫 예배입니다. 공간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의도했던 것들도 있고 은총의 선물인 것들도 있습니다.
이 공간의 특징! 거의
모두가 친환경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최윤정 집사님이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새집에 들어가
살면 새집 중후군에 시달리신데요. 그래서 교회 새로 인테리어하면 그 냄새 빠질때까지 한 1년 정도 교회 쉬었다 나오려고 하셨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친환경적인
재료로 했어요. 소가 뒷거름치다가 쥐밟았어요. 원래부터 그럴
계획은 없었어요. 왜냐하면 친환경적인 재료를 쓰면 인테리어 비용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테리어는 하긴 해야하는데 돈은 없고 그래서 후배 목사님이 손수 인테리어를 하신다기에 이 돈밖에 없으니
이 비용에 맞춰서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했어요. 사실 말도 안되는 돈인데 해보시겠데요. 그리고 최선을 다하셨어요. 그래서 공사가 70%선에서 마쳐졌어요. 맘에 안드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몸으로 때우시면
됩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30%의 묘미도 있어야지요.
그때 그분이 그러시더라구요. 제가 2-30년동안 이런 저런 재료 다써보면서 집을 지어봤지만 사람이
살집인데 아무거나 쓸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7년전부터는
친환경적인 나무재료 아니고는 인테리어를 잘 하질 않는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걸로 해주면 교인들도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친환경적인
것들을 좋아하니까 하느님이 그런 분을 붙여 주셨어요. 여러분 냄새 맡아보십시오. 나무 냄새가 납니다. 이놈들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없이 많은 나무들이 죽어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이놈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모듬어 안듯 우리들도 생명을 살려가는 생명의 일꾼으로 살아갑니다. 이게 이놈들에게 보답하는 길이예요. 어떤 채식주의자는 평소에는 고기를
안먹는데 누군가 고기를 남기면 먹는데요. 이 놈들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했는데 그걸 남기는 건 생명에
대한 모독이라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생명이 우리에게 무슨 일들을 했고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번에 함께 인테리어를 하시는 목사님도 처음에는 인체에 유해한 많은 것들을 건축자재로
쓰며 살아왔지만 오랫시간을 살아가시면서 크리스챤의 길을 걸러내신 거죠. 그 순수함을 보며 여전히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이 최첨단 자본주의의 시대 크리스챤의 길을 봅니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도 여전히 생명의 위한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는 한쪽 벽에 고정화된 강단이 없습니다. 우리가 쓰던 강단은 사람을 환대하는 문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이요 얼굴입니다. 강단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해 앉아있듯이 앉아 있지만 실제는 목사를 향해 앉아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목사를 향해 있으면서 하느님을 이미지화 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목사가 하느님 이미지화하고 목사를
맹목적으로 우상화하는 순간 그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목사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관계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여러분과 나 사이의
빛이요, 관계안에서 느끼는 사랑이요,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평화의 기운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두세사람이 모인 곳이라할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성찰이 있고 사랑이 있고 변화가 있고 생명이 있는
모든 곳이 교회요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강단은 이렇게 모인 회중의 가장 중심에 둡니다. 이제 동녘은 강단 없는
교회가 아닌 어느 곳이나 강단이 될 수 있는 교회를 지향합니다. 여기도 교회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어디에서든 촛불하나 켜두고, 성찰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묵주를 들고 평화의 기도를 드리고 존재의 신비를 더 깊이 느끼며,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촛불을 들고 더 큰 사랑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는 모든 곳은 교회요 우리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관계의 신비요, 사랑입니다.
또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앉아계신 곳을 잘 둘러보시면 다양한 색들이 발견될 것입니다. 천정은
녹색계통이 들어갔구요. 네기둥은 노랑계통, 푸른계통, 빨간계통, 보라계통이 들어갔습니다.
네 무지개 색깔이 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다양성을 상징합니다. 이 공간은 다양성이 숨쉬는 공간입니다. 다양성은 하느님이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수백만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공사를 하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의견을 묻지 말자! 그냥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자! 의견을 물으면 반드시 50대 50, 30대30대30으로
갈립니다. 냉장고를 사자고 하니까 반은 큰거고 반은 작은 거예요. 반은
양문형이고 반은 단문형이예요. 다 이유가 있어요. 다 맞아요. 강화마루를 깔까요를 가지고도 생각이 다 달라요. 그런데 들어보면
다 이유가 있어요. “이재완 집사님이 명언을 하시더라구요” 사람들이
다 자기 습관대로 결정을 하는 구나, 싱크대 뒷선반을 만들자 만들지 말자 만드는 분들은 늘 선반에 물건을
두고 살아오신 분들이예요. 습관이 그렇게 들어서 그게 편해요. 뒷선반
없이 늘 찬장에 넣다 뺏다하면서 썼던 분들은 습관이 그렇게 들어서 선반위에 지저분하게 있는 걸 싫어해요. 그렇게해서
만들어 놨더니 어제 불편하다고 다른쪽으로 옮겼어요. 습관에 따라 다 다른거예요. 다 답이예요. 그래도 이런 저런 이야기가 풍성하며 말많은 결정의
과정들이 좋았습니다.
다양한 빛깔의 사람들,
성향들의 사람, 성격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면서 건강하게 공존하는 사회가
아름답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개인적으로는 종교가 하나인것이 맞지만 사회적으로는 종교가 다양한 사회가
건강하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 성평등위에서 준비한 이야기들을 대하는 동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동녘의 힘이라 생각했습니다. 세대가 다르고 그 다른 언어의 감각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힘들수도 있고 맘에 안들수도 있습니다. 성인들이 앉아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남자들이 앉아서 여성들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실 보기 드문현상들입니다. 그러나 동녘인들은 열려있고 소통하려고
하고 맘에 들든 들지 않든 공동체안의 다양한 목소리, 특히 약자의 목소리에 마음문을 열고 들으려고 합니다. 동녘의 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배우고 경청하려는
공동체에 독재와 폭력이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동녘은 하느님의
얼굴은 하나의 모습이 아님을 알기에 이 공간에서도 늘 겸손히 경청하며 배우며 누구든 환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환대입니다. 이곳에서의
공간 미학의 종결자는 무엇일까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환대의
식탁입니다. 주일에는 성만찬 상이 될 것이고, 새신자가 오면
이곳에 초대되어 환대받을 것이고 평일에는 누구가와 함께 환대의 잔치를 나눌 환대의 식탁입니다. 팀장
목사님께서 집에 계신 원목 큰 것으로 만들어주신다고 했어요. 선물이래요. 예수 운동의 가장 핵심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선택하며 살았던 삶의 결과로 인하여 감당해야할 것이었지 예수목회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목회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잔치였습니다. 부자만, 가진 자만
스스로 죄없다 여기며 살아가는 자들만 잔치하고 춤추며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병자도 기득권자들에게 죄인이라 낙인찍혀 살아가는 사람들도 축제하고 환대받고 스스로 인생을 가치있게
느끼며 춤추며 잔치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즐거운 축제는 가진자들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상징물은 사실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의
식탁이어야 합니다. 환대의 식탁은 능곡시대의 목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 한사람 한사람 이 환대의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이 동네에
부모없는 친구들도 이곳으로 초대합니다. 동녘이 이 친구들의 부모가 될 것입니다. 이 지역사회에서 건강한 시민사회를 꿈꾸며 열심히 일하는 분들도 이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도 듣고 함께 연대와 사랑의 길도 모색합니다. 일끝나고
혼자 밥먹기 싫은 사람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빼구요.
하나님이 이일을 할줄 알고 전통재래시장 앞으로 딱 자리를
주셨어요. 지나고 보니 우리의 선한 뜻과 그분의 인도하심이 어우러져 이 공간이 은총으로 주어졌네요. 서정윤 시인은 사랑이란 새의 날개를 꺽어 자기 곁에 두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휴식을 취한뒤 자유롭게 날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환대는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친 영혼이 힘을 얻고 자신의 자리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자기 혁명을 완성할 수 있는 힘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자기 자신안에 있는 신비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우리는 참 자신다운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삭개오 안에도 변화의 힘이 있었습니다. 내제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지위,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들에 가려 안보였을 뿐이지 그안에도
내제된 신비와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향한 지극한 환대는 내면 깊숙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힘이 있습니다.
공간의 미학이 우리의 삶이 되고 사랑이 되고 신앙이되고
대동세상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루는 세상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