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찾아 온 이는 니고데모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바,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다고 합니다. 높은 사람이지요. 그런 양반이 한 밤에 예수를 찾아옵니다.
이 만남이 어떤 만남인지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선거철에 정치인이 누구와 만나는 것은 뉴스가 됩니다. 왜 입니까? 만남 자체가 정치적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만남은 정치적 야합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어떤 만남은 선전포고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를 만나는 것은 단순히 시민 A씨가 시민 B씨를 만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뭐가 되었든 의미가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만큼 높은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예수는 누구였습니까? 예수는 전통적인 종교적 통제방식에서 한참 벗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는 근본주의적 경건을 어기고 엄격한 종교 관행을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는 당시에 평판이 나쁜 이들, 소외된 이들, 버림받은 이들, 죄인들과 어울렸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엄격한 바리새인들, 로마 점령군이 세운 대제사장들, 그리고 로마의 행정 정부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를 따르는 군중들은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고, 이를 의식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더더욱 불편해지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갔다는 것이 알려지면, 예수가 불편한 종교지도자들이 니고데모를 찾아 와 그의 사상을 검증하려 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때에 굳이 예수와 엮여 가며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보았자 니고데모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잃을 것이 많습니다.
제가 니고데모의 보좌관이었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하게 했을 겁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니고데모가 예수를 만나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그의 방문이 밤에 이루어진 것이었을 겁니다. 바깥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니고데모는 예수를 만나고자 했을까요.
정치적인 셈법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정치적인 판단으로 누르려 해도 눌러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니고데모의 움직임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아, 불안했구나. 니고데모는 불안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진짜면 어떻게 하지? 그가 진짜인데, 내가 그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저는 이걸 불안이라고 불렀지만 어쩌면 그에게 남은 몇 안되는 양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이 니고데모를 움직인 것입니다.
예수도 그걸 알아서 인지, 예수는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특별히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를 두고 비겁하다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에게 이런 말을 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라 말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태어남은 자리의 이동입니다. 안에서 바깥으로의 이동,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동입니다. 태중에 아기는 밖으로 나오며 안에서의 습을 버립니다. 이제 그는 탯줄을 끊어내고 폐로 호흡해야 합니다. 입으로 밥을 먹고 땅에 발을 딛고 몸을 움직여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더 이상 그 이전의 삶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전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남들의 눈을 피해 한 밤 중에 찾아온 정치인 니고데모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하고 되묻습니다. 자신이 이미 ‘늙었다’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다시 한번 단호히 말합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듣고 아마 어렵다고 생각 했을 겁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니고데모의 상황은 베드로나 안드레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어부 따위가 아니라 지도자씩이나 되었으니까요.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 포기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수는 니고데모의 이런 사정을 이해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니고데모를 어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먹고 사는 일 그 이상 영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알아 들었을까요?
예수가 말한 모세의 이야기는 민수기의 이야기입니다. 21장 4절에서 9절까지의 이야기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느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았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들은 조급하였다고 했습니다. 조급함이 곧 원망으로 바뀌었지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 하면서 보잘 것 없는 음식을 탓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그 간사한 마음에 뱀에게 물렸고,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죽을 처지였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사람들은 모세를 찾아왔고, 모세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매달라고 하시고, 그 구리뱀을 본 사람들은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음을 꼬집습니다. 다시 태어나기에는 늦었다 말하는 니고데모가 반찬투정을 하는 광야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는 그러면서도 니고데모에게 계속해 이야기합니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런 말하기는 니고데모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어찌나 사랑하시는지 또 구리뱀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이번에 구리뱀은 자신이라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오늘 이 본문을 두고, 니고데모를 빛을 미워하는 사람이라 평가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밤’에 찾아온 것도 니고데모의 이런 속성 때문이라고 말이지요. 니고데모를 소심한 신앙인, 종교적인 현상유지를 원하고 두려움에 마비되어 더 나아가지를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니고데모는 그 평가대로 별로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는 욕심이 많고 무엇 하나 잃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는 별로인 것이 분명한데 사실 저는 니고데모가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좋아하는 편입니다. 니고데모가 너무나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엾고,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애틋합니다. 이런 마음을 아십니까.
사실 니고데모 이야기를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감리교 본부 앞에서 농성을 할 때에 농성장을 찾아온 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우리의 농성을 응원하면서도 대놓고 응원을 할 수 없는 처지의 인물이었는데, 그가 제가 규탄하는(?) 감리교 본부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직장동료들이 출근하기 전인 동트기 전 새벽이나 퇴근하고 난 한밤중에만 농성장에 찾아왔습니다. 그가 얄미울만도 한데 사실 저는 누구보다 그의 방문이 위로였습니다. ‘아, 사람들 중에서는- 응원하고 싶어도 상황 때문에 못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의 방문으로 그런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밤에라도 찾아온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낼 수 있는만큼 용기를 낸 것이고, 저는 그 용기에도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한 밤에 예수를 만났고, 아마도 짧은 만남 끝에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곧 동이 텄을 테고 그는 아침을 맞이했겠지요. 아침 해는 참 공평해서 니고데모의 머리카락도 데웠을 겁니다. 니고데모는 니고데모가 아무리 원해도 밤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어쩔 도리 없이 아침 맞이했을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서에서 두 번 더 등장합니다. 두 번째 등장은 7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는 장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그 때 예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어 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찾아다니도록 만들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순간에 등장하여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주의를 줍니다. 예수를 두둔하는 것이지요. 세 번째 등장은 예수의 시신을 매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죽음 앞에 대부분의 제자들이 도망갔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의 곁을 지키고, 그의 시신을 베로 감쌉니다. 니고데모가 변화하지 않았다 말할 수 있습니까?
그 행정실 목사님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그도 그가 아무리 원해도 밤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도 어쩔 도리 없이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저는 니고데모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밤에라도 예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두려움이 크다면, 그 두려움을 안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예수에게 가까이 가야하는 것 아닌가 하고요. 그렇다면 그 다음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빛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밤에 예수를 찾는다면 하느님께서 예수를 만나고 온 우리들의 머리를 이내 아침 해로 데우실 겁니다. 곧 동이 틀 테니까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빛은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어쩔 도리 없이 빛으로 나아 갑니다. 이 빛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누구에나 있는 것이지만 밤에 움직인 이들이 빛의 소중함을 아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 합니다. 부족하다 생각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처럼 밤에라도 움직여야 합니다.
빛나는 해 아래에서 지난 밤의 일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게 나의 부족함에 대한 부끄러움이든, 먹고 사는 일의 비참함이든 간에 무엇이든 느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움직임에 부족함이 있다면, 세상을 이렇게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라도 움직인다면 하느님께서는 곧 아침이 오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야기를 이렇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