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한 여대생이 이름 상담을 해왔다. 자신의 이름을 인터넷 작명 사이트에서 좋은 이름인가 나쁜 이름인가 조회를 해봤더니 아주 나쁜 이름으로 나와 고치고 싶은데 재판으로 바꿀 수 있느냐며 그 절차를 물어왔다. 내가 대학교 때 이름을 재판으로 바꾸었다는 기사를 보고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물었더니 흔하지도 않으면서 멋진 이름이었다. 그래서 왜 나쁘게 나왔냐고 물었더니 한자 이름의 획수와 사주(생년월일에 따른 운)에 따른 풀이가 소름끼칠 만큼 나쁘다는 것이었다. 지금 대학 4학년인데 사회일꾼이 되기 전에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그 학생에게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상담을 해주는 꼴이 되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한자이름의 가치를 따지는 성명학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이름에 상징적 의미를 우리는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지 않은가. 다만 그러나 그러한 풀이가 절대적인 것으로 믿거나 그런 풀이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그것은 예사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다. 한자 성명학 풀이는 지극히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 핵심 근거를 따져보자. 먼저 한자 이름 풀이는 근본적으로 한자 획수에 따르는데, 획수 따지는 법이 성명학 이론에 따라 다른 것이 많다. 이를테면 물수변도 원획법으로 하면 4획이고 필획법으로 하면 3획이다. 그 얘기는 어떤 획수로 보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한자 획수를 따르지 않는 발음오행법으로 보더라도 문제가 되는 한자는 꽤 많다. 이를테면 李씨의 경우 발음오행으로 보면 '이'라고 하기도 하고 '리'라고 하기도 하는데 글자가 다르니 운명이 달라진다. 그리고 한자 성명학의 핵심은 오행론과 사주인데 오행론에 따른 풀이가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사주 또한 일본 표준시로 보느냐 아니면 전통 우리식대로 보느냐에 따라 시간 자체가 달라져 운명이 사뭇 판세를 가른다. 옛날 시간법이야 해의 길이로 따지던 식이고 지금 시간은 근대 이후에 설정된 과학적 시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니 어찌 좋은 이름의 절대적 기준을 정할 것인가.
한글이름의 경우도 절대적 기준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이름이 좋은 이름이라는 기준이 있지만 그 기준도 상대적이다. 요즘 뜨고 있는 '하리수'의 경우도 성과 이름을 합쳐 부르면 부르기 듣기가 모두 좋지만 이름만 떼어 말하면(리수) 뭔가 어색하다. 곧 이름 부르는 방식이 달라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그 느낌과 효과는 달라진다. 하리수처럼 성을 붙여 부르느냐 떼어 부르느냐도 있고 또 이름 끝에 '-야'나 '-아'를 붙여 부르느냐 떼놓고 부르느냐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좋고 나쁨의 기준이 주관적일 때가 많다. '조오타, 조쿠나'라는 이름도 있는데 오타나 쿠나가 부르기가 어색하다는 사람도 있고 아주 독특하고 좋다는 사람도 있다.
정녕 좋은 이름의 기준은 없는가
그렇다면 좋은 이름의 기준은 없는가. 아니다. 있다. 인간의 가치판단이 존재하는한 좋고 나쁨은 있게 마련이다. 다만 그 기준이 상대적이거나 모호할 뿐이다. 그런 기준을 따져 보기 전에 먼저 이분법을 없애자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한자식 이름은 좋은 이름, 한글이름은 나쁜 이름 아니면 그 반대 이러한 이분법은 이름짓기의 다양한 욕망을 제한하고 가로막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분법을 깨기 위해 새로운 한글이름 유형을 널리 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니까 기존의 한글이름이 순우리말(토박이말)로만 짓는 것을 뜻한다면 내가 얘기하는 한글이름은 한자식 이름도 한글로만 쓰면 한글이름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哲眞'이란 이름도 '철진'으로 쓰면 한글이름이다. 더 나아가 짓는 과정에서도 한자와 순우리말을 결합해서 지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지슬(智-)'은 지혜(知慧)롭다의 '지'와 슬기롭다의 '슬'자를 합쳐 지은 이름이다. 그리고 쓸 때는 그냥 지슬이라고 쓰면 된다. 그리고 기존 한자식 이름은 지혜로울 지자를 썼다고 말하지만 이런 식의 한글이름에서는 '지혜롭다'는 한자어 또는일상어에서 '지'자를 따왔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기존의 한자식 이름이 옥편에서 한자를 따오는 방식이라면 내가 얘기하는 한자식 이름은 한자어에서 특정 글자를 따오는 방식이다. 우리 첫 애 이름도 이런 식으로 지었다. '몽땅 다'에서 '다'를 따오고 '현명(賢明)하다'에서 현자를 따와 '다현'이라 지었다.
개성적인 이름이 좋은 이름이다
이름짓기에서 전통적인 이분법을 깨자는 것은 좋은 이름의 첫째 조건이 개성을 살린 이름이 라는 생각 때문이다. 일단 고유명사는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짓는 것이므로 되도록 독창적인 것이 좋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독창성을 확보하느냐이다. 그것은 짓는 방식을 다양하게 하거나 특이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와 같이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합쳐 짓는 방식을 개발한 것이다. 또한 한 낱말을 활용하기보다는 두 낱말 이상을 활용하는 전략이 좋겠다. 초기 한글이름이 '보람, 슬기' 등과 같은 동명이인을 양산한 것은 특정 낱말만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낱말을 쓰되 다른 낱말을 결합하는 방식이라면 얼마든지 개성적인 이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슬기롭다라는 낱말을 쓰고 싶다면 용감하다는 말을 합쳐 슬용 또는 용슬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특정 낱말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보다는 낱말에서 특정 글자를 따와 합치는 방식이 좋다. 우람, 보람, 슬기 등의 이름이 좋기는 하지만 그 뜻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오히려 그런 낱말의 좋은 뜻이 드러나기보다는 식상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름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역동적인 삶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므로 상징성이나 은유성이 강한 것이 좋다. 따라서 본인도 '슬기롭다'와 '옹골차다'에서 첫 글자를 따서 슬옹이라 지었다. 그리고 한 낱말의 첫 글자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슬기'롭다와 '지혜'롭다를 합칠 경우 두 자 이름만 무려 여덟 가지가 나올 수 있다. '슬지, 지슬, 슬혜, 혜슬, 기지, 지기, 기혜, 혜기' 등등
그리고 이름짓기에서까지 맞춤법이나 표준어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좋은'이 맞춤법에 맞지만 이 말을 그대로 이름으로 가져오면 어색하거나 곤란하다. 하지만 소리나는 대로 따오면 '나조은, 정조은' 등 훌륭한 이름이 될 수 있다. 이밖에 명사나 명사형만을 고집하지 말고 우리말의 주요 특징인 활용형을 잘 활용해도 좋다. '채운, 나은, 세운' 등이 그런 이름들이다.
두 자 이름을 탈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나 금방 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꺼려한다. 하지만 세 자까지는 큰 부담은 없으리라 본다. '보람'이란 흔한 이름도 세 자로 확장하면 아주 개성적인 이름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다보람, 보람솔, 보람별, 세보람'등등 지금 현행법으로는 다섯 자까지 가능하지만 네 자가 넘어가면 남이나 본인에게 부담갈 수 있으므로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는 않다.
남자다운 이름, 여자다운 이름 따위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는 것도 고정된 역역할이나 성관념을 벗어나는 좋은 전략이 될 수도 있다. 한글이름의 주요 특징은 그런 고정될 틀을 벗어난 통성적인 이름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한별, 슬기, 보람 등의 이름은 남녀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는 통계도 있었다. 남자식 여자식이라는 이분법을 깨기 위해 우리 첫 아들 이름도 통성적인 '다현'이란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구별이 편리할 때도 있지만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부채질할 뿐이다.
만들어가는 이름을 위하여
좋은 이름의 가장 일반적인 기준인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이름이라는 것은 지극히 옳은 기준이지만 실제로는 다분히 주관적이다. 오해를 주거나 놀림감이 되는 이름은 안좋지만 그런 경우도 근본적으로는 오해를 하거나 놀리는 사람이 문제지 이름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적 인식과 판단이 여린 어린 시절을 거쳐야 하므로 지나친 놀림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름은 피하는 것이 좋다. 내가 상담을 통해 바꿔 준 이름 가운데 '여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애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뜻과 의도는 좋을 수 있지만 아이는 아이들의 지나친 놀림으로 유치원 부적응아로까지 갔던 것이다.
이름의 의미와 이미지는 죽을 때까지 만들어간다. 진정 좋은 이름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자신이 짓지도 않은 이름 때문에 운명이 바뀐다면 꽤나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지 시대에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호적 이름까지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국가에서 보장해 주었으면 한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소중하지만 자신의 이미지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둘째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와 '다찬'이란 지었다. 건강 때문에 비록 10달은 다 채우지 못했지만 부족한 이 세상을 다 채우는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였다. 우리 부모의 뜻은 그렇지만 실제 의미는 다찬이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또 건강해져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짓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