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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다시 살았다”라는 소식이 마리아로부터 제자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때 제자들이 어떤 반응이었을지 성서본문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그 소식을 전하고, 예수가 직접 제자들 앞에 나타나기 전에 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마리아가 달려와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말하기 직전 상황을 조금 상상해봅시다. 예수의 죽음은 당연하게도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큰 슬픔이었고, 또 커다란 막막함이었을 겁니다. 믿고 의지하였던 이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길이 옳은 길이다” 믿고 선생님을 따라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또 이 곳까지 왔는데 그 분이 죽었으니 제자들은 말 그대로 줄 끊어진 연을 바라만 보고 있는 모양새였을 겁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아, 이제 뭐 먹고 살지. 나 이제 뭐 하지?’ 이런 생각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그 막막함을 토로할 수 없었지요.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답이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마리가 달려와 우리 선생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전합니다. 놀라운 이야기였지요. 너무 놀라운 이야기여서 제자들은 믿기 어려웠습니다. 어느 누구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미쳤나? 너무 슬프고, 너무 힘들어서, 얘가 잠깐 어떻게 됐나?’ 또 어느 누구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뭐야? 몰카야?’
오늘 우리가 나누어 읽은 본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제자들은 ‘무서웠다’ 말합니다. 제자들은 무엇이 무서웠던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와 같은 방식으로 종교 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을까 두려워했든지, 아니면 예수의 무덤에서 시신을 탈취했다는 혐의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였든지. 무서움에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당장 떠오르는 것은 ‘모른다’인 것 같습니다.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모르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을 때, 우리는 무섭습니다.
제자들 중 누군가가 이 믿기지 않는 상황을 ‘뭐야? 몰카야?’라고 생각했다면, 이내 그는 무서웠을 겁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무섭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문부터 걸어 잠갔는지 모릅니다.
이 때, 예수는 닫힌 문을 가벼이 여시고 제자들 앞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는 굉장히 경쾌하게 인사를 하며 돌아오지요.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죽었다 살아 돌아온 이라기 보다는 퇴근하고 돌아온 이의 모습처럼도 보입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죠. “다녀왔습니다”하고요.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지요. 이것도 웃긴 장면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의 손부터 확인하는 모양새 같습니다. “치킨 사왔어? 아이스크림 사왔어?” 하고 말입니다.
제자들이 품었던 경계심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부모님 퇴근길에 마중 나온 어린아이들의 모습만이 남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 하시지요. “너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그런데 예수의 바람과는 달리 제자들에게는 평화가 있지 않았나 봅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첫 날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가 첫 번째 나타난 것은 그 주간의 첫날이었고, 예수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 여드레 뒤였으니 이건 유대인들의 계산으로 하면 두 번째 주의 첫 날입니다. 교회력으로 말하면 부활절 제 2주인 것이지요. 그러니 딱 오늘입니다.
부활절 2주의 장면은 부활절 그 날과 다르지 않습니다. 문은 그대로 잠겨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다시 태어남을 이미 한 번 보았는데도 그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두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닫힌 문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닫힌 문을 열려는 노력을 특별히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냥 들어오시지요.
문이 닫혀있든 열려있든 예수님께서는 그저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경쾌히 인사하시지요. “너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그리고는 도마를 향해 상처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마는 여드레 전 날, 그러니까 부활의 첫 날에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말로만 전해들었지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했을 때 그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을 때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다들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 하고서는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을 넣어봐야 믿겠어”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도마가 진짜 뭐 상처를 쑤셔 보겠다고 말을 했다기 보다는 뭐 이런 말이었겠죠. “아나, 이 놈아, 내 손에 장을 지져라”
카라바조의 그림 “성 도마의 의심”이 너무나도 유명해서 도마가 실제로 예수의 상처에 손을 찔러보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데, 물론 찔러봤을 수도 있지만 사실 성서에서는 도마가 예수의 상처에 손을 가져다대는 장면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것은 도마와 함께 있지 않았음에도 도마의 불신을 알고 있는 예수와 도마의 고백 뿐입니다.
예수는 도마의 말을 직접 들은 것마냥 도마의 말을 도마에게 다시 들려줍니다. “너가 원한다면,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만져 보아라,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 예수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말한 도마 앞에 예수가 나타나 “그래, 원한다면 지져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장을 지졌냐 안 지졌냐, 못 자국에 손가락 찔렀냐 안 찔렀냐 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거듭해서 두려움이 많은 제자들 앞에 섰다는 점입니다.
예수는 부활했고, 제자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부활한 예수가 다시 제자들을 찾았을 때, 제자들은 부활의 첫날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닫힌 문 뒤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보았는데도 여전히 부활을 목격한 이들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예수가 이런 제자들 앞에 거듭해서 서신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그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는 닫힌 문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으십니다. 내가 다시 살았음을 너희가 보았는데 뭐가 두려워 아직까지도 문을 꽁꽁 닫아놓고 있느냐 책망치 않으시고 거듭 제자들 앞에 서서 그들의 평화를 바란다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어야 하는 부활절 둘째 주일의 복된 소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여러분께 질문했지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믿으시냐고요. 그 때 여러분들은 분명 아주 경쾌하게 “넹”하고 답하셨습니다. 제가 그 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럼, 부활절을 지나 한 주간 사시면서 부활을 목격한 이들로 하루하루를 보내셨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예수 부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셨겠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부활을 언제 가장 많이 묵상하는 줄 아십니까? 바로 고난주간입니다. 우리교회는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지만 많은 한국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하지요? 특히나 고난주간이면 특별새벽기도회라고 해서 일주일 내내 새벽기도를 하곤 합니다. 그 기간이 오면 신학대에서는 거의 곡소리가 나는데요. 전도사들이 퀭한 눈을 해가지고 학교 앞 카페에서 앉아 “도대체 예수님 언제 오시니?” 하는 겁니다. 매일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해야하니까요.
그런데 막상 부활절이 오면요.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지 않습니다. 이게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절기는 예수님이 다시 사시고, 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절기입니다. 어떤 절기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하는 시기이지요. 헌데 이런 묵상을 하지 않는 겁니다. 마치 부활절이 단 하루인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부활절이 한 주 전에 시작하고 끝난 행사같은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다시 사심, 부활을 고백한다면, 지난주를 기점으로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적어도 닫힌 문 안에 우리를 숨겨 두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부활을 보았다, 그리고 믿는다 고백하는 일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분명 여러분들은 그리고 저는 지난주에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말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는 큰일이 난 겁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 답게 살아야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로 남았습니다.
이 숙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설교를 준비하며, 성서본문을 묵상하며,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예수를 못 알아 봤을까?” 생각해보니 궁금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왜 한 눈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친구와 저는 두가지 가설을 세워보았습니다.
첫 번째 가설 : 장애를 가진 하느님
예수는 죽기 직전,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의 몸은 구석구석 성한 데 없이 다쳤습니다. 맞은 곳은 부었을 것이고, 찢긴 곳은 고름이 차올랐을 것입니다. 피는 엉겨 붙었을 것입니다. 그는 멀쩡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올 때 그는 분명 장애를 갖고 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기억하는 예수의 모습과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이 달랐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The disabled God” 이라는 책에서 Nancy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애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는 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장애를 가진 하느님은 지배를 위한 싸움을 벌이거나 새로운 규범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주변부에 존재한다. 탈중심적인 위치에서 변혁을 선동한다.”
장애를 가진 하느님이라는 가설이 나그네, 버림받은 자, 배고픈 자, 약한 자, 가난한 자를 편드시는 하느님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저에게는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충분히 가능하겠다. ‘그라면, 그런 모습으로 온 것이 이해된다.’ 하고 말입니다.
두 번째 가설 : 낯선 얼굴의 하느님
두 번째 가설은 예수가 일부러 다른 얼굴과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설은 제자들이 예수를 못 알아보는 데에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가 어째서 다른 모습을 선택하였지?”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사실 두 번째 가설은 제가 선택한 이야기인데요. 제가 예수라면, 부러 다른 얼굴로 제자들을 찾아왔을 것 같습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헤어질 것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승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다시 혼자 남겨지게 됩니다. 제가 예수라면, 제자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남겨주고 싶을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떤 몸에 갇히지 않는다. 나는 다양한 얼굴로 올 것이다. 너희는 낯선 이가 너희를 찾아 왔을 때 그에게서 나를 찾아라. 그의 상처를 헤집어 놓지 마라, 그에게 어떤 증명을 요구하지도 마라. 그저 너희는 나를 보아라. 나를 찾아라. 나를 믿어라.”이런 가르침을 주고자 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로 삶과 동시에 “사도”로서의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앞두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태도를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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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도 좋고, 두 번째도 좋습니다. 둘 다여도 좋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찾아오고, 찾아오고, 또 찾아오십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으로부터 얻는 교훈은 부활의 현실 속에서 사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하여도 부활절은 하루 달걀 먹고 끝내는 날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거듭해서 찾아오시는 예수 앞에 부활은 예수의 삶 속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 각각에게 일어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조를 믿거나 하느님의 규칙들에 복종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과 사랑함과 존재에 관한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고 우리의 경계를 넘어, 두려움을 넘어, 사랑할 만큼 자유롭게 되고, 우리가 우리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이를 생각 할 때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낯선 이에게서 예수를 찾으면 우리의 편견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낯선 이에게서 예수를 찾으면, 우리는 온전함을 맛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부활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절 후 둘째 주일인 오늘에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현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언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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