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금요일
경기도 동탄에 있는 딸 내외가 우리가 보고 싶다고 전화가 왔다.
우리 부부는 오랫만에 사위집을 방문했다.
집에 도착하니 딸은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 외손자가
"할머니, 할아버지!"하면서 품에 안긴다. 유치원에 맡겨진 둘째도 할어니, 할아버지가 왔다고 좋아한다.
서울에서 은행에 근무 한 사위가 퇴근하여 집으로 왔다.
6명이 오랫만에 한 자리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많은 애기를 나뉘고 아파트 둘레길을 걸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가진 젊음의 새댁들인 것 같다.
지방에서 서울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 연세가 많으시고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딸집에 왔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데가 좋다. 주위에 전원의 목가적 서정과 향취어린 조용한 산야가 있고,
끝없이 펼쳐진 갯벌과 푸른 바다가 언제나 나의 주위에 있으니까.
난 왜 서울이 좋지 않을까?
너무 복잡하고 인구가 밀집되어서?
아파트 밀집지역인 동탄도 마찬가지다. 답답한 아파트에 들어가면 그만인 것을.
마침 외손자들 공부방에 '성곽의 꽃,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이 정조대왕이 지은 성곽으로 사적 3호이라고
적혀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고 란 종이가 벽에 붙어 있다.
평상시 관심은 있었으나 한 번도 안 가 본 곳이라 가고 싶었다.
다음 날 토요일,
모두가 쉬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관람키로 하였고, 남자 네 명만 갔다.
수원화성은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인 산소를 수원화산으로 옮긴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2년9개월만인 1796년 9월에 완공한 성곽이며, 둘레가 5.7km, 성곽의 높이가 4~6m로,
실학자 유형원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약용이 설계하였고, 석재와 벽돌을 병용, 화살과 창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가졌다고 한다. 이후 200여년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고 하였으나, 축조 상황을 기록해 놓은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1997년 12월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화성은 시내에 있어 많은 차들 때문에 막힌다. 1시간 동안 지나 수원화성에 도착했다.
들어서자 마자 창룡문 앞 잔디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6월은 보훈의 달로 경기남부보훈지청에서
'2016년도 나라사랑 한마당' 을 진행하고 있었다. 연무대 옆 학교 앞 조그만한 공터에 주차할 수 있었다.
먼저 성곽을 돌아보기로 했다.
각루는 군사적 요새지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으로
수원화성에 총 4개소(동남각루, 서남각루, 서북각루, 동북각루)가 설치 되었으며,이중 동북각류는 보물 제1709호인
방화수류정(訪花隨遊亭)부르며 주변 조화가 용연과 잘 어울려 조선후기 건축미를 대표한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지음)에 보면 답사의 초보자들은 이름난 정자에 이르면 정자의 건물부터 유심히
살피지만 중요한 것은 정자의 누마루에 걸쳐앉자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는 것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방화수유정을 신발를 벗고 내려다보니 시내가 탁 트이고, 앞에는 용연과 잘 어울린다.
방화수류정에서 북암문을 지나 용연 못을 돌아보고 화홍문을 다다른다. 수원천이 흐르고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병기를 보관하였던 장소도 보인다. 북쪽에는 북수문(北水門)이 있는데 별칭인 화홍문(華虹門)이라고도 한다.
화홍문은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한다고한다.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에 북동ㅍ루가 있다. 포루는 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이 있고, 군사들의 대기와 휴식 장소와
공격 시 활을 쏘는 구멍이 있는 누각을 말하고, 화성에는 포루는 북동포루를 비롯하여 10개소가 있다.
장안문(長安門) 바로 옆에는 북동적대(北東適臺)가 있는데 옹성보다 높아 감시가 수월하고 적을 방어하는 시설물의
북서적대 등 2개소가 있다.
수원화성을 출입하는 4개문(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의 관문이 있다.
이 중 팔달문과 장안문은 각각 남북의 정문으로 벽돌로 쌓는 반원형 옹성이 문을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다시 돌아서 창룡문(蒼龍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언덕길을 힘들게 올라서니 동암문(東暗門)이 나온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고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매워 폐쇄하도록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암문은 동암문을 비롯하여 서암문, 서남암문, 북암문 등 4개소
이다.
군사를 훈련하고 무예를 단련하였던 동장대(연무대,鍊武臺)가 나온다. 장대는 서장대(화성장대)와 같이 2개소로
이루어져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 정상에서 성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 이었고, 연무대는 군사
훈련소로 쓰었다.
연무대를 나오니 화성열차가 왕래하고 있었다. 팔달산부터 연무대까지 수원화성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관광열차였다. 앞부분은 임금을 상징하는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고, 객차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마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코스는 팔달산 →화서문 → 장안공원 → 장안문→ 화홍문 → 연무대를 편도 운행 하는데
요금은 개인 1,500원, 청소년 1,100원, 어린이는 700원이었다.
외손자들은 화성열차에 관심이 많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많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말하고 솜사탕을 사 주었다.
연무대에서 국궁체험이 있었다. 정조대왕 시대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훈련하는 장소였기에 활쏘기 체험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4대문 중 동쪽문인 창룡문(蒼龍門)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는데 외손자들이 배고프다고 한다.
외손자들에게 너희들은 화성을 가까우니 언제나 올 수 있고, 할아버지는 멀어서 화성에 오기가 쉽지 않다고
했으나 사정하였으나 집으로 가잖다.
아쉽지만 화성행궁(華城行宮)의 여기서 관광을 접기로 하고,
화성행궁과 화령전, 치성, 공심돈, 서장대 등 다음을 기약하고 집으로 향하였다.
첫댓글 년전에 두번이나 다녀온 수원화성을 다시금 꼼꼼히 둘러봅니다. 빡죽님의 자세한 설명에 감탄하며 편안히 둘러본 불성실(?)을 반성합니다. 수원화성에 당도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것은 끝없이 둘러쌓인 성곽과 넓다란 잔디밭이 아닐런지요. 반듯반듯하게 쌓아올린 성곽을 바라보며 유네스코에 등재할만하다하며 감탄한 기억이 납니다.
화성행궁으로 넘어가면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환갑잔치상을 볼수있을겁니다. 그런데 정조는 왜 굳이 잔치를 정치기반의 거점인 수원에서 치렀을까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가까이에서, 화해하기를 바랐던건 아닐까요?
빡죽님의 글을 통해 퇴근할 아들을 기다리는 그때의 설레임을 다시 느낍니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을 빡죽님의 자세한 설명에서 충분한 가치를 느낍니다. 수원화성을 두루 살피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것 같네요.정자 누마루,넓다란 잔디밭에서 여유도 부려봐야 할 것 같구요. 수원화성 가는 길,관광열차 운행료까지 상세한 정보 감사합니다.
정약용 선생님을 존경하여 가보고 싶은 곳인데 한번은 갔는데 네비가 어디 식당을 알려주어서 밥만 먹고 와 버렸소.
가도 심도있게 목적하에 가야 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다음부터는 역사기행할 때 꼭 피기도구 가지고 기록하여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