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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제 길을 간다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2장)
크리스마스의 비극
우리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성탄 인사를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맞는 세상의 현실은 평화스럽지 않고, 우리의 삶도 희망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이는 예수 탄생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아기 예수 나심이 결코 기쁜 사건일 수 없었던, 오히려 비극과 애곡의 사건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성서는 전해줍니다.
당시의 유대왕이었던 헤롯과 권력자들에게, 새 왕인 예수의 탄생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위험한 사태였지요. 장래에 화근이 될 새 왕을 없애기 위해, 유대의 권력자는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아기들을 살육합니다(2:16). 아기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되었고, 자식을 잃은 여인들은 물론, 베들레헴 전체가 공포와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태가 전하는 첫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심으로 참혹한 광풍이 들이닥쳤습니다.
예수의 태어남으로 빚어진 참사(慘事) 속에서, 예수와 그의 가족만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와 그 부모는 밤을 틈타 피신해 감으로써 죽음을 모면하고, 적잖은 시간 동안, 도망자인 난민으로 이집트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 비참(悲慘) 가운데서 성가족(Holy Family)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도망하고 숨는 게 전부입니다. 마치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무기력하게 도망 다니는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자신조차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주위에는 그를 보호해 줄 든든한 편도 없습니다. 살육당하는 베들레헴의 아기들과 통곡하는 여인들을 구원해 주기는커녕, 어린 예수는 위험을 피해 도망치고 또 도망칩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평화의 왕이라고 할까요?
예언 1 : 라마에서 라헬이 자식을 위해 애곡하다 (17절/렘31:15)
예수께서 오시는 것이 달갑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권세를 쥐고 있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포도원을 차지한 농부들이 주인의 행차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듯(마21:33-39), 헤롯왕과 그의 세력은 예수의 오심을 거부합니다. 태어난 새 왕은 장차 왕국에 위협이 될 터이고, 그로 인해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보다, 아예 위험한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낫다는 논리는 지배자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후에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는 유대 지도자들도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한 사람(예수)이 제거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지요(요11:47-50).
이러한 결정 속에서 언제나 힘이 없는 이들이 희생됩니다. 두 살 아래의 어린아이들이 그 희생자들이고, 베들레헴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당시 베들레헴이 천여 명 인구에 지나지 않았던 작은 고을이고, 두 살 아래의 남자 아기가 스무 명을 넘기지 않으리라고 본다면, 학살을 자행해도 크게 뒤탈이 없으리라고 헤롯은 계산했을 터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롯은 자기가 죽었을 때 모두가 진정으로 애도하도록 만들 의도로, 각 가정의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유대고대사, 17권, 181절). 장래의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 아이 수십 명 정도는 죽일 수 있는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베들레헴은 야곱의 아내인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서, 마태복음은 베들레헴 아이들의 죽음으로 인한 여인들의 슬픔을 라헬의 통곡(렘31:16)과 연결합니다(18절). 라마는, 예루살렘 8 Km 북쪽, 베냐민 지파에 속한 마을로서 바빌론으로 붙잡혀 가던 포로들의 집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곱의 아내인 라헬이 낳은 두 아들(요셉, 베냐민)을 낳았는데, 둘은 각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리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라헬이 자식을 잃었다는 표현은 그 왕국들의 멸망과 추방과 포로 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위로받을 수 없는 라헬의 애곡이, 마태복음에서는 베들레헴의 자식 잃은 여인들의 탄식으로 공명합니다.
예언 2 :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15절/호11:1)
헤롯이 베들레헴의 남자 아기들을 학살한 이 이야기는 히브리인의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이집트의 파라오를 연상시킵니다. 그때 모세가 파라오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히브리인들을 해방하는 구원자가 되었지요. 모세처럼, 예수 역시 헤롯의 살육으로부터 살아남아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됩니다. 예수를 모세와 나란히 견주어 비교하는 방식은 마태복음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예수의 가족은 헤롯대왕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애굽)에서 피난 생활을 합니다. 이집트는 곤경을 당한 이스라엘에게 피난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흉년의 때에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내려가 생존을 도모했고,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식솔들을 이집트로 데려왔습니다.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었던 여로보암이 이집트로 피신하여 생명을 보존했고, 포로기 이후 많은 디아스포라가 이집트에서 정착했습니다. 피난지인 동시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종살이를 했던 고난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구원 사건인 출애굽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해방하신 역사입니다. 따라서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호11:1)는 호세아의 말은 이스라엘의 고난과 구원 모두를 포함합니다. 이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이집트 피난이 이스라엘의 고난과 구원의 역사를 응축 체현하는 과정으로 제시됩니다.
예언 3 :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23절)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헤롯대왕)이 죽고(BC. 4년) 나서 예수의 가족은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헤롯왕 사후에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세 아들에게 나누어지는데, 맏아들 아켈라오(22절)는 핵심 지역인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메아를,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빌립은 갈릴리 동쪽과 북쪽을 맡아 다스립니다. 유대의 분봉왕인 아켈라오는 포악하여 십여 년 만에 폐위되고, 유대는 로마가 파견한 총독(구레뇨, 눅2:1))의 통치 시대를 맞습니다(AD. 6년). 요셉은 포악한 아켈라오를 두려워하여 유대(베들레헴)로 돌아오기를 겁내게 되고, 대신에 다른 아들인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 지역의 산골 마을 나사렛에 정착합니다(22, 23절). 이렇게 해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의 피난 시기를 거치고, 마침내 나사렛 출신이 되는 예수의 어린 시절의 여정이 완성됩니다.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구약성서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예언도, 그런 말을 한 선지자도 없습니다. 마태가 선지자를 특정하지 않고 복수의 “선지자들”(23절)이라고 한 것은, 구약성서 안에 있는 여러 말씀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해석됩니다. “나사렛 사람(나조레안)”은 “나실인(나지르)”라는 말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나실인은 ‘(태어나면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으로 삼손과 사무엘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신 예수는 충분히 “나실인”으로 칭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 라는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지”는 “네체르”라는 히브리어로, “나조레안”과 유사한 음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모호한 문구는 이사야의 예언과 닿게 됩니다.
이는 … 말씀을 이루려 함이다 (15, 18, 23절)
마태는 세 번에 걸쳐 말합니다. 이런 어이없고 참담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이 하실 일을 다 이루셨다고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학살과 도피와 유랑과 같은 비극이 이어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예언자들이 말한 것들이 모두 이루어졌다고(2:15, 18, 23) 성서는 밝힙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세례요한에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3:15)라는 답변이 주어지는 맥락도 이와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탄생과 유년기 서사(2:1-23)를 통해 모두 다섯 개의 예언이 성취된다고 알립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미5:2; 삼하5:2).
2. 동방의 사람들(이방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오다. (동방박사의 경배)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2:2; 미4:1 참조)
3. 유아 살해 (어머니 라헬의 통곡, 18절)
4.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호11:1)
5.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23절)
예수를 죽이려 유아 학살을 저지른 헤롯 대왕이나, 포악한 분봉왕 아켈라오는 메시아의 탄생을 부정하며 위험에 빠뜨렸던 걸림돌입니다. 하지만 어떤 권력이 저지르는 만행과 살육도 하나님의 뜻을 수포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도리어 그들의 방해와 악행마저도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 일조합니다. 헤롯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포악을 저질렀지만, 그 포악마저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진행하고 촉진한 셈이 됩니다.
완전한 복종의 사람 요셉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은 결정적 시기 때마다 꿈을 꾸고 지시받은 대로 충실히 이행합니다. 천사가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13절)고 했을 때,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납니다”(14절). 이처럼 한 치도 틀림없는 복종이 20-21절에서도 반복됩니다. 1장에서도,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수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오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붙여줍니다(1:18-25).
예수의 부친인 요셉은 창세기의 “꿈꾸는 사람 요셉”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그가 꾸는 꿈은 자신의 꿈이 아니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도 않습니다. 요셉은 마치 자기 뜻이나 방책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처럼 처신합니다. 이런 요셉은 철저히 무능력하고 수동적이며 대책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주님의 뜻을 가지고 오는 천사와 만나게 되고, 완전히 복종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룹니다.
세상의 희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때가 되면, 모든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실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분명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죽어야 할 그때가 될 때까지 그는 살아야 합니다. 무자비한 살육의 광풍을 가장 혹독하게 맞으면서도 그리스도는 죽지 않으셨다는 것은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아무리 혹독한 추위도 촛불 하나를 삼킬 수 없지요. 태산처럼 짙은 어둠 속에서도 한 점 불꽃은 꺼지지 않고 타오릅니다. 하나님이 내시는 희망은 그와 같습니다. 여리고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만 같아도, 흔들리면서 희망은 제 길을 갑니다. 희망이란 원래 흔들리는 것이고, 흔들리면서 마침내 끝까지 갑니다. 훼방꾼들의 방해마저 디딤돌로 삼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면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