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유적을 찾아서 ('19.05.15)
○ 가 는 곳 : 해미읍성/ 마애여래삼존상 / 간월암
○ 언 제 : '19. 05. 15(수)
○ 주 소 : 충남 서산시
○ 날 씨 : 맑음
○ 볼 거 리 : 해미읍성,마애여래삼존상,간월암,개심사,팔봉산,가야산,황금산,서산한우목장,삼길포항
오랜만에 백제문화를 찾아 충남 서산시 문화유적지를 찾아봅니다. 오늘 돌아본 곳은 해미읍성/ 마애여래삼존상/ 간월암입니다. 사람들이 현존하는 불상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국보 제84호인 서산 마애 삼존불상을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이곳은 가야산 계곡에 자리하며 마애삼존불 관리사무소가 있고 사무소 마당 왼쪽에 불이문을 지나 산길을 돌아나가면 큰 바위절벽옆에 암자처럼 마애불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불상은 화강암 암벽으로 부조형식으로 불상을 조각하고 중간의 석가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미륵반가사유상, 왼쪽에는 제화 갈라보상 입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높이는 석가여해입상은 2.8m, 제화갈라보살입상은 1.7m, 미륵반가사 이상은 1.66m로이며 아침에 보면 제일 아름답다고 하며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정말로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미소가 달라 보인다고 합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중앙의 석가여래입상은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고하며.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으며.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고 합니다.
오른쪽의 미륵반가사유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으며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왼쪽의 미륵반가사 이상은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며.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보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아 합장을 하여봅니다.
불상의 조성 연대는 600년경으로 추정하며 1962년에 국보 84호로 지정 현재에이르고 있으며 문화해설사의 말을 빌리면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약간 앞으로 굽게 조각이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중생들에게 좀 더 잘 보이게 하기위해서 라며 백제 후기의 작품으로 그 당시 백제는 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탁월한 석공들이 많았고 나중에 석굴암 작업에도 참석했다고도 전해집니다.
'해미'라는 지명은 바다 해(海),아름다울 미(美)를 사용해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해미읍성은 성곽둘레 1,800m, 높이 5m, 면적 20만㎡로 현존하는 가장 잘 보존된 평성으로 조선 태종 18년부터 세종3년까지 3년간 걸쳐 쌓았고, 성종 22년(1491)에 완전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하며 해미읍성의 정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남문. 해미읍성은 1421년에 축성이 완료됐는데 500년이 넘도록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해미읍성은 천주교박해와 관련이 깊은데 당시 천주교신자들을 투옥시킨「옥사」그리고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한 회화나무(호야나무) 등이 있으며 이조시대 천주교 신자를 박해한 장소다 해미읍성은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으로 이런 연유로 천주교 순례지이기도 하며 2014년 8월15일에는 방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동헌 뒷편에서는 예술단인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사물놀이 농악으로 진도아리랑 등 구성진 민요가 흥을 돋구며 태평소(太平簫)의 소리를 들으며 강렬하고 애처로운 애잔한 소리에 넋을 놓고 한참동안 바라보며 우리가락에 도취해 보는 여유를 갖어보았습니다. 그밖에 민속놀이로 투호와 재기차기도 연날리기등 많은 분들이 가족과 놀이를 즐기고 있었으며 저는 짧은 시간에 조선시대 생활상을 조금 맛보는데 그쳤습니다.
해미읍성은 선조 12년(1578) 충무공 이순신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하였던 곳으로 원래 읍성은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되었다고하며 세조때에 군사 제도가 진관체제로 개편되고 효종이 병마절도사를 청주로 이전한 뒤로는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지방 행정 중심지역할을 하게되어 해미읍성이란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는 해미내상성(內廂城)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피안(彼岸)의 꿈 / 최영복
눈뜨면
함께 있는것 만으로도
구름위를 날아 다니는
피안(彼岸)의
꿈을 꿉니다.
침묵의 비 바람으로
안개속에 선명하게
나타난 보고픈
사람이였습니다.
사랑 한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소낙비에 씻겨가지 않기에
당신의 사랑을압니다.
그래서 아침 햇살
떠오르기도 전
지난 밤을 보내고서야
말라버린 눈물로
또 울고 있습니다.
"간월암" (看月庵) 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며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간월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하며 썰물때면 육지와 연결되고 밀물때면 섬이되는 신비로운 암자이기에 참고로 물 때를 잘 맞춰야 암자를 둘러볼 수 있답니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어리굴젓을 태조에게 진상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1530년(중종 25) 찬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간월도만 언급되어 있고 간월암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 조선후기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말엽에 폐사되었는데 1914년 승려 만공(滿空)이 다시 창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현대인들의 삶은 너무나 바쁘고 갖은 세파에 시달리다보니 가끔은 속세를 떠나 청정하고도 고요한곳에 쉬고 싶은 마음이 있을때면 나는 조용히 산사에 몸을 맡기고 사부작 사부작 걸어봅니다. 간월암은 암자로 보기보다 어찌보면 작은 쉼터같은 이미지로 사철나무 아래서 바다를 바라보는 작은 여유로움에서 바닷내음을 마음껏 마셔봅니다.
오늘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벌들이 1kg의 꿀을 채집하려면 560만 송이의 꽃을 순방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시집을 읽다가 이 대목이 목에 걸렸습니다. 내가 무엇을 얻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을 테고 무엇을 잃었어도 그 또한 태초부터 여기에 있었을 터 우리가 떠날 때도 그랬듯이 삶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여기 있는 건 내 뜻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고 나를 이곳 세상에 오게 한 것도 스스로의 문제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이 봄이 끝나기 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처럼 죽는 것과 죽는 것처럼 사는 것 사이에서 매일매일 560만 송이의 꽃을 순방하는 것 그렇게 꿀통을 채우는 벌들처럼 나는 살고 싶지 않고 만남에 있어서도 금을 긋고 일정한 평행선상이나 레일에서 달리는 것보다도 서로를 긍정하며 이해하며 따뜻한 눈 빛으로 바라보며 아름다운 삶을 더불어 살아가고 싶을 뿐 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저마다 고독을 안고 살고 살아갑니다. 일찌기 괴테는 "인간은 사회에서 어떠한 사물을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감(靈感)은 오직 고독에서만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독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고독이 가슴깊이 저며올때 외로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늘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새로운 계기가되고 삶의 원동력이 되어 삶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