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이상한 가족들
이제 어쩔 도리 없이 새해입니다. 다들 어제 잘 보내셨나요? 어떤 분들은 가족들과 함께 정답게 명절을 쇠신 분도 계실 테고, 어떤 분들은 또 다르게 다양한 모습들로 즐겁게 명절을 보내신 분들도 계실 테지요. 저는 이모부와 낮부터 술을 한 잔 하기 시작했는데 한 잔이 두 잔 되고 세 잔 되고 세 병 되어서 어제 밤새 토했습니다. 아직도 속이 말이 아닙니다. 얼굴이 조금 헬쓱해지지 않았나요. 오늘은 특별히 명절이고 하니 가족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신학자 로즈마리 류터는 예수가 ‘전통적인 가족가치’의 창시자이자 설계자라는 관념이 종교 우파의 지나친 상상력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전통적인 가족을 거부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눠 읽은 본문을 다시 살펴보면,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마을을 두루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고 합니다. 이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예수가 마을 돌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사람을 고치자 이곳 저곳에서 소문이 돌았습니다. 아마도 예수의 가족들도 소문을 들었겠지요.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들이고, 형제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을 겁니다. 소문에는 좋은 말도 있었겠지만 부정적인 말도 있었을테니까, 가족들의 입장에선 빨리 진상을 파악해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달려왔겠지요.
예수가 무리에 둘러싸인 통에 그의 가족을 보지 못하자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이 밖에 서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답을 하지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입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면 꽤나 매정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는, 그때에도 중요했고, 지금도 유효한 통념을 예수는 꿈쩍하지 않고 폐기해버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피로 규정되지 않는다고 예수는 분명히 말합니다. 신학자 로버트 고스는 이 본문을 예수가 만든 퀴어한 가족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정리해말하자면, 가정을 해체한 주범이 바로 예수인 것입니다. 그리고 혈연관계가 아닌 새로운 가족 개념을 제안한 인물도 바로 예수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족이야기들을 오늘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코타로는 1인가구>라는 만화입니다. 극의 주인공 코타로는 시미즈 빌라에 혼자 사는 다섯 살 어린이입니다. 이사를 와서 집집마다 고급 티슈를 돌리며 이웃에게 인사를 하는 코타로, 매일매일 공중목욕탕에 들려 목욕을 하는 코타로,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드는 코타로, 동네 고양이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들을 챙기는 코타로, 코타로는 1인 가구의 가구원이자 가장으로서 성실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코타로가 왜 혼자 살게 되었는지 극 중에서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는 않지만 코타로의 말과 행동, 회상 장면 등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방임. 코타로는 시설까지 쫓아와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를 피해 혼자 살기를 결정합니다.
코타로는 ‘혼자’살지만 이웃과 ‘함께’ 살기도 합니다. 코타로의 곁에는 공중목욕탕에 늘 함께 가는 옆집이웃 카리노씨가 있고, 밤잠을 설치는 코타로를 알아보고 집에 초대하는 이웃 아키토모씨, 함께 옷 쇼핑을 하러 가는 타마루씨가 있습니다. 유치원 입학식을 비롯한 여러 행사에 시미즈 빌라 이웃들을 늘 함께 합니다.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겠지요. “코타로에게 누가 가족인가” 그에게 가족은 누가 뭐래도 시미즈 빌라의 이웃들입니다.
코타로와 이웃들의 관계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이런 관계들이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쌍문동 이웃들 이야기는 조금 더 친숙하시지요? 산타 할아버지에게 ‘눈사람’을 선물 받고 싶다는 진주를 위해 반상회 안건으로 ‘눈이 오지 않는 날 어떻게 눈사람을 만들 것인가’가 상정되는 쌍문동 골목. 저녁 시간만 되면 반찬을 들고 이 집 저 집을 오고가는 아이들. 결국에 온 집안 밥상 구성이 어느 집이나 똑같아지는 그 골목 이야기 말입니다. 예부터 이웃에게는 사촌이라는 말도 붙었으니 가족 아닌 가족이라는 말이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시미즈 빌라의 이웃, 쌍문동 이웃들이 있습니다.
집집마다 각각 사연들이 있겠고, 저희 집이라고 다를 것도 없습니다. 다를 것이 없겠지만- 그래도 제 살의 상처가 가장 크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죠. 사춘기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조금 심해서 '가족' 그 이름 자체가 질문이기도 했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하필 가족으로, 부모자식으로 만나서 이 모양인가', '다른 관계로 만났더라면 우리는 서로에게 좀 더 산뜻한 인간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때만큼은 아닙니다.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가 어디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티를 내고 싶지 않아도 티가 날 때가 있지요.
여하 간에 '가족'이라고 하면 저는 이미 나 나름대로 진이 다 빠지는데-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아 출교처분이 내려진 이동환 목사와 함께 일을 하며 그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옆에 있던 나는 자꾸 그의 아들로 호명되었습니다. 그 정도의 나이차이는 아닌데 말이죠. 그런 일이 자꾸자꾸 생기자 동환의 짝꿍인 은선과 함께 동환과 저는 3인 가족으로 묶여 여러 가지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소식을 sns로 지켜보던 친구 하나가 뜬금없이 "하나님은 유미를 참 사랑하시는 것 같아" 라는 말을 했어요. 누가 저한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아서(?) 제가 말없이 입을 벌리며 그를 바라보니까 친구는 "그냥, 너에게 필요한 게 뭔지 잘 아시는 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뭐래는 거야"하고 말했지만 이내 '그런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내게 이런 가족이 필요했던 걸까’
지난 여름휴가에 이 두 부부와 함께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즐거웠던 이 여행이 우리에게 농담처럼 붙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했다는 점에서 그 친구의 말이 새삼 생각이 납니다.
다시 만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만화를 집중해서 보다보면 만화 밖에 일이 걱정되곤 합니다. 몇 년 후 학교에 들어갈 코타로는 가정통신문에 적힌 ‘부모 동의란’을 어떻게 채울까요? 매년 돌아오는 명절마다 코타로는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요? 코타로가 겪은 부침들,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코타로에게는 시미즈 빌라의 이웃들이라는 가족이 있지만 코타로의 가족들은 이 사회가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코타로를 더 외롭게 할 겁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저는 코타로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상한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가 만들었던, 만들고자 했던 이상한 가족 이야기 말입니다. 그가 듣고 분명 큰 위안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에게도 시미즈 빌라가 있었으니까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그 빌라의 이웃이었지요. 매 주일마다 이렇게 모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우리가 우리 서로의 가족이 되길 원했습니다. 어느 한 사람 외롭지 않도록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며 말입니다.
오늘 모인 우리가 서로를 가족이라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시미즈 빌라 이웃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나라에서 다정한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