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교사의 노래
1983년 쬐끔 많은 나이로 교단에 입(入)했다. 말로만 듣던 두툼한 봉투랄까, 첫 사랑보다 설렌다는 첫 봉급의 포만감이 아직도 쟁쟁하다. 평교사 정년퇴임의 초심으로 교단에 섰고 당연하지만 그 소박한 결심의 실행도 만만찮았음도 밝힌다. 그리고 이제는 교단 36년, 떨어지는 가랑잎도 함부로 밟지 말라는 정년퇴임 7개월 전이다. 그러니까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기성세대들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절망으로 밀어 올리던 시시포스의 바위, 그 젊은 날들도 주마등이다. 그랬다. 연약한 심장과 비분강개가 혼재된 젊은 교사였다. 그리고 등이 굽고 머리칼이 빠지고 눈이 침침한 세월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시국이다.
5공화국 신군부 정권이었고 교장실마다 머리 벗겨진 그의 얼굴이 걸려있었다. 그가 옥좌의 자리로 선출된 체육관 선거는 선거 경비 때문이었노라고 싹둑 자르면 똑똑한 지식인들도 창백하게 입 다물던 겨울공화국이다. 그래도 우리 깨어있는 스승끼리 자취방에 웅크려 김대중의 해외연설 녹취록을 몰래 들었고 유도혁, 강승구, 김종도 같은 벗들의 얼굴을 만나야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첫 발령지 소도시 소녀들은 수줍음 많은 초짜 선생을 놀리면서 풋풋한 로맨스 작전을 연출하면서 무럭무럭 꿈을 키웠다. 습작 시인 이재무가 가끔 백수 상태로.
“타는 가슴이 있어. 시헐.”
하숙방 문고리 열어 제키며 깡소주 비우다가 멱살잡이로 투닥거리기도 했다. 목련꽃 지던 봄날 벗 황재학이 ‘대화’ 잡지를 꾸러미로 갖다 줘서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새도록 되새기다가 ‘아, 나는 나쁜 놈이다’ 책상 펑펑 치다 보면 뿌옇게 동이 텄다. 루카치와 발자크 전태일을 독파하면서 혹시 ‘나도 이 시국의 풍파에 걸릴 것 같다’는 가위눌림이 엄습했고 또 실제로 신새벽 구두발 소리와 함께 학교를 쫓겨났다.(문교부 장관은 손재석) 『민중교육』 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이차구차 조서를 마친 수사관께서 갸우뚱 왈.
“돈도 안 생기는 일을 미쳤다고 하느냐?”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을 목숨 바쳐 사랑했고 영원히 변함이 없다고 설파할 수 없었다. 제자들에게 통일조국과 한반도의 올곧은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싶었노라, 고 역설할 때 그들은 ‘이제 겨우 안정되었는데’ 하며 코딱지 후비고 있었다.
4년 후 복직한 학교는 공주의 탄천중학교, 거기서 소설가 김홍정과 참교사 박종건을 만나서 ‘돌아온 탕아’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했음을 밝힌다. 그러나 89년 그해 여름 1500여 명의 교사가 학교를 쫓겨나면서 더 많이 마시고 더 많이 취했다. (문교부 장관은 정원식) 해마다 시국선언에 명단을 올렸고 교육부 징계위원회도 몇 차례 들락거렸다. 그렇게 4년을 보내고 93년 그 학교 이임인사 무대에서 꺼이꺼이 우는 철부지 스승 따라 1학년 담임반 아이들도 모두 울었다. 그 다음 학교 공주여중과 공주중학교에는 유지남 시인, 이석동, 유문상 등 전교조 선생들만 골라 끼리끼리 놀았다. 최루탄 쏟아지는 공주대 캠퍼스를 서성이며 해직교사 때보다 더 아프게 울었다.
그 후 고북중학교와 서산여중의 주말부부가 되면서 길준용, 김효찬 선생 등을 만났을 때는 어느새 장년의 몸으로 변신했다. 지천명이 지나면서 처음으로 건강 적신호를 느꼈고 그와 무관하게 여전히 마시고 취했다. 몇 권의 책을 발간하면서 출판기념회도 치렀으니 민망한 일이다. 어느 저무는 가을날이었던가, 아내와 침대에 누웠다가 문득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성공했음을 떠올리며 화들짝 놀랐다. 불안을 먹고 크는 자본주의를 새롭게 체득하던 충격이라니.
다시 ‘유구중 →유구공고 →대산고’로 옮기면서 세월의 시계추가 빛의 속도로 빨라졌다. 언제부터였나, 제자들의 이름을 까먹기 시작했고 전교조 집회에도 빠지는 경우가 생겼다. 각다귀 떼처럼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불안하게 줄어들 즈음이다.
1997년과 2002년 대통령 선거에는 내가 찍은 후보가 생전 처음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기뻤다. 그리고 내 기대와 달리 그들이 좌우 날개의 갈퀴질로 인정사정없이 쥐어뜯길 때 나는 울타리 벗들과 어금니 깨물며 스크럼을 지켰다. 그 사이에 숱한 벗들이 세상을 떠났다. 정영상, 윤중호, 최연진, 이석동 같은 벗들이 먼저 떠났고 김근태, 강구철, 유상덕, 오원진 같은 비운의 혁명가들도 구천에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나도 신산의 세월을 보냈지만 사이사이 호사를 누렸다. 자가용은 없지만 핸드폰을 구비했고 57세에는 공짜 비행기도 타보았다. 문제는 사소한 노여움이다.
“왜 명퇴를 안 하세요?”
이 시답잖은 질문에도 시불시불 스트레스를 받곤 했으니 오종종한 성품이긴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나에게 명퇴를 종용하던 마이크들은 교수나 교장, 국회의원이나 교육감들에게는 완죠니 다른 잣대로 접근했으니 그게 계급성이다. 그러니까 정년퇴임은 자신과의 싸움이란 말을 던질 여유가 없다. 고지를 코앞에 두면서 그런 추근거림은 사라졌지만 늙을수록 센티해졌다.
당신이 나가주면 젊은 사람 세 명의 월급이 채워진다, 며 명퇴 종용하던 벗들, 거부한다. 격렬하게 거부하며, 나 혼자 대숲에 숨어 소리친다. ‘캠퍼스 그늘 넓은 고목나무를 롤 모델로 삼았다’ 라고 외롭게 고백한다. 늙은 교사 이인호와 신현수 시인은 정년퇴임 그날까지 담임을 고수하고 연극 공연을 띄우는 중이다. 나도 뽑혀진 자리에 묘목 세 뿌리 심어 그들의 뿌리털 성성하게 뻗을 때까지 버팀목으로 남겠다는 결심을 간신히 토로한다. 하여, 통일의 그날 꿈나무 동반자들의 길잡이가 되고 싶은 것이다. 홍성 발 무궁화 열차 타고 함경도 온성역 지나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프랑스 도버 해엽 건너 스코틀랜드 지나 아이슬랜드 오오라까지 껴안는 게 꿈이다. 벗이여, 나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았다. 그대, 아직도 할 말이 남으셨나? (kbc57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