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과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만납니다. 김치찜이나 찜닭, 곱창, 이런 메뉴와 함께 소주를 마시는 사이입니다. 특별한 주제가 있지 않는 한, 주로 한 계절을 각자 어떻게 보냈는지 나누는 사이. 대개는 6시에 만나서 11시에 헤어지는 사이입니다. 헤어질 때마다 그는 제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 말을 들으면 ‘내가 무슨 감자냐? 양파냐?’고, 입을 삐쭉대지만 그래도 내심 안심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게 우리의 루틴입니다. 제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입니다. 제가 졸업한지 그래도 한 7-8년이 흘렀으니 10년 가까이 된 사이이죠.
월요일에 만난 그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교회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제 곧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무언가 색다르게 해보고 싶은데 색다르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왜 색다르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제게 던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딱히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러게 왜 색 다르게 해야 하지? 그러고는 그가 덧붙이기를 이미 네가 강단에 선 것부터가 색 다른 일이니 굳이 힘써서 색달라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애쓰면 눈이 피로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괜히 교인분들 괴롭히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괜히 내일모레 칠십이 아니라고 그를 치켜세우면서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엄마가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욕심을 덜어내고 부활절 감사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만. 그래도 조금 다르게 제가 내려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나눌 때 제가 여러분들과 눈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맞추고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게 된 것인가 싶긴 하지만 그것은 또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튼 예배의 형식은 형식이고,
사실 선생님이 제게 질문한 것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부활을 어떻게 고백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에게 갖는 가장 대표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는 거지?’ 하고요. ‘아니, 2024년인데 그걸 어떻게 믿는 거지?’ 하고요.
전에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저희 집안에서는 저 혼자 교회를 다니고요. 제가 신학대를 간다고 했을 때 저희 아버지는 제게 “그래, 뭐 내가 너 교회 다니는 거 까지는 말리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교회가 죽음 팔아 장사하는 곳이라고 생각해”라고 할 만큼 싫어라 하셨습니다. 지금은 뭐 그렇게 싫어라 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지난 명절에 집에 갔을 때는 우리 교회 이름이 “동녘교회”라고 하니까, 교회 이름이 “동녘”이 뭐냐고, 빨갱이 교회 다닌다고 놀리시기는 하셨지만 내심 또 좋아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여하튼간에 사정이 이런 관계로
제 주변에는 기독교인인 사람들보다 비기독교인인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적으로 제게 쉽게 묻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혹시 기분 나빠 할까봐 못 물어보겠는데, 네가 한번 이야기 해 봐. 도대체 어떻게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그리고 놀랍게도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까지도 가끔은 제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질문을 할 때 보통은 조금 화가 나 있습니다. “아니, 김유미 원우님! 하느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심을 믿으세요?” 제가 발제를 끝마쳤을 때 실제로 들은 질문입니다. 사실 이 질문을 질문이었다기 보다는 타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눈치 없는 척 하고 질문이라 생각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답변은 당연히 “넹” 인데요. 여러분 어떠십니까?
부활절 아침 오늘,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심을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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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살펴 봅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묻혔습니다. 막달라는 슬픈 마음을 안고 무덤으로 갑니다. 우리는 먼저 무덤이라는 공간이 막달라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무덤은 예수의 의미를 제한하는 장소였을 겁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겐 무덤이 그가 생전 이루었고, 이루겠다 말했던 그 세계, 그 세계를 가로막는 최후의 장벽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아, 우리 선생님이 내가 믿었던 것보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구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공간이 바로 무덤일 것입니다. 그런 공간 앞에 막달라 마리아가 섰을 때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그녀는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입구의 돌은 치워져 있습니다. 그녀는 이게 어떤 일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두터워 보이던 장벽이 무너졌는데도 그녀는 통찰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무덤이 도굴 당했다고 생각해 절망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요. 다시 한번 그녀가 무덤 속을 보았을 때, 그녀는 이번에 두 명의 천사들을 봅니다. 천사들은 그녀에게 왜 눈물을 흘리는지 묻습니다. 그녀는 예수가 죽었고 그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녀는 아직도 예수가 육체의 굴레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의 저자는 막달라가 뒤돌아서 예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인지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그가 동산지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천사들이 물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묻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에게 “당신이 그를 어디에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 말해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이름을 듣자 그녀는 새롭고 신비한 인식에 접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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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성서본문을 묵상하며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가 어떠한 행위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마리아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이 무엇이었길래, 그 말을 듣자마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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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넷플릭스를 보다가 ‘퀴어 아이: 일본을 달궈라!’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2003년 미국에서 방영되었던 리얼리티쇼 ‘퀴어아이 포 더 스트레이트 가이’라는 프로그램을 넷플릭스에서 리메이크한 것인데요. 프로그램을 간단히 말하면 메이크 오버 쇼입니다. 각각 사연을 갖고 있는 출연자들이 나와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이죠.
‘퀴어아이’에서는 심리상담가인 카라메로,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바비, 패션 디자이너인 텐, 음식 전문가인 안토니, 헤어스타일리스트 조나단이 한 팀을 이뤄 출연자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 프로그램이 다른 메이크오버쇼와는 다르게 특별했던 것은 그들이 출연자를 위해 하는 조언이 뼈를 깎는 성형수술이나 과도한 다이어트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본 영상의 주인공은 57세 호스피스 간호사였습니다. 그의 소개를 제가 하는 것도 좋지만 짧게 영상을 한번 볼까요.
(영상 재생)
타고난 모험가였던 요코씨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에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친구인 후미코씨는 그녀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만큼 그녀 자신을 돌보기를 바라지요. 그러는 마음에서 프로그램을 신청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영상에서는 다섯 사람이 요코씨를 만나 여러 질문들을 하는 장면 나옵니다. 그녀에게 생각하면 설레는 음식이 있는지를 묻고, 좋아하는 영화를 묻기도 합니다. 요코씨는 환자는 돌보는 일이 바빠서 주로 전자레인지로 돌려서 조리하는 음식들을 먹지만 사실은 애플파이를 만드는 엄마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처럼 옷을 입어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퀴어아이의 전문가들은 그녀가 그녀를 잊지 않고 잘 돌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은 스스로도 기뻐야한다”는 조언을 해주기도 하지요.
그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한번 보실래요?
(영상 재생)
제가 이 프로그램을 보고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요코씨가 요코씨의 이름을 찾게 되는 과정 이 프로그램에 담겨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방을 내어주는 것도 요코씨이지만 자신의 방에 로마의 휴일 포스터를 걸고 싶은 것도 요코씨이잖아요.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그 요코씨에게 그 요코씨를 잊지 않고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진행자들이 프로그램을 통해 요코씨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요코씨 안에 요코씨를 찾아 그 이름을 불러준 것이지요. “로마의 휴일을 좋아하는 요코씨 나오세요!”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요코씨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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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난 다음에 부활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활의 공동체는 어쩌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공동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들을 때 비로소 부활을 목격하고 우리 자신을 바꿔낼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러했고 요코씨가 보여준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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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아침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부활을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여러분의 이름을 들었습니까? 바라건대 우리가 모인 동녘의 공간이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찾을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이 곳에 모여 우리의 이름을 듣고 또 그 이름대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또 나를 돌보는 일을 잊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돌보며 예수의 뜻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그게 예수의 부활이 아닐까요?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