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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습수 |
짧게는 4박 5일, 길게는 4∼50일간의 바깥 나들이에서 주운 이삭들이 내 기억의 창고에 적지 않게 쌓여 있다. 주워놓고 보니 알맹이가 꽉 찬 것도 있고 빈 쭉정이들도 많았다. 좋은 이삭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고 핀잔 들어 마땅할 쓸모 없는 것들도 있다. 세월과 함께 생동감을 잃어버린 것도 있고 아직도 생명력을 가진 것들도 있다. 나는 이 이삭들을 '이것은 금이요, 저것은 돌이다' 하며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금이나 돌 모두 필요한 것이지만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레드 스타(Red Star)와 그린 백(Green Back)
1989년 11월. 런던 히드로공항 발 도쿄행 영국항공기가 기름을 넣기 위해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했다. 승객들은 모두 통과여객 대합실로 나가야 했고, 나는 습관대로 카메라를 챙겨 들었다. 그 순간 이상한 불안을 느꼈다. 생전 처음 잠깐이라도 밟아보는 공산 대제국 소련 땅. 촬영을 해도 되는지 걱정되었다. 승무원에게 물어봤다. "글쎄요. 1930년대의 시베리아…?" 승무원의 대답이었다. '이 친구 풍이 좀 세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카메라를 가방 속에 다시 넣은 뒤 맨손으로 브리지로 나갔다. 한 무리의 '군복'들이 내리는 승객들을 째려보며 감시하는 듯했다. 그 준엄한 분위기에 눌려버린 나는 그들이 그 유명한 국가보안요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엔 세관원 공항관계자들도 포함되어 있고 단지 '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무시무시한 '기관원'으로 오인한 무식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통과여객 대합실 부근에는 간이면세점이 있게 마련이다. 소련제 물건을 살펴보았다.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목각인형과 캐비아뿐이었다. 소련제 보드카를 한 병 달라고 했더니 판매원은 시큰둥한 얼굴로 시카고에서 만든 스미르노프를 내밀었다. 1985년 당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엄청난 변혁이 진전되고 있었고, 그 변혁의 결과에 대한 희망과 불안이 복잡하게 혼재하고 있었던 1989년이었다. 1996년 6월에 다시 가본 모스크바와 쌍뜨빼쩨르브르그는 엄청나게 변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라 이름은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러시아 공화국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야말로 주마간산식 여행을 하는 우리 같은 나그네들에게도 사회 분위기의 자유로움이 거의 완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밤의 모스크바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엄청난 규모의 별 넷짜리 코스모스호텔 로비에서는 팔등신의 금발미녀들이 관광객들에게 윙크를 보내기도 하고, 로비 라운지나 바에서 손님들과 어울리며 뭔가를 흥정하는 모습도 보인다. 심지어 호텔 객실에까지 전화를 걸어 자신은 매우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이라며 하룻밤 친구가 되어 주겠단다. 이런 풍경은 그 해 4월의 부다페스트에서도 목격되었다. 아름다운 두나(다뉴브) 강가에 있는 포럼호텔 주변에는 백인미녀들이 노골적으로 호객한다. 그러면서도 이러저러하게 생긴 여자들은 조심하라며 타일러주기도 한다. 그들은 집시들이기 때문에 불결하다며 친절하게 안내해 주기도 했다. 이미 한국의 홍등가 특히 동두천 의정부 지역에서 한때 세계 유일의 맞수였던 미국 군인들을 상대로 달러를 벌고 있는 러시아 여성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여성들뿐 아니다. 모스크바 시내의 노점에서는 옛 소련인들이 자랑했던 '붉은 군대'의 군모, 훈장, 각종 부대마크들을 기념품으로 내다 팔고 있었다. 군모와 훈장은 군인의 명예이자 자존심이다. 1992년 5월 하얼빈에서 만난 어느 러시아 상인은 꽤나 행복해 보였다. 중국과의 물물교환으로 가져가는 중국산 또는 제3국산은 대형 컨테이너에 실려 유럽까지 가서 비싸게 팔린다는 것이었다. 공산화된 월남의 호치민 시 외곽에 자리한 유명한 구치터널에서는 미군들이 놓고 간 M16소총을 관광객들로 하여금 사격해보게 하고 달러를 벌고 있었다. 적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으로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긁어내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두꺼운 철문을 녹이는 것은 코카콜라이며 코카콜라가 녹인 그 철문의 틈새로 미국 달러가 들어가면 공산주의 체제는 혼미해지고 붕괴의 길로 간다. 레드스타는 점차 퇴색해지고 그린백은 예상치도 못했던 위력을 발휘한다. 1992년 중국을 4∼50일간 여행하면서 받은 강렬한 인상의 하나는 북경의 보수적 지식인 그룹의 고뇌와 갈등이었다. 그들은 당시 중국의 급속한 개혁 개방정책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고난이 닥쳐오면 인민의 앞장에 서고 행복의 날이 오면 인민의 뒤편에 서라'는 중국 공산당원의 신조를 철석같이 지켜 왔건만, 개혁 개방 이후 사람 취급도 않던 건달들이 불하 받은 군용 지프차를 타고 목에는 일제 카메라를 걸고 나타나서 골수 공산당원을 얕잡아 보는 데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공산당원이었고 모택동의 문화혁명 기간에는 하방(下放)되어 숱한 고난을 겪기도 했지만 아직도 모주석(毛主席)을 존경한다고 했다. 그 지식인의 가슴을 거의 차지했던 중국통일의 주역 모택동의 자리에 지금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잡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대 중흥을 선도한 실용주의자 등소평이 더 크게 앉아있을지도 모른다. 체제변화에 따르는 이와 같은 이념적 갈등은 다른 체제로 갈라져 있는 우리에게도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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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불공평하다
아름답고 깨끗하고 특이한 자연환경을 접하면 환희에 빠져 거듭거듭 경탄하다가도 나는 가끔 하느님을 원망했다. 북구라파의 원시림과 만년설, 빙하가 만들어 낸 피요르드, 야생동식물의 천국 아프리카 평원, 중국 계림의 이강 양편에 줄줄이 늘어선 천태만상의 산봉우리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위에 제각기 매력을 풍기며 떠 있는 북부월남 하롱베이의 3천 5백여 섬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고혹적 빛깔을 내뿜는 남태평양의 산호바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평화로운 목초지대 그리고 해석불용(解釋不容)의 카리스마를 감추고 있는 신비의 바이칼호수… 대평원, 대폭포, 역사를 품고 있는 태산들…. 어찌하여 하느님은 이 귀한 아름다움 중 한 개만이라도 우리 땅에 주시지 않고 척박하기 그지없는 산야만을 우리 앞에 펼쳐 놓으셨을까.
오슬로 교외의 약간 높은 산언저리에 있는 소박한 산장 모양의 소리아모리아호텔에 도착한 것은 밤늦은 시각. 산 위를 덮고 있던 안개가 점점 호텔을 두텁게 감싸며 내려왔다. 안개 속에 보이는 것은 희미한 건물의 형체와 고전미 풍기는 야외등 밖에 없었다. 여장을 풀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지 않아 호텔 밖으로 나와 호텔 뒤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찾았다. 3∼4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오솔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 올라갔다. 그것은 꿈같은 길이었으며 흰 뭉게구름 속을 걷는 몽환의 길이었다. 안개를 헤치며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가 문득 실종되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난리가 나겠지. 일행, 호텔측, 노르웨이 경찰, 대사관, 국내 가족 친지, 신문 방송, 자살, 타살, 납치…. 이런 낱말들의 의미가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사람은 이럴 경우 잠깐씩 실성해버릴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헬싱키에서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대형 유람선으로 발트해(海)를 지나면서 나는 자살의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내 머릿속에 심어져 있던 발트해의 험상스런 이미지는 한 순간에 증발해버렸다. 그 바다의 잔잔한 물길은 낙조를 받아 금색비단이 찰랑이듯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다. 나는 30층 아파트 높이의 상갑판에서 그 아름다운 금빛 물결을 완상하며 돌연 스르르 미끄러지듯 그 금빛 평온 속으로 빠져 죽었으면 하는 충동을 느꼈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은 이렇게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실행되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멋쩍어했다. 삶이 지겨워 가족들 모두를 함께 저승으로 몰고 가는 가슴 아픈 오늘 우리사회 현상을 생각하면 발트해상에서의 나의 자살 충동은 고백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낸 위대한 문화유산들을 보면서도 나는 부질없이 우리 조상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이태리, 영국, 불란서, 독일, 체코, 헝가리, 러시아, 중국, 캄보디아, 스리랑카… 분포된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그것을 축조할 당시의 최고 권력자가 왕권의 절대성과 왕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세웠거나 그 시대 사람들의 신앙심의 발로일 것이다. 그리고 피라미드와 만리장성, 앙코르 유적군 등은 현대과학으로도 쉽게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의 머리와 힘으로 건설한 것이고 수백만 백성들의 피와 땀이 함께 섞여 세워진 금자탑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런 문화유적지를 자랑으로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향하여 나는 '조상 덕 팔아먹는 사람들'이라며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농담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반만년의 역사', '금수강산',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라는 관광홍보물을 보고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서울 남대문을 보여주고 '이것이 우리나라 국보1호요' 하면 그 관광객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상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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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또 다른 사람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여행의 큰 즐거움의 하나다. 인구가 조밀하지 않은 핀란드, 노르웨이 같은 북구라파 지역 사람들에게서는 우리나라의 시골 농부들처럼 착하고 순박한 인정을 느꼈다. 젊은 시골여성들은 화장도 하지 않는 천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노르웨이에서 자동차로 시골길을 달리다 잠시 쉰 어느 마을은 전형적 북구풍의 자연과 민가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고, 오가는 동네 아낙들은 하나같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가정교사 줄리 앤드류스와 같이 맑고 발랄한 인상이다. 천혜의 환경은 사람을 이렇게 선천적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나보다.
반면에 베네룩스 3국 사람들의 친절은 교육과 문화 전통으로 닦여진 후천적 교양과 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만나본 터키 사람들의 순박함과 6·25 한국전쟁 때의 인연 때문에 그들에게 가졌던 나의 바르지 못한 선입관을 말끔히 씻을 수 있었고 '솔롱고(아름다운 동방의 나라)'라는 말 한마디에 깜박 죽는 몽골 사람들과는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있다는 것을 서로의 몸짓으로 재확인하고 더욱 따뜻한 친애감을 느꼈다. 이국땅에서 느끼는 혈족애(?)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늘 내 몸의 일부처럼 붙어있는 카메라 때문에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지대에서 잠시 쉬는 틈에 길거리에 나와 무심히 앉아있는 원주민 여성들을 향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 순간 여러 개의 돌멩이가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도망을 쳤지만 나의 행동이 그들을 불쾌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울란바따아르에서는 도심 한복판에 그것도 대낮에 두 명의 사내로부터 카메라를 탈취 당할 뻔했다. 그들은 내가 자기들을 찍으려는 줄 알고 와락 덤벼들었다. 그 중년의 사내들의 입에서는 진한 보드카 냄새가 풍겼다. 어찌어찌하여 봉변을 면하긴 했지만 지금도 그 취한들의 거친 행동을 잊을 수 없다. 울란바따아르대학에서 교환 교수로 있던 K교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들은 노상강도나 깡패가 아니고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 후에 국가로부터 받던 온갖 혜택들이 줄거나 폐지되어 살기가 어려워지자 거리에 나와 불쑥 불쑥 그런 행동으로 불만을 표출한다는 것이었다. 정치의 불안과 경제의 피폐는 선량한 백성들을 이렇게 만들기 마련이다.
나이로비에서 마사이마라 부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가는 도로는 온통 함몰된 구덩이 천지였다. 외국에서 차관 받은 개발기금을 권력자들이 다 떼먹고 아주 적은 돈으로 고속도로를 만들었으니 개통한 지 몇 달 만에 누더기로 변할 수밖에 없다며 일반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지만 부패한 권력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 나라 국가 지도자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게 들렸다. 1996년 바르샤바에서는 이런 블랙유머가 유행하고 있었다. 바웬사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정답은 바웬사는 영어를 모르고 클린턴은 폴란드어를 못한다는 것이 공통점이고, 차이점은 클린턴은 영어를 썩 잘할 줄 아는데 바웬사는 폴란드어를 너무 할 줄 모른다는 것이란다. 그다니스크 레닌 조선소의 전기공 바웬사를 대통령으로 뽑아 놓고는 대학생을 비롯한 많은 폴란드 국민들이 크게 실망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유행한 유머였다. 다른 경우도 있었다. 1991년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하기 몇 시간 전 몽골의 당시 오치르바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조지 H. 부시대통령(현 부시대통령의 아버지)을 만났다. 부시는 오치르바트에게 그 공격계획을 말해주고 공격이 성공하기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는 걱정을 했다고 했다. 이에 오치르바트는 부시에게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부시의 코를 눌렀다고 한다.
"각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이미 7백년 전에 하룻밤 사이에 바그다드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대정복자 칭기즈칸의 후예다운 오치르바트의 이 말은 그 뒤 몽골인들이 매우 자랑스럽게 자존심을 표출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칭한다. 고양이가 인간을 그렇게 우러러 붙여 준 이름도 아니고 기러기가 그렇게 인간을 높은 자리에 앉혀 주지도 않았다. 인간이 그 사악함을 감추기 위해 그토록 고귀한 이름을 스스로 붙인 것인가. 나치독일의 반 유대 광신자들이 5년 동안 4백만 명 이상을 독가스 등 무기로 살해한 아우슈비츠,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온갖 살상용 독약을 실험한 하얼빈 외곽의 일본관동군 731부대, 제 민족, 제 동포를 곡괭이와 몽둥이로 2백 5십만 명이나 살해한 캄보디아 폴포트의 킬링필드 등은 인간 사악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오늘도 제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며 그 악마성을 그럴듯하게 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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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의 고통, 동물의 자유
인간은 부족시대부터 자연조건에 따라 또는 작위적으로 경계를 만들며 살아왔다. 그것은 자기 보호를 위한 투쟁의 접점들을 연장한 것들이었으며 생명선이었다. 근대국가화 되면서 인간이 만든 경계는 더욱 강고해졌고 치열하고 엄혹한 다툼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세계 질서의 재편은 또 다른 경계들을 만들어 내었다. EU 국가들처럼 여러 나라가 사실상의 무국경과 대통합을 이뤄 나가는가 하면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의 경우 갈갈이 찢어져 원수처럼 싸우고 있다.
오늘날 세계인의 화두가 된 '글로벌 시대', '세계화의 시대'는 모든 국가들이 문을 활짝 열고 서로 필요한 대로 어울려 살자는 주장이지만, 실은 강자의 논리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고차원적인 성격이 훨씬 강하다. 강자는 제 집 문을 굳게 잠궈 놓고는 약한 나라의 안방은 물론 다락방까지 다 열어젖히란다. '약한 자여 눈을 떠라'는 얘기인지 '힘없는 자는 눈을 감으라'는 뜻인지 분간하기도 고통스럽다. 역사를 제 입맛대로 끌고 가고 기록을 제 맘대로 남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강자의 몫이며 승리자의 특권이다. 그러나 자연의 경계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대륙에 살고 있는 육상동물들이나 철새들은 인간의 경계를 완전 무시하고 필요에 따라 이동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미국 남부 플로리다반도 끝에서 30여 개의 섬들을 이은 연륙교를 따라 가다 보면 '미대륙 최남단'이라는 표지가 있는 키웨스트섬이 나온다. 헤밍웨이가 오랫동안 살았던 아름다운 섬이다. 이 연륙교의 오른편은 멕시코만이고 중미를 거쳐 남미의 북부에 이르는 왼편의 바다는 카리브해이다. 카리브해는 대서양의 내해로 보면 된다. 그 이름이야 어떻든 모두 인간이 붙여놓은 이름이고 이 지역에 인접한 나라들의 이해관계 또한 항상 전략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멕시코만과 카리브해를 넘나드는 수백 종의 물고기떼들은 인간의 그러한 대립과 투쟁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그리고 원하는 대로 왕래하며 살아간다. 키웨스트로 향하다가 잠시 내려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떼들을 보면 그들이 마치 '누구 맘대로 멕시코만이니 카리브해니 하는 따위의 문패를 달았어. 진짜 집 주인은 우린데' 하며 항변하는 것 같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남단의 희망봉 끝에 서서 바다를 보면 왼편은 인도양이고 오른편은 대서양이다. 이해관계를 가진 열강들에 의해 이 지역에도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의미가 부여된다.
인간이 만든 경계는 이와 같이 작위적이고 전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경계는 있으되 의미는 전혀 다른 한곳이 있다. 바로 터키의 이스탄불이다. 저 유명한 블루 모스크와 성 소피아사원이 있는 쪽은 서양이며 바다 건너 저편 우스크다르 쪽은 동양이다. 이스탄불이라는 한 도시가 아름다운 보스포러스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져 있다. 관광객들은 뱃길이나 해상 연륙교를 이용하여 한두 시간 안에 동서양을 넘나드는 절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낭만 가득한 경계는 많을수록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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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의 미스 가이드
해외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현지 안내원이다. 여행지의 역사, 지리, 문화, 사회,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예비지식을 갖추지 못한 여행객들에게 올바른 내용을 요약적으로 전해주는 자질이 필요하다. 이집트 여행을 마친 뒤 머리 속에 남는 인물은 온통 파라오, 람세스뿐이다. 유럽을 여행하면 가는 곳마다 합스부르그왕가의 얘기가 나온다. 람세스 스토리와 방대한 네트웍을 형성했던 합스부르그왕가의 얘기를 어느 정도로나마 정리해서 얘기해 줄 수 있는 여행자가 몇이나 될까. 사전에 예비지식을 습득하고 떠나야 할 일은 여행자의 몫이긴 해도 말이다.
나는 아주 한심한 현지 안내인을 두 차례 경험한 바 있다. 아프리카 여행 중에 만났던 현지 안내인은 아프리카 주요국가 예컨대 이집트 알제리 리비아 남아공화국 등 주요국가의 근대사에 대하여 전혀 백지상태였다. 그가 아는 것은 사파리뿐이었다. 남·북 월남 여행 때의 현지 가이드는 아주 위험천만한 청년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하노이 외곽에 있는 홍하(紅河)를 건너지 못해 하노이에 입성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 엉터리 가이드는 월남전 당시 한국군의 월남 양민학살을 기정사실화해서 설명했고, 라이 다이한의 숫자를 말하면서 그 중 약 3%는 한국 군인들의 자식이라고 말했다.
두 차례나 베트남 전선에서 근무했던 나로서는 그 무식한 안내원의 터무니없는 설명을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어 우리 일행과 그 가이드의 양해를 구한 뒤 잘못된 설명을 바로잡아 주었다. 첫째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단 1명도 북위 17도선 이북에서 지상전을 전개한 일이 없으므로 하노이 진공을 위한 홍하 도하작전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설에 대해서도 월남전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로 나온 과장된 것이라는 점을 일러 주었다. 동서고금의 세계 전쟁사에서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당하지 않는 예가 어디에 있는가. 특히 한국전쟁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군과 우군의 식별이 분명한 정규전만을 생각하고 있으나, 월남전은 전선과 후방의 경계가 없고 베트콩과 양민을 구분할 수 없는 특수 유격전의 전형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언제나 양민을 가장한 적의 총탄을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매 순간마다 계속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월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전투수칙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 받으며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것을 강조해 주었다. 끝으로 라이 다이한 문제도 그렇다. 군인은 첫째 시간이 없다. 월남여성과 놀아날 돈도 없다. 거기다가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전장의 긴장감 속에 어떻게 한가하게 현지여성과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뜨거운 피가 솟구치는 젊은이들 모두가 전장에서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욕구를 억제할 수 있는 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의미를 생산할 만한 숫자는 아니다. 느긋하게 병영생활을 하는 주한 미군들과는 어느 하나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라이 다이한의 숫자가 5천 명에서 1만 명이라는 큰 폭의 오차를 보이고 있듯이 실상을 알지 못한 젊은 현지 안내인의 무책임한 설명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틀린 것을 바로잡아 주니 나의 속이 후련했고 일행들은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박봉의 가이드가 관광객들을 쇼핑에 내모는 것도 불만스러운 일인데 예비지식 없는 관광객들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마치 사실인 양 전해 듣고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면 외화낭비는 둘째로 치고 분통이 터질 일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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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새 이삭을 줍고 싶다
부지불식간에 몸 안에 쌓여 고착화된 관념들, 편견과 왜곡과 오류들을 여행은 잠시나마 씻어주고 바로잡아 주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새롭게 얻은 지식이나 체험들은 다시 또 하나의 편견과 왜곡과 오류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체험으로 쌓인 나이에 어떤 의식으로 무엇을 보고 느꼈느냐에 따라 수용의 결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가면 변하고 또 변한다. 세상사 변하지 않는 것 어디에 있는가. 단 한가지가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이 진리의 한마디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종반과 21세기 초반에 내가 주운 이삭들은 또 곧 쓸모 없는 것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새 이삭을 줍고 싶다. 인생은 흰 망아지가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잠시 보는 것(人生如白駒過隙)같이 빨리 지나간다고 장자(莊子)가 말했다던가.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이제는 말에서 내려 천천히 걸으며, 나의 새 이삭들을 주워 모으며 그 이삭들이 왜 그때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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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생은 흰 망아지가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잠시 보는 것(人生如白駒過隙)같이 빨리 지나간다고 장자(莊子)가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