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뜻 읽기 / 마가복음 1장 29-31절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하늘 뜻 펴기 / 나의 걸음
먼저, 이 자리에 앉은 제 마음에 대해서 먼저 털어놓고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는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고민은 ‘주일에 뭘 입어야 하지?’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물론 간간히 설교에 대한 고민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저는 교복을 잘 안 입는 청소년이었습니다. 대단한 반항심에 그랬던 것은 아니고, 교복이 너무 작았기 때문입니다. 덩치도 작은 녀석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여학생의 교복은 원래가 그런 것입니다. 교복 블라우스가 이미 교복 회사에서 나올 때부터 허리를 잘록하게 패이게 만들고 단이 짧아서 제 사이즈를 입어도 묘하게 끼고 불편했습니다. 그렇다고 큰 치수를 입으면 정말 남의 옷을 훔쳐 입은 모양새였고요. 애초에 허리를 왜 잘록하게 만드는지 제 스타일하고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점심시간 마다 학교 선생님들과 농구를 하는 낙으로 살았기 때문에 만세를 하기에도 불편한 교복 블라우스는 정말 질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오늘 아침에는 차라리 교복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이게 다 김경환 목사님 때문입니다.
교육부서에 있으면, “우리 승우가 자꾸 로케트를 태워달라고 해요.” 라는 말을 핑계 삼아 후드티에 츄리닝 바지를 입어도 부끄럽지 않았는데, 어쩐지 주일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니, 그래도 셔츠는 입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렇게나 보수적입니다. 그래서 괜히 주중에 사무실에 계시는 하 목사님을 붙잡고, “교수님, 교수님은 주일에 뭐 입으세요?” 이런 걸 묻지 않았겠습니까. 하 목사님은 로만칼라를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도 목사의 유니폼이니까요.
저는 제 스스로에게 “이 시간은 ‘김유미’의 시간이 아니야. 정신 차려야 해!” 일러주는 복장, 그러니까 저만의 교복, 저만의 로만칼라, 저만의 유니폼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성 수트, 여자 정장, 따위의 검색어로 온라인 쇼핑몰을 수도 없이 검색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이거 조금 멋진데 싶은 옷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 내지는 세 배가 비쌌습니다. 어떤 옷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0이 하나 더 붙은 옷도 있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누가 이렇게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거죠?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대신에 스톨을 매기로 했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이건, 제가 제게 울리는 종소리 같은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내 생각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다. 하늘의 뜻을 나누는 자리다. 제가 잘 하기 위해서 선택한 복장입니다.
잘 해보겠다고 용을 쓰겠지만, 사실 저는 압니다. 여러분은 제게 실망을 하실 겁니다. 여러분이 제게 무엇을 기대하시든 저는 그것보다 못 할 겁니다. 제가 아무렴 잘 하려 노력해도 김경환 목사님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사실 그것보다 잘해도 문제입니다. 때때로 저는 바보 같은 말이나 행동으로 여러분을 골치 아프게 할지도 모릅니다.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괜찮다는 것을 압니다. 사실을 그렇기에 안식년을 보내시겠다 말씀하신 목사님 뜻에 따를 수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괜찮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경험한 하느님은 모자란 사람으로 하느님 나라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재주로 제 빈틈을 메꾸시는지 여러분과 제가 그 신비를 경험할 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모자란 사람이지만 여러분과 제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은 그 모자란 부분을 기가 막히게 채우실 겁니다. 우리는 그 신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보냅시다.
오늘 우리가 나누어 읽은 하늘 뜻 이야기는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치유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시몬의 장모를 낫게 했습니다. 성서에서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았다고 했지요, 그런데 시몬의 장모는 왜 아팠던 걸까요? 강일상 목사는 자신의 책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합니다. 장모가 열병이 난 이유가 다름 아닌 사위인 시몬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잘 떠올려보십시오. 시몬이 어떻게 예수를 따르게 되었나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어부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씀 한 마디에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시몬의 장모 입장에 본다면 어떨까요? 잠시 상상을 해봅시다.
그러니까 우리 딸래미 남편이, 사위가, 갑자기 낚시 동호회를 가입하더니 잘 다니던 직장도 때려 치우고, 사람을 낚겠다고 동네방네 설치고 다니는 거예요. 기가 막히죠. 지금 당장 이혼을 해도 모자를 판에 사위라는 놈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자기 동호회 회장을 집으로 데리고 온 거예요. 화병이 안 날래야 안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강일상 목사는 장모의 열병을 화병으로 보았습니다. 재미있고 그럴 듯한 해석 아닌가요?
“화가 났다”는 말에는 감추어진 속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 화가 났는지를 곰곰이 따져보다 보면 그것은 내 불안에서 시작되는 감정일 때도 있고, 내 이전 경험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또 어느 때는 사랑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장모가 정말 시몬 때문에 화가 난 것이었다면, 그 화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요?
딸에 대한 걱정이겠지요. 우리 딸이 괜찮을까? 우리 딸이 남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뒷모습도 바라보지 못하고 외롭게 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고, 속이 상하는 것이겠지요. 내 자식이 남들보다 잘 사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남들만큼은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것도 못하나 내 사위는 왜 이렇게 유난이고 유별일까- 하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팔자타령도 나올 겁니다. 전생을 들먹일 수도 있고요. 무자식이 상팔자라드만 틀린 말 하나 없다.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인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나. 이런 말을 중얼중얼 하며 머리에 띠를 두르고 누운 것일 겁니다.
여러분은 이럴 때, 시몬의 장모에게 무어라 말할 수 있겠나요? 저는 아직 자식이 없어서 (딱 보시기에도 그렇죠?) 그리고 제 친구들도 대부분 아직 자식이 없어서 (아마도 그렇겠죠?)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해본 적도,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해본 적도 없지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나라면 결국엔 “네 딸이 많이 컸다”라는 말을 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못된 친구인가요? 하지만 결국 그가 들어야 할 말일 겁니다. “딸의 삶이다. 사위의 삶이다. 네가 걱정을 해서 될 것이 아니다. 이혼을 해도 네 딸이 하고, 참고 살아도 네 딸이 하고, 남편을 설득하고 고쳐 쓰는 것도 네 딸이 할 일이다. 마음이 쓰여도 어쩔 수 없다.” 그런 말 말고는 사실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장모의 두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저는 종종 성서의 장면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 먼저 이 장면을 상상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제임스 티소트의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다>라는 그림에서 예수는 주저 앉은 시몬의 장모 두 팔을 아래에서 받칩니다. 손을 잡아 끄는 것이 아니라 손을 받친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의 손이 장모의 손과 맞닿아 있는데 그 아래에 있습니다. 예수가 장모를 잡아 끈 것이라면 예수의 손은 장모의 손 위에 가야겠고, 예수가 장모를 번쩍 든 것이었다면 장모의 겨드랑이에 손이 가야합니다. 예수는 장모를 받치기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장모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부축만 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는 시몬의 장모에게 이런 말을 건넨 것이 아니었을까요. “너는 일어설 힘이 있다. 너는 그 힘으로 네 걸음을 걸어야 한다.” 예수는 저처럼 못된 친구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딸의 일은 네 일이 아니다. 딸의 걸음은 딸이 걸을 것이다. 너는 너의 걸음을 걸어야 한다.”
성서가 쓰인 시대에 병 고침은 단순히 병을 낫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당시의 병을 앓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버려졌습니다. 의학적 지식이 많이 부족했던 시대였기에 전염병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병이 깊어지면 전염이 될까 마을에서 버려지는 일도 흔했습니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다시금 그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람으로서 살게 하는 일입니다. 그에게 그의 삶을 다시 돌려주는 것이지요. 예수의 치유 사역은 삶에 대해 일깨워주는 일입니다. 장모는 예수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는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의 열병은 가라앉고, 시몬과 예수의 시중을 들었다 나옵니다. 예수는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는 그의 삶을 살아라 했을 뿐인데, 장모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시중을 든 것입니다.
어떻게 읽으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왜 장모의 걸음은 그 사위의 시중일까요? 장모가 나서서 사람을 낚는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사위가 그런 장모님의 시중을 들어서는 안 되는 걸까요?
헌데 또 한편으로는 사람 낚는 일이나 시중이나 크고 중한 것이 따로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러 이 땅으로 왔고, 또 모든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의 선택과 시몬 장모의 선택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이어 듭니다.
시몬의 장모는 섬기기를 선택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섬김은 예수가 전하려는 복음의 시작이자 선포입니다. 시몬의 장모는 (이쯤 되니 제가 그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참 슬픕니다.) 자신의 모든 염려와 걱정을 뒤로 하고 예수와 가까워졌습니다. 그는 비로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걸음은 어디로 향해 가십니까? 예수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는 그 때에 여러분은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바라건대 저는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을 따라 갔으면 좋겠습니다. 주저 앉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또 시몬의 장모처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감당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