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장 13-22절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14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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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순절 묵상글을 쓰면서도 공유를 했지만- 제가 중고등부 사역을 할 적에 아이들과 첫 번째로 만나는 날이면 저는 아이들에게 늘 에이포용지 하나를 나눠주고, 성부 성자 성령을 그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말씀을 전하기 앞서 여러분께 포스트잇을 하나씩 나누어드릴 작정입니다. 여러분에게 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성부는 네모다. 성자는 네모다. 성령은 네모다> 에 네모를 채워보십시오. 3분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답이어도 좋지만 <성부는 아버지다. 성자는 아들이다. 성령은 비둘기다.> 이 답만큼은 거절입니다. 아버지, 아들, 비둘기 말고 다른 답을 적어보세요. 삼위의 구분이 어렵다면 간단히, 나에게 신은 네모다. 만 완성하셔도 좋습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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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저에게 ‘나는 어떤 신을 따르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본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잠깐 질문하는 시간을 드렸던 것이에요.
오늘 본문은 유월절이 다가 오면서 시작합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구원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죠. 하나님이 이집트에 속한 모든 장자를 죽이는 열 번째 재앙을 시행하시던 날 저녁, 이스라엘의 각 가정이 양을 죽여 그 고기를 가족이 먹고 양의 피는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놓음으로써 그 밤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알려집니다. 이집트 땅의 모든 집에 들어가 그 집의 장자들을 죽이시던 주님이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이스라엘인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셨다고 해서, 이 사건을 유월절이라 말하고 두고두고 구원을 경축하는 명절로 지켜왔습니다.
신실한 예수는 이런 명절, 유월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헌데 그의 순례는 분노로 바뀌고 말지요. 성전 경내로 들어서면서 예수는 성전에서 거룩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도때기 시장이 따로 없었죠. 가축들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흥정소리, 동전을 바꾸는 소리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는 이 모습에 분이 나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엎지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하고 말씀하시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는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일까요? 인자하고 온유한 우리들의 신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이렇게 심술이 난 젊은이가 남은 것일까요.
사실 성전 제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이런 시장은 필요했습니다. 제물로 드릴 흠 없는 소와 양과 비둘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짐승을 끌고 올 수 없을 정도로 멀리서 온 유대인들이 제물로 드릴 소나 양, 비둘기를 성전 주변에서 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래를 위해서는 당연히 돈 바꾸어주는 사람도 있어야겠지요. 왕의 얼굴이 그려진 이방인의 돈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으니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아무런 그림이 없는 동전으로 환전해서 성전세를 내고 십일조를 바쳐야 했습니다. 시장이 있어야 율법이 정해진대로 정결한 제물로 거룩한 제사를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행들은 표면상 순례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고, 본래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예수가 이러한 관행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꼬장을 부린 걸까요?
이 질문을 잠시 뒤로 하고, 오늘의 본문이 담겨있는 ‘요한복음’이라는 책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 뿐아니라 공관복음이라 일컬어지는 마가마태누가복음서에도 반복되어 나옵니다. 헌데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순서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이 성전정화 사건이 책 끝부분에 나옵니다. 헌데 요한복음에서만큼은 이 사건이 이야기에 앞부분에 소개됩니다.
요한은 왜 이 사건을 앞에 위치시켰을까요? 요한은 성전정화 사건을 7개의 기독론적 징표 중 펏 번째 징표인 가나의 혼인 잔치 직후에 소개합니다.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일은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었다. 우리는 그 표징으로 우리가 그의 영광,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체성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를 믿은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오늘 성전정화 사건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보고 다른 이들처럼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라고 빈정거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혼인잔치의 기적이 예수가 예수인 것을 ‘믿게’하는 사건이었다면, 성전정화는 예수가 예수로서 제자들 앞에서 행한 첫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예수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수행했던 고발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성전을 속되게 만들고, 예배를 오염시키고, 경건보다 의식을 중시하는 행태를 고발하는 것은 예언자의 전통이었습니다. 예수의 예언자적 행동은 칼뱅이 말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설명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칼뱅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은 예언자, 왕, 제사장이라는 삼중직을 통해서 볼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예언자처럼 진리를 확증해주고, 제사장처럼 화해와 중재를 수행하고, 왕처럼 신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의 분노는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 행동, 퍼포먼스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는 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 무엇을 고발하고, 또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 단서는 스가랴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스가랴서 14장 21절에 따르면, “그날이 오면, 만군의 주님의 성전 안에 다시는 상인들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의 행동은 주님이 오시니 상인들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날이 왔다는 것이지요. 그날은 어떤 날일까요?
그날에 대한 단서는 다시 오늘 본문 뒤편에 나옵니다.
18절 말씀부터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헛소리를 한다 비웃었지만, 예수가 말한 성전은 사람들이 이해한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지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한 이야기였습니다.
예배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다른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배하기 적절한 장소에 대해 사마리아 여인이 묻자, 예수는 예배의 장소를 어떤 물리적인 장소에 제한하려는 태도를 포기하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바로 예수가 이 땅에 온 날입니다.
예수가 어떤 존재입니까?
그가 이 땅에 온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회의 창립자인 이냐시오 사제는 그가 쓴 영적 훈련서에서 성삼위가 예수를 파견하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그립니다.
삼위 천주께서 사람으로 가득 찬 지구를 내려다보시면서,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인류를 구하기위해 제 2위인 성자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셨다. 그리하여 때가 이르자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방문하신다.
하나이면서도 셋이고 셋이면서도 하나인 이상한 존재, 성부, 성자, 성령이 둘러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피며 더 이상 이 세상에 선한 것이라곤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 한 이들은 이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 때, 그이며 동시에 그들 중 일부인 성자, 예수가 나선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예수는 스스로 구체적인 인간 안에 들어옵니다. 높은 곳에 계시던 신이 우리 곁으로 와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신은 한 순간에 인간의 모든 실존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통 받을 것이고 죽음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가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덜어내기 위해 또는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치던 풍습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통해 자기 생명을 부지하려는 인간의 강박을 증명하지요. 유월절도 그런 강박의 풍습이었습니다. 내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발악입니다. 내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다른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폭력입니다. 그 폭력을 위해 돈을 주고받습니다. 오늘 본문 속 성전의 시장은 이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전혀 다른 방식을 제시하는 겁니다. 다른 이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기존의 방식이 예수를 통해 엎어집니다. 자신을 위해 타자에게 칼을 들이미는 세상을 멈추기 위해서 예수는 자신에게 칼을 돌립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비둘기를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의 오늘 행동은 그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속은 생명 전체의 구조입니다. 어느 한 생명에게 일어난 일은 비슷한 형태로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대속은 꼭 무엇인가를 대신하여 제물을 바칠 때 이외에도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저는 이 개념 속에서 오늘 여러분들께 연대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입장에서 오늘 이야기를 바라본다면, 예수의 깽판은 무엇보다 더 큰 기적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에 의해 구원받음 또한 똑같겠지요. 예수의 행동이 우리의 구원과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 사이에 연결 또한 떠올려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로마서 1장 8절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기도할 수 있고,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세례를 받을 수 있고,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짐을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대속의 모티브에서 피조물 가운데 어떤 하나가 겪고 있는 고통은 항상 모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속 사상은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10년 전 4월 16일, 세월호에 타고 있지 않았어도 세월호 참사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내가 세월호에 타고 있었던 이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동의 큰 어려움이 없는 비장애인이어도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들과 제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상가세입자가 아니고, 전세사기 피해자가 아니고, 이주노동자가 아님에도 목소리를 내는 것은 착해서도 아니고, 뭘 좀 배웠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가 그들과 다르지 않은 존재이고, 그들과 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가 저와 어린 양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가 오늘 본문에서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둘렀던 이유는 이 연결을 말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날이 왔고, 이제 우리 모두는 끊어낼 수 없이 연결되었으니 내가 아닌 누군가의 피로 너의 죄를 덜어낼 생각 말라”고 예수는 소리친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이야기를 이렇게 읽었습니다.
앞서 여러분에게 신이 어떤 존재 인지를 물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앞서 연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