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영조 때 이주국이라는 한량이 있었는데, 무과에 급제했지만 권신에게 미움을 사서 보직을 못 얻어 속만 끓고 있는 신세였다. 하루는 삼청동 뒷산에서 심심풀이삼아 활을 쏘며 소일하고 있는데, 좋은 장끼 하나가 꺼껑 푸드드득하고 놀라서 날아가기에, 겨냥해 쏘았더니 정통으로 맞고 그 아래 대궐 같은 큰 저택 뜰 안으로 떨어졌다. 곧장 내려와 그 집 솟을대문 앞에서 하인을 불러 꿩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하인은 대감의 세력만 믿고 그런 일이 없다느니, 있어도 내줄 수 없다느니 해 자연 언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는데 그 댁 청지기가 쫓아나와서, 대감마님 분부시라며 들어와 얘기하라고 전갈한다.
사랑 마당에 들어서서 곧장 층계 위로 올라 군례를 드리니, 영창을 열고 내다보던 노대감은 우선 이주국의 장부다운 기상에 호감이 가서 하인들을 꾸짖었다. “남의 꿩이 들어왔으면 선선히 내어줄 것이지, 왜 일을 버르집느냐?” 그리하여 하인들이 숨겨 놓았던 꿩을 내어온 것을 보니 화살이 장끼의 산멱통을 꿰뚫고 있었다. “자네 활솜씨가 엔간하이그랴! 내 마침 심심하게 앉아 있던 중이니 들어와 얘기나 좀 하세. 그리고 출출할 테니 술이라도 한잔하고…” “그러시다면 이 꿩을 안줏감으로 드리겠습니다.”
이리하여 주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이분이 다름 아닌 홍봉한이니, 당시 권세를 한 손에 쥐고 있는 분이다. 홍대감이 허우대가 훤칠한 청년 이주국과 마주 앉아 얘기해보니 학식과 기개가 보통이 아니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부엌에서 장끼볶음을 안주로 술상이 나왔다. 잔을 주거니 받거니 웃음꽃을 피워가며 얘기를 나누다, 홍대감은 지필묵을 갖고 와 동생인 이조판서 인한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주국에게 보직을 주라는 내용이다.
하인을 시켜 당장 갖다주라 이르고 다시 술잔이 오갔다. 술 한 호리병을 마시고 나자 심부름 갔던 하인이 답장을 들고 왔다. 이번엔 보직을 줄 수 없으니 다음에 보겠다는 내용이다. 그것을 본 이주국은 다짜고짜 홍대감에게 “꿩값을 주십쇼. 제 꿩은 산 것이었으니 예사 꿩값 몇곱을 주셔야 합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홍대감은 이주국에게 돈을 던졌다. 그리하여 꿩값을 받아든 그는 대문을 나서면서 웃었다. 이튿날 기별지에는 그의 보직이 발표되었다. 그 길로 번듯하게 군복을 갖춰 입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홍봉한 대감댁이다.
“덕분에 한자리 했습니다. 어제 오죽이나 역정이 나셨겠습니까? 그 길로 그만두라는 쪽지를 보내셨을 것이고, 이조판서께서는 또 홍대감의 노여움이 대단하신 것으로 여겨 즉시 한자리 배정하신겁죠. 그저 죄송합니다.” 홍대감은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