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9월 28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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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3-45)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 양
수난의 신비를 예시하는 또 다른 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숫염소 두 마리를 제물로 마련해야 했는데, 크기와 모양이 서로 비슷해야 했습니다(레위 16,7-8 참조). 한 마리에는 ‘주님’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다른 한 마리에는 ‘아자젤’(들판을 헤매고 떠돌아다님)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제비를 뽑아 ‘주님’ 몫으로 결정된 염소는 희생 제물로 바치고 다른 염소는 광야로 보냅니다. 그래서 마자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나타냅니까?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죄인인 우리 모습을 하셨던 ‘말씀’이지요. 숫염소나 암염소가 우리의 속죄를 위한 제물로 희생되었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광야였지요. 죄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 아래로 떨어진 우리였으니까요. 우리를 죽음과 멸망에서 떠나보내시려고 그 책임을 몸소 지러 나서신 만유의 구원자께서는 우리 몫의 운명을 당신에게 지우시어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이 뜻하셔서 흘러 나왔습니다. 내가 오로지 하느님의 선만을 바란다면, 나의 이러한 뜻은 더없이 고귀해질 것이고, 그러면 성령께서 곧바로 흘러 나올 것입니다. 선한 모든 것은 흘러 념치는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 나옵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러한 일치 속에서만 내게 단맛이 납니다. 그러한 일치 속에서 하느님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의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거기에서만 이러한 선과, 존재와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이 쉼을 얻습니다. 이때의 쉼은 마치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쉼입니다. 그곳이야말로 여러분이 성령을 사랑할 자리입니다. 성령은 자신 안에 있지 않고, 일치 속에 있습니다. 성령은 일치 속에서만 선하신 하느님의 맛을 냅니다. 일치 속에서만 모든 선은 흘러 넘치는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 나옵니다. 그러한 사람은 밖으로 나갔을 때보다 “더 부유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난 자들은 훨씬 참된 의미의 자기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잡한 모든 것을 버립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언제나 단순하게 되어서 그들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과 모든 것이 지금의 일치 속에 있음을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밖으로 나갔을 때보다 더 고귀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유와 완전한 빔(空) 속에서 살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간에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가지겠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249)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9월 4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루카 22-24장 / 1코린 1-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천부경(天符經)을 인용해 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고 본다. 천부경은 고대 환국(桓國) 시대부터 구두로 전승해 오던 경전인데, 현덕이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신지에 전서(篆書)로 쓰여 있는 옛 비석을 보고 최치원이 81자의 한문으로 옮겼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민족 사상의 뿌리로서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다. 그 전문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하나(一)로 비롯하되 하나로 시작한 데는 없고, 삼극(三極)을 분석해도 근본은 다힘이 없도다. 하늘은 하나로되 첫 번째요, 땅은 하나로되 두 번째요, 사람도 하나로되 세 번째라. 하나가 쌓여 열도 오가니 삼극의 조화는 어그러짐이 없도다. 하늘에도 둘(陰陽)이 있고 셋(三極)이 있으며, 땅에도 둘(剛柔)이 있고 셋(三極)이 있으며 , 사람에도 둘(仁義)이 있고 셋이 있나니, 큰 셋을 합하면 육이 되어 칠 팔 구를 낳고, 삼(三)과 사(四)로 운행하며 오(五)와 칠(七)로 고리 이루느니라. 하나(一)가 오묘히 커져 만(萬)이 되어 가고 만(萬)이 되어 오나니, 쓰임(用)은 변이.되 본체(本)는 움직이지 않도다. 사람의 본심이 태양의 밝은 데 근본하니, 사람이 하늘 땅과 같이 그 가운데 있도다. 하나로 마치되 하나로 맺어진 데가 없도다.”(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