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애(南厓) 김수오(金壽五)
樂民 장달수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물산마을. 황매산 자락에 위치한 이 마을은 근래에 까지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선비들의 은둔지로 안성맞춤일 것 같은 이 마을에 전국 각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경서(經書)를 들고 찾아와 글을 읽었다.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 물산이란 명칭보다 ‘땅골(塘谷)’로 더 알려진 이 마을에 내당정사(內塘精舍)가 있다. 내당정사는 끊어져 가던 우리나라 유학의 실마리를 마지막까지 이어온 근세 대표 유학자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1978)이 학문을 정진하던 곳으로 당시 유수한 대학의 교수들이 중재의 가르침을 받고자 이 마을을 찾아왔으며, 중재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장자인 정관(靜觀)이 대를 이어 학생들을 지도하며 글 읽는 소리가 최근까지 마을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물산 마을을 찾았을 때, 글 읽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당시 글 읽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신고당(信古堂), 내당정사는 지금 인적이 끊긴 채 거의 폐허가 되어 있다. 물산마을은 예로부터 의성김씨(義城金氏)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남명 선생의 외손서이며 학문이 뛰어났던 동강 김우옹의 후예들로 가풍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중재 역시 동강의 후예임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며 가풍을 이어왔던 것이다. 동강의 6세손으로 200여 년 전 이 마을에 살았던 남애(南厓) 김수오(金壽五)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남애공의 8세손인 김옥진씨(60)가 마을에 살고 있다. 물산 마을에서 남애공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먼저 후손의 안내로 장천리에 있는 묘소를 찾았다. ‘南厓處士義城金公壽五之墓(남애처사의성김공수오지묘)’란 단아한 글씨가 가풍이 있는 집안의 선비묘 임을 한눈에 알려주고 있다.
남애공은 1721년 성주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남애공의 6대조 동강 선생이 태어나기도 한 유서 깊은 이 마을은 현재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도곡(思道谷)이라고 불린다. 성주읍에서 4㎞정도 떨어진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마을 주위에 일곱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동강의 부친은 이로 말미암아 호를 칠봉(七峰)이라 지었다 한다. 이 마을에는 1992년 복원된 청천서원(晴川書院)과 서당이 있으며, 서당 옆에는 종가가 있는데 곧 심산 김창숙의 생가이다. 남애공이 태어나기 하루 전, 모부인이 흰 송아지가 젖을 빨고 있는 꿈을 꾸었으며, 가족들이 이를 듣고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다. 태어나며부터 용모가 준수했으며 자라서는 신장이 팔 척이나 되었다. 5세 때 부친 남은공(南隱公) 여수(汝粹)가 육갑(六甲)을 가르치자 바로 이를 터득했으며, 10세 때 소학과 경서를 읽고 시를 지을 만큼 자질이 남달랐다.
11세 때 부친을 따라 삼가 구평의 오리(吾里)로 이사를 왔으며, 동학들과 학문에 정진하였다. 26세 때 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극진한 예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했으며, 상을 마치고 강좌지역(요즘 경북지역)으로 가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칠계(漆溪) 최흥원(崔興源) 등 당대 대선비들을 만나 학문을 질정하고 돌아왔다. 남애가 만난 대산은 당시 안동에서 학술을 강론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그는 퇴계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다. 칠계 역시 대구에서 학문과 제자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35세 때 부친이 병상에 눕게 되자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모친상처럼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상을 마치자마자 단성의 법물에 남애정을 지어 배우러 오는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며 스스로 호를 ‘남애’라고 지었다.
남애는 ‘남쪽 끝자락’이란 뜻이다. 세상의 번잡한 일을 잊고 궁벽한 곳에 살며 학문에 정진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남애공은 “나는 미천한 선비로 궁벽한 곳에서 산다. 고향을 떠나 여러 해 동안 객지 생활을 하다가 황매산 아래 단구현 법계마을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황매산 아래 도장골에 작은 집을 얽어 벽에는 당나라 시인의 시 몇 편을 걸어 놓고 책상 위에는 성현의 책을 얹어 놓고 약초를 뿌리고 국화를 심어 세상일을 잊고 숨어 살고자 했다. 그런데 하루는 객이 지나가다가 “너무 궁벽한 곳에 살지 않는가”라 하며 “취향 또한 많은 것 같다. 그대는 고기 잡는 것을 배울 것인가 아니면 농사짓는 것을 배울 것인가”라 물었다, 나는 조금 있다가 “나는 숨어사는 데 뜻이 있다.”라 말했다. 1767년, 즉 47세 때 남애가 법물 도장골에 작은 집을 지어 놓고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도와기(韜窩記)’란 글을 지었는데 그 내용 중 일부분이다.
남애공은 황매산 자락에 숨어 살며 선조인 동강선생이 지은 ‘속강목’을 세상에 발간하지 못한 것을 항상 애석하게 생각을 했다. 묵재 김돈, 지계 박정신, 상계 권위 등 이 지역의 선비들과 교유를 했는데, 이들이 모두 남애보다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자(字)를 부르기보다 반드시 호를 불렀다 한다. 벗들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던 남애공은 1795년 남애정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였다.
남애공의 평생 지은 글은 남애집(南厓集)에 실려 전한다. 2권 1책인 남애집은 공이 세상을 떠난 지 100여년이 지난 후 5세손 원(源)이 원고를 모아 간행을 하였다. 특이한 것은 남애집을 발간한 곳이 중국 회남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인데, 나라가 망하자 중국으로 망명한 한말 문장가 창강 김택영이 운영하던 곳이다. 당시 창강 김택영이 친하게 지내던 심재 조긍섭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간행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물산마을, 지금 비록 글 읽는 소리는 끊어졌지만 남애공을 비롯한 선비들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져 오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