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삶에 대한 범죄 (Crime against Life)"--'혐오의 도구'로 소비되는 예수(강남순 교수/미국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1. 일요일인 어제 (12월 29일) 광화문을 지나게 되었다. 광화문 광장을 메운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멘'과 '할렐루야'가 거의 매 분마다 광화문 일대를 채우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비친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익숙한 얼굴이다. 전광훈 씨다. 그는 무대에 서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문장의 말미마다 청중들에게 '아멘'을 종용하고 있었다. 잠시 들어보니 그의 문장들은 그 어떤 논리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어와 서술어들이 따로 존재한다. 그런데도 그의 선동적 웃음, 제스츄어, 그리고 웅변하는 듯한 언설에 사람들은 '아멘'과 '할렐루야'를 마치 '화답송'을 하듯이 거의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전광훈 씨 앞에 앉아 광화문 광장을 메우고 있는 이 사람들은 '소리는 듣지만 (hearing),' 진정 그 '내용을 듣는 것(listening)' 은 아닌 듯 했다. 내용과 상관없이 이들의 반응은 일률적으로 동일했으니 말이다. 이 모습을 잠시 지켜보며, 떠오르는 구절이 있었다: "유일한 한 명의 크리스천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In truth, the only one Christian died on the cross.)"
2. 목사의 아들이며, 한때 목사가 되려는 생각까지 하고 신학을 잠시 공부하기도 했던 니체--그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여러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세미나에서 니체의 책을 교재로 사용하곤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학생들과 니체의 <안티-크라이스트 (Anti-Christ)>를 읽고 토론하는 소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절절한 탄식은 예수가 진정으로 보여준 것을 기독교가 배반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니체가 본 예수는 진정한 '생명 사랑'과 '생명의 긍정 (affirmation of life)'의 원리로 '살아가는 방식(how to live)'을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이 초석을 놓은 제도화된 기독교는 이 땅위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긍정을, '저 곳'이라는 초월적 개념의 '신/그리스도'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 초월적 신/그리스도를 교리화하고 절대화하면서, '저 곳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 받음'이라는 지상과제로 가르쳐 왔다. 이로써 기독교는 '생명부정(negation of life)'의 종교로 전락한다. 니체는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생명/삶에 대한 범죄 (crime against life)"라는 개념으로 담아내고 있다.
3. 여기에서 "생명 (life; Leben)"이란 '생명'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생명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 살아감이라는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땅위에 굳건히 두 발을 디디고서 무조건적 환대, 사랑, 연민, 연대를 실천하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 이후 등장한 기독교회들은 예수가 가르친 '살아가는 법'이 아니라, 지독한 이기적인 '자기 구원'을 종교적 상품으로 만들어 예수를 소비하고 있다. 예수는 타자들과의 '함께 살아감 (living-with)'을 가르치고 있는데, 기독교는 교리와 그 교리적 실천에서 '혐오의 정치'를 확산하고 있다. 구체적인 살아감에 대한 것이 아닌 '초월적 신/그리스도/구원'의 교리를 절대화함으로써, 생명/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4. 광화문 광장에서의 전광훈 씨, 그리고 그의 모든 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청중들이 믿는다는 예수는 도대체 어떠한 예수일까. 그 뿐인가. 일요일 한국 전역의 교회들에서 호명되는 '예수'는 누구인가. 교회등록하고, 헌금 많이 내고, 목사에게 순종하면 '구원보장'을 해주는 교회들--이러한 교회들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 예수는 없다. 이 교회들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외면하게 함으로서, "생명/삶에 대한 범죄" 에 가담하고 있다. '저 곳'이 아닌, 바로 '이 곳'에서 자신은 물론 타자와 사랑을 나누고, 연민하고, 연대하고, 함께 울고 웃는 삶을 치열하게 살라고 한 예수는 교회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등록하고, 헌금 내고, 타종교- 성소수자-외국인 혐오에 앞장서는 일이 곧 '예수 믿는 것'이라고 하는 그 교회들에, 예수는 없다. 아니, 예수는 일회용품으로 소모되고 버려질 뿐이다. 참으로 착잡하다.
5. 나의 착잡함은 이렇게 일회용품으로 소모되는 예수,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라는 '혐오의 도구'로 사용되는 예수가 광화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광훈 씨처럼 노골적인 양태를 지니기도 하지만, 파이프 오르간과 오케스트라, 그리고 최고급의 성가대가 음악을 연주하면서 매우 고상한 모습을 지닌 대형 교회들, 그리고 그 대형 교회들을 선망하는 무수한 작은 교회들에서 예수는 호명되고, 소비되고,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6. 사르트르의 <구토>는 '비본질적이고 피상적인 삶'이 '본질적이며 진정한 삶'을 대체할 때 느끼게 되는 실존적 의식이다. 일요일 광화문 광장에서, 또한 크고 작은 교회들에서 맹목적으로 호명되어 소비되는 '예수'를 상기하며, '구토'를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나는 바란다. 적어도 이러한 '구토'를 느끼는 이라면, 치열한 '생명 긍정의 삶'에 대한 갈망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명/삶에 대한 범죄'를 반복하는 교회들안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비록 순간적일지라도 그러한 실존적 의식으로서의 '구토'를 느끼는 이들에게서, 나는 오히려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