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회 절기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밴드에서도 안내 드렸던 것과 같이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둔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이번주 수요일이었던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 부활절 전야로 46일이지만, 사순절 기간에 속한 여섯 번의 주일은 제외하기 때문에 40일이 됩니다. 사순절 기간에 속한 여섯 번의 주일은 ‘작은 부활절’로 부활을 기대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력을 따르는 교회들은 교회력 절기에 따라 성서말씀을 배치한 성서정과를 사용합니다. 오늘 날짜에 해당하는 성서정과를 오늘 우리가 나누어 읽었지요.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 1장 9절에서 15절 말씀이었습니다. 간단히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고 또 광야로 가 시험을 받는 장면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서정과에는 복음서의 말씀 뿐만 아니라 구약의 말씀과 서신서의 말씀도 정해져있습니다. 성서정과에 따른 구약의 말씀은 창세기 9장 8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사순절에 왜 이 두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라고 하는 고 하면, 사순절이라는 이름부터 따지고 봐야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때 내렸던 비가 40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보낸 시간도 40 년이었고요, 엘리야가 광야에서 도피했던 날수도 40일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며 광야에서 머문 날수로 명시 됩니다. 이 광야 시험이 그리스도교에서 사순절 제정의 직접적인 뿌리가 되지요. 40이라는 숫자가 반복되지요. 다들 눈치 차리셨겠지만 사순절은 사십이라는 숫자 때문에 나온 이름이에요.
성서정과에서 노아의 방주 본문과 예수의 광야 시험 본문을 사순절 첫째 주일날 배치한 것은 요런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오늘은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예수의 ‘고난’ 그 중에서도 예수가 맞이한 ‘시험’에 대해서 묵상을 할 것입니다.
시험! 여러분들은 시험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한 번도 시험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조차도 “시험이 제일 좋아!”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왜 일까요. 아마 그건 시험은 시험을 치루는 사람에게 결정권이 별로 없어서인 것 같습니다. 시험의 날짜랄지, 시험의 내용이랄지, 시험의 결과도요. 시험을 치루는 사람이 결정 하는 것이 아니지요. 시험을 내는 사람이 그런 것들을 정하기 마련이니까요. 뭐랄까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험을 좋아하는 일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는 시험을 반기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예수의 뜻으로 시험을 본 것이 아니었거든요.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12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이어지는 구절 13절에는 이렇게 나오네요. “예수께서 사십 일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는 성령에 의해, 성령에 떠밀려 시험을 치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출제자는 무려 사탄이었지요. 여기에 예수의 의지라곤 도통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시험은 어떤 시험이었을까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다르게 마가복음은 이 시험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복음서의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문학에 있는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구조적으로 볼 때 ‘소년만화’로 통칭되는 성장드라마의 서사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성장드라마의 서사구조는 첫 번째, 주인공의 정체가 소개 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11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죠. 예수가 물 속에서 막 올라오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고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대단한 주인공의 등장이죠. 두 번째는 이 주인공이 옛날 신분을 벗어나는 공간, 즉 경계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광야가 그 경계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서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가 갈릴리로 와서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에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겠네요.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과는 달리 시험의 내용보다 시험을 통해 성장한 주인공, 예수의 성장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전체의 예고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마가판 성장드라마의 주인공 예수는 관습적인 종교적 전통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들짐승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는 마가복음에서 지속적으로 금기를 깨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나병 환자와 혈루병 걸린 여성을 만지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서 공생애 초기 기간을 보냅니다. 독자는 마가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와는 대비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 심지어는 열두제자들. 과거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이 사람들 사이에서 독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성장드라마의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나의 배역은 누구인가. 이것이 바로 사순절 첫째 주일에 마가복음이 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맡고 싶으신가요?
마가복음 속 오늘의 이야기가 소년만화(성장드리마)의 서사를 띄고 있다고 하였지요. 그 김에, 제가 좋아하는 소년만화 <나루토> 소개드리려 합니다. 예배에서 2주 연속 만화 이야기라니, ‘저 전도사는 설교 준비는 안하고 맨 만화만 보나’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어필해봅니다. 만화도 보고, 성경도 봅니다. 여러분은 만화도 안보고 성경도 안보시지요? 만화도 보고 기왕이면 성경도 보시길 바랍니다.
여하간에 <나루토>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만화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만화 <나루토>는 주인공 나루토가 나뭇잎 마을의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호카게의 자리에 올라가는 여정을 그린 만화입니다. 헌데 주인공 나루토에게 특별한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나루토가 살고 있는 나뭇잎 마을에는 옛날 옛날에 구미호가 살고 있었는데요. 꼬리가 아홉개 달린 구미호는 꼬리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산이 무너지고 해일 덮쳐 마을에 큰 골치였습니다. 당시 호카게였던 한 부모가 고민 끝에 자신의 갓난아이에 몸에 구미호를 봉인합니다. 그 여파로 부모는 죽고요. 그 아기가 바로 만화 <나루토>의 주인공 나루토입니다.
만화가 끝나면 나오는 뮤직비디오 같은 것이 있는데요. 나루토 1기 엔딩곡에 오늘 제가 설교에서 하고픈 이야기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한번 보실래요? 한번 보자고 이야기 하려니까, 설교 시간을 채우려고 아주 용을 쓰는구나 하실까봐 민망한데, 짧습니다. 1분 30초 밖에 안되니까요, 한번 보시죠.
저는 이 엔딩곡이 마치 예수의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곡을 찬송가라고 부를 작정입니다. 놀랍죠? 예수에 미치면 만화 엔딩곡을 보고 설교 한편을 쓸 수 있습니다. 자, 천천히 함께 보시죠.
“등을 돌린 아이들, 그들만의 비웃음”
만화 속 나루토는 유년시절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습니다. ‘구미호가 봉인된 아이’, ‘부모 잡아먹은 괴물’은 께름칙하다고 여겨진 탓이지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 때 나루토는 늘 혼자였습니다. 성서에는 예수의 유년시절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습니다만 예수의 유년이 나루토의 유년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크지도 않은 마을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라는 타이틀은 발 없는 소문 그 자체였을 테니까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이야기가 어찌 정리되었든, 그들의 믿음이 크든 작든 간에 발 없는 소문은 추문 그 자체였을 겁니다. 예수에게 아이들은 쉽게 등을 돌렸을 테고, 그 중에는 예수의 태생을 들어 예수를 비웃는 아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빛을 잃은 날개는 혼자만의 꿈을 꾸었어”
마을에서 어느 하나 반기는 이 없는 나루토가 꾸는 꿈만큼이나 마을에서 제 아빠도 모른다 소문났던 예수가 꾸는 꿈은 혼자만의 꿈이었을 겁니다. 혼자 꾸는 꿈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이는 때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었으니까요. 그런 나루토와 예수가 성장해서 어느 순간부터 혼자 꿈을 꾸지 않습니다. 나루토와 예수의 곁에 동지가 생겨나기 때문이죠. 나루토의 동지는 함께 꿈을 키워나가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첫 동지들은 지난번 설교 때 등장했던 어부들이었지요. 그리고 그 동지들이 늘어나고 늘어나서 이천년이 흐른 지금 예수를 기억하며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모여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따른다, 닮아간다. 고백하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어째서 예수를 따르죠?
나루토의 팬들은 오늘 우리가 본 저 엔딩곡의 화자가 나루토의 친구일 것이라고 보는데요. 저는 이 엔딩곡을 보면서 예수를 따르는 우리가 예수를 떠올리며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보았습니다.
“한 번도 포기하지 않는 너” 때문에 “너를 의지할 수 있다”니 굉장한 고백 아닌가요? 우리가 따라 해야 할 고백처럼 여겨집니다. 여러분은 이 가사에서 예수가 떠오르지 않으시나요? 보통은 떠오르지 않겠죠? 저는 떠올랐습니다.
예수의 사역은 한 번도 포기하지 않는 여정이었습니다. 어떤 시험에도 예수는 어느 하나, 어느 한 사람 포기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뚜벅 뚜벅 가야할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눠 읽은 본문은 그 걸음의 시작이고요.
“너의 뒷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끝이라고 해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라는 고백을 우리는 할 수 있을까요? 나루토의 친구들은 나루토를 보며 이런 고백을 했는데 말이죠.
예수가 가는 이 걸음은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가볍지 않습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경험한 하늘이 “갈라지는”상징은 예수의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늘이 “갈라진다”라는 동사를 세례의 장면과 예수가 죽는 그 순간에만 사용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에 성전의 휘장이 두 폭으로 갈라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인 세례 장면을 읽었는데 그 장면이 예수의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겁니다. 어디 무서워서 시작이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시작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함께 할 수 있겠냐고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우리의 시험인가 봅니다.
예수는 광야에서의 시험을 마치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왔다.” 이게 예수가 시험 끝에 얻은 답입니다. 바라건대 우리도 시험을 마치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와 함께 가고 싶다” 오늘의 찬송가를 한 번 더 듣고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