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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한다. 인터뷰(김준희)
*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한다.
인터뷰대상 : 작가.
작품을 읽고 난 뒤에 다시 한 번 그 작품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막 작품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너무나 원대해서 다듬지 않으면 어디론가 슬금슬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각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호감이나 반감이 들어도 그 때 그 때 생각을 정리해 두지 않으면 읽기 전과 다를 바 없어, 소설을 쓴 작가를 무시하는 일이라 생각해왔다. 이번 작품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를 읽고 나서도 이런 작업을 거치고 어떤 인물에 관해 인터뷰를 할지 고민했다. 1시간 동안이나 고민한 끝에 임씨도, 그도, 아내도 모두 버릴 수 없는 캐릭터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존재에 관해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이 작품을 구상하고 쓴 양귀자, 바로 작가였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무척이나 추적추적했다. 땅은 비온 뒤 굳지 않아 질었고 새로 산 구두에 질척하게 묻었다. 그래도 날씨만은 환하게 빛나 위로가 되었다. 양귀자씨를 만나기로 한 곳은 사람이 많이 없는 푸른 녹음이 가득한 한적한 오후의 공원이었다. 빗방울에 젖어 반짝이는 잎사귀가 그녀가 추천한 장소를 빛내주고 있었다. 아아, 그래 정말로 아름다워서 그녀에게 감사했다. 10분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나무 벤치에 기대 그녀에게 던질 질문을 정리해보았다. 이윽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양귀자씨가 등장했다. 소박한 웃음을 지으며 내 옆에 앉은 그녀는 자신을 인터뷰대상으로 삼아주어 고맙다고 인사부터 했다.
나는 아니 뭘요, 라고 대답하곤 인터뷰를 시작했다. 작품을 읽으며 궁금했던 점에 관해.
#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무척 긴 제목이네요. 마치 영화 제목 같아요. 이런 특이한 제목을 설정하신 이유는요?
→ "원미동사람들"은 아시다시피 단편집입니다. 원미동이라는 작지만 구체적인, 작은 도시의 소시민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담으려 애썼습니다. 이 작품에서 저는 "그"를 내세우고 주인공인 임씨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둘은 무척 다른 사회적 위치에 서 있지만 살기가 고달프다라는 점에서 통하게 되고 정신적 친구가 되갑니다. 살기가 고달프다…라, 인생이 영화 같다는 생각 안하세요? 전 많이 하는데, 우리 각자의 삶이 고달프고, 때론 즐겁기도 하면서 엄청엄청 스펙타클 하다는 걸요- 소설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 제목이다-라고 하여 저런 거창한 제목을 걸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들추어 보면 빚 받으러 가리봉동에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시겠어요? 인생의 한 비극적이라고 볼 수 도 있는 사건을 저런 영화 같은 화려한 제목으로 포장하고 있는 거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임씨는 마치 자신과는 동떨어진 영화, 먼 일이라고 자위하며 인생의 비극을 애써 덤덤하게 바라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우리 사회의 대부분 이라는 것이죠.
# 그는 마치 제 자신을 보는 듯 했습니다. 오십 보 백 보의 인생에서 남을 비웃는 다는 것이. 아, 물론 초기에만요. 그의 허영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 그런 부류 있죠, 남을 방패삼아 자신을 띄우지 않으면 자신도 더럽게 섞일까봐 허영심을 쌓는 자들. 하지만 이들은 실은 그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소심한 자들이에요. 사회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 배부르려는 자들. 어찌 보면 한 없이 불쌍하죠. 그가 스스로를 높게 보려고 하는 장면은 구석구석 작품 속에 녹아있습니다. 임씨의 일을 단순한 육체노동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임씨를 도와 일하는 젊은 인부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라든지. 그는 서울에서, 임 씨 같은 단순한 육체노동자들도 거주하는 그곳에서 쫓겨난 것이 서러웠겠죠. 기껏 마련한 "내 집"은 여러 공사로 속을 꽤나 썩이고… 그는 그 모든 시련을 허영심으로 버텨내려 한 것이지요.
# 그는 왜 사장님이라는 칭호를 민망스러워 하나요?
→ 그는 원래 소심합니다.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어서 그렇지…
그리고 그도 자신이 "사장"으로 불릴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죠.
이런 해석이 아니고도, 임씨 따위에게 사장으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아서 일 수 도 있구요. 또한 후에 그가 임씨에게 끌리고 난 후에는 임씨라는 된 사람에게 그런 명예로만 추잡하게 덥혀진 그 칭호로 불리는 것이 황송해서, 일 수도 있구요.
# 임씨는 처음에 뽑았던 견적 18만원에서 실제로 작업하고 나니 돈이 적게 들어 7만원만 받습니다. 집이 가난할 텐데 어째서 지요?
→ 임씨는 무척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돈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리긴 하지만 돈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임씨는 원미동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소시민들 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양심적이게 될 수 밖에요. 바보같이 정도 많아요. 가리봉동에 빛을 받으러 가서도 그 공장 사장의 말에 어설픈 동정심을 갖고 말아요. 그래서 어눌하게 있다가 결국은 빛도 못 받고 말죠. 다음에는 꼭, 다음에는 꼭이라지만. 그는 물러 터졌어요. 그래가지곤 언제나 제자리걸음일 텐데… 가진 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게 익숙해져가는 만큼 그의 인생도 깎여가고 있을 텐데… 임씨는 하염없이 세상에 약해져가는 거죠.
# 작품의 초반부분과 후반 부분에 등장하며 음울한 분위기를 뿌리며 나타나는 으악새 할아버지는 어떤 의미인가요?
→ 아아, 으악새 할아버지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의미심장하죠. 글쎄, 처음에는 요즈음의 큰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노인문제에 관하여 적고 싶었습니다. 원미동이 그렇듯이 으악새 할아버지도 노인, 그중에서도 독거노인의 대표적인물입니다. 홀로 외롭게 살면서 "으악 으악"하는 괴로운 소리를 내뱉는 이름 모를 병을 앓고 있지요. 주변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고독한 노인이죠. 저는 으악새 할아버지를 작품의 초반 그리고 결말 부분에 등장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나중에 임씨가 옥상을 고쳐 준다는 것의 복선을 깔기 위해 등장했었습니다만 그것이 으악새 할아버지의 등장 의미의 전부는 아니죠.
"그"의 성격을 은근슬쩍 들춰 보여주기도 하였고, 젊은 사람들에게서 은근히 무시 받는 으악새 할아버지에게서 안쓰러움을 느끼게 하는 거죠. 장차 우리가 커서 지탱 할 곳 없는 노인이 되면 언젠가 저리 되지 않을까 하는 안쓰러움을. 그것은 우리의 얼굴에 닿아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단편집 "나무"중 "황혼의 반란"에서 보면 미래 사회에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노인들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말이죠. 우리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는 것 입니다.
# 소설의 배경이 광복절이네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해방된 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둘로 나뉘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요. 처음은 하나였지만 끝은 둘…인 셈이지요. 우리나라 사회를 보면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가진 자는 계속 가지게 되고 못가진 자는 점점 더 약해져 가는 사회풍조. 공장을 차린 사람과 임씨 둘은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와 임씨도 다른 위치에 서 있잖아요? 아무튼 우리 사회는 속을 파헤쳐 보면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단결도 안 되고. 이런 상징의 광복절이 끝나가면서 임씨와 그는 서서히 동화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본질적으로 같아져 가는 거죠.
# 임씨는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왜 질이 좋지 않은 젊은 인부를 데리고 다니는 겁니까?
→ 임씨는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거의 모든 잡일들을 조금씩 조금씩 손 데 보았다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줄 아시나요? 바로 임씨의 직업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이지요. 반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님 혹은 주변의 따스함 속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임씨처럼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 반대구요. 아마도 그는 자신의 그 나잇적 생활과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인부가 안타까웠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바로 잡아 주고 싶었겠지요. 그리고 정을 나눠 주고 싶었을 거예요. 그 애는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 당황스러워 더 툴툴 거리긴 하지만, 그가 임씨 곁에 아직 남아있는 걸 보면, 임씨가 싫지만은 아닌 거예요.
# 임씨는 옥상일을 돈도 받지 않고 서비스로 해주었잖아요. 돈도 안되는 일인데 그렇게 힘들여서 해줄 필요가 있었나요?
→ 임씨는 그의 아내의 못마땅함을 은근히 느끼고 있었을 겁니다. 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길러진 눈치는 보통이 아닐 걸요.(웃음) 처음에는 나중에 미안한 감정을 가져봐라 하는 오기로 시작했을겁니다. 그러다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고칠 곳 많은 집을 가진 그가 안쓰러웠겠죠. "같은 자식새끼들 가진 사람들끼리 뭐하는 짓이야, 이 사람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잖아." 라는 마음이 들었을 거에요. 그리고 까짓꺼 서비스로 해드린 다는 기분 좋은 임심으로 바뀌어 간 것이죠. 이런 인심 때문에, 어눌한 점 때문에 가리봉동에 가서도 빛도 받지 못하고 오는 건데… 조금 더 냉정해지면 좋으련만.
# 임씨는 가리봉동에 가서 빛을 받으면 고향에 가겠다고 하잖아요? 고향에 가도 딱히 방법이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는 왜 고향을 그리죠?
→ 원미동이 아니더라도, 그래 기자님의 동네인 목동을 예로 들어봅시다. 목동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서울 토박이인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아주 적을 겁니다. 다들 전라남도, 충청도, 경기도 등등의 지방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예요. 이들은 모두 도시로 나오면 어떻게 먹고 살 거리가 마련되지는 않을까 하고, 출세를 목적으로 올라왔을 겁니다. 그런데 정작 올라오고 나니까 고향이 그리워지는 거예요. 지독하게 말이에요. 임씨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고향의 따듯함이 그리워 진거지요. 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긁히고 긁히다 보니까. 고향은 그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어요. 그에게 고향의 이미지는 막연하게 아름다운 곳…
늙은 노모가 환하게 그를 반기는 편안한 보금자리…
성실한 인터뷰 감사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밥이나 사겠다는 그녀의 소박한 붙잡음을 인터뷰가 밀렸다는 말로 거절하고 나왔다. 날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별빛은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제의를 받아 들였으면 어떠했을까, 술에 젖은, 섬세한 타락을 거듭한 그녀가 있었을지도. 인간미가 가득한, 원미동같은.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한다" 영화같은 제목의 그 소설은 내면에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다. 의미의 심연은 너무 깊어 다 들추진 못했지만 약간은 알게 된 느낌이다. 현대 작가들의 소설은 주제가 너무 미약하다. 그러니까 거의 흥미위주의 말장난이 대부분이다. 처음 양귀자의 소설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탐구해보니 꼭 그렇지 만은 않았다. 찡~하고 팍! 다가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젖어 들어가는 느낌^^? 그래서 였나, 양귀자씨의 소박한 웃음이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 맴돌고 있었음은.
그와 나는 굉장히 비슷한 인물이다. 뛰어나게 잘난 것도 없으면서 남을 비웃는 다는 점이. 그리고 허영심으로만 가득차고, 실속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내 글은 그런 점을 비추고 있다. 현란한 어휘로 읽는 사람을 혼잡스럽게 만들어 버리고는 무작정 "좋은 글이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이런 단점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고쳐지지 않는다. 슬픈일이다(노력도 안하면서 무슨…) 아무튼 그래서 그의 심정에 이입되어 내가 정말로 주인공이 된 듯해서 나중에 임씨와 말을 트고 술을 마실 때는 눈물이 찔끔 흘렀다.
그래서 양귀자씨에게 임씨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었나보다.
미스테리 그 자체인 그의 험난한 삶이 궁금해서. 임씨도 나와 닮았다. 내일은 꼭! 하고 결심하고 막상 닥치면 우물우물 거절하지 못해 손해를 보는 점이. 한편으로는 그의 아내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한데…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닮아 있는가 보다. 한 소설에 나와 비슷한 인물이 이렇게나 많다니. 중3때 배운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를 몸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휴지로 구두에 묻은 흙을 떼어내며 생각했다. 양귀자씨가 이소설을 통해 나타내려고 한 주제는 무엇일까? 음, 뭐라 딱히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불신 없는 믿음의 이상향을 그리는 마음, 인가? 후후, 우리 부모님도 소시민중의 한 부분이다, 물론 나도. 그래서 원미동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원미동, 멀고도 아름다운. 이름 그대로의 하나의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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