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고산문학대상 자선 대표작>
칼 외 9편
정수자
야밤에 칼을 샀네, 비색에 홀려 들어
오늘의 운세 삼아 입술이나 대볼까
꿉꿉한 묵언 끌탕이나 채로 진탕 쳐볼까
직입은 똑 놓치면서 푸념만 후 늘어져도
대낮에 칼을 품고 나갈 일은 없을지니
쪼잔히 노염이나 썰어 바람길에 뿌려볼까
나아종*
무변의 밤을 긋는 별똥별의 한 획처럼
벼랑 끝 다다르면 한 홉의 숨을 모아
사, 랑, 해,
심장을 건네고 은하로 핀 메아리들……
* 김현승 시, 「눈물」에서.
가을의 밑줄
저녁을 일찍 하니 저녁이 길어졌다
외등도 조곤조곤 곁을 더 내주고
접어둔 갈피를 헤듯
책등들이 술렁였다
등불과 친해지면 말의 절도 잘 짓는지
하품 같은 농 끝에도 코가 쑥 빠지지만
저녁에 길게 들수록
행간은 더 붐비리
가을의 질문 같은 동네 책방 창문들도
길어진 모서리를 모과 모양 밝히고
누군가 밑줄을 긋다
별로 솟곤 하리라
윤슬 농현
보았는가, 저 꼼질은 틀림없는 물이렷다
다가서면 스러지는 모래 노래 아니라
사막 속 윤슬을 켜는 신의 미소 같은 것
무현無絃의 농현弄絃처럼 사물대는 물비늘들
가히 홀린 눈썹을 술대 삼는 신기루에
다저녁 물때를 놓치듯 버스도 지나칠 뻔!
잡아보려 다가서면 고만큼씩 멀어지던
시라는 술래 같은 아지랑이 멀미 속에
줄 없는 거문고 타듯 물의 율을 탐했네
사족蛇足
입술을 댈 듯 말 듯 서운히 보낸 어깨
돌아서고 나서야 없는 너를 만질 때
귓전에 연해 밟히는 중저음의 느린 여음
끝동을 길게 두다 서운해진 노을처럼
말 없는 말 그리며 사족사족 매만지네
자판에 자그락대는 자모음을 깨물어보듯
소년의 긴 손가락이
신전의 부조들을 아다지오로 쓸다 말고
하늘을 훅 그으니 별들이 쏟아졌다
나일강 만파를 고르듯
파피루스 잎을 타듯
피아노를 타고 놀던 파리한 손가락이
별 사이를 촉진하자 은파랑이 튀었다
콤옴보 신화를 토할 듯
열주들이 울렁였다
불러 봐 너의 별을, 은파 만파 지휘하듯
반달 깃든 손톱이 뱃전을 두드릴 때
누천년 사막 능선 켜온
달도 뺨을 붉혔다
뭉크는 아니지만
노을이 나만 위해 더 붉은 건 아니련만
뭉친 목 돌리다 지청구를 투둑 맞네
사는 게 모욕 같아도 뭉개면 또 사는 거라
절규도 급이 달라 뭉크급은 아니라서
변명 뭉치 속말이나 일껏 씹어보다
뜨거운 노을 끝물에 눈꺼풀을 데는 말복
손차양
손차양 모르고 산 엄마는 밭이 됐다
손차양 달고 산 언니도 서리 노을
그리다 못내 기다리다
기울어간 돌담마냥
꺼먼 흙 툭툭 떨구던 처마들이 시렸건만
돌아보면 저녁연기 밥내 솔솔 보내더니
다 떠난 산자락에는
타운하우스 차양 천지
묘도 밀고 들어선 혀 꼬이는 이름 너머
어디쯤 삭고 있나 노을 적신 휘파람은
속눈썹 연해 다듬던
아슴아슴 손차양은
허튼 여백
폐가의 펌프 같아
녹슨 목을 바쳐 봐도
율律은 안 오고 계절은 훅 가고
비릿한 귓전 가득히
파쇄들만 서걱서걱
가위눌린 천지간에
눈먼 바람 삭는 소리
쉰 여운 더듬다 허튼 여백 다듬다
도무지 울 수도 없어라
입 여미는 서릿가을
마음을 두고 가서
자리를 파했는데 다시 오는 사람 있네
아무리 뒤져봐도 빠뜨린 게 없다 하니
아, 실은 마음을 두고 가 되짚었다 고하네
마음을 두고 가서 멋쩍게 오는 저이는
어쩌면 나만치나 구멍이 많은 사람
막 놓친 시구를 찾아 온 길을 뒤적이듯
아무려나 두고 가서 다시 얻는 심금은
슴벅대는 눈썹을 일찍이 섬겼다네
때로는 옛 마음 찾는 허기로도 살리니
- 《열린시학》 202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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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고산문학대상 - 칼 외 9편 / 정수자
김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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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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