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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까시 미야하라의 호텔 에베레스트 뷰 이야기와 그가 네팔에서 꿈의 프로젝트를 구축한 방법
네팔리 타임즈
2020년 8월 15일
다까시 미야하라 씨는 50년 전 Himalayan Kanko Kitatsu를 설립하고 샹보체 비행장을 건설한 네팔의 관광 개척자다. 1970년대 초반에 이미 1,000명의 일본인 관광객을 네팔로 데려오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카트만두에 히말라야 호텔을 짓고 사랑코트에 호텔 안나푸르나 뷰에서 일했다. 그는 2008년 네팔 라스트리야 비카스당(Nepal Rastriya Bikas Party)의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네팔 시민이 되었다. 그는 2019년 11월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82년 분게이슌주는 호텔 에베레스트 뷰의 설립을 기록한 책 히말라야의 도모시비: 호테루 에베레스토 뷰 오 타테루를 출판했다. 네팔리 타임즈는 이번 토요일 Weekend Longreads에 있는 그 책의 영어 번역 원고에서 발췌한 내용을 싣는다.
모든 것은 전보로 시작되었다. 내가 카트만두에서 코티지 및 소규모 산업부의 직원으로 살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났다. 어느 날, 늘 그렇듯 넓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전보가 왔다.
'남체에서 개처럼 죽을 지경'이라고 쓰여 있었다. '비행기를 보내달라. 루클라에서 기다리는 중. 사카모토.'
전보는 일본어로 작성되었지만 라틴 알파벳으로 작성되었다. Naoyuki Sakamoto는 저명한 등반가였으며 그는 카트만두에서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를 향해 도보로 출발했다. 사카모토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가기엔 조금 늙었고, 우리도 고산병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튼실해보여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보에서 그가 사용한 '개처럼 죽다'는 일반적으로 괴상하게 보였다. 그런데 '죽는다'도 썼으니까 나는 패닉에 빠졌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사카모토와 같은 습관적인 농담꾼이 쓰는 유형의 전보였다.
나는 즉시 경찰 본부에 가서 답장을 보내도록 했다. '비행기를 보낼 것입니다. 루클라에서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나는 비행기를 빌리려고 네팔 왕립군과 유엔 사무국, 그리고 왕립 네팔 항공으로 달려갔다.
네팔군용 쌍발기는 엔진 수리 중이었다. 유엔 항공기는 모두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카트만두 공항의 한 구석에 쓸쓸히 서 있던 로양 네팔 항공의 두 대의 헬리콥터 중 하나를 사용하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그들은 소련에서 기증했고 먼지로 뒤덮인 헐크였다.
조종사는 멋진 콧수염을 기른 덩치 큰 바비 샤라는 네팔인이었다. 나는 헬리콥터가 날아가도 안전한지 조금 불안해서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윙크하며 말했다. "나도 추락할 헬리콥터는 타기 싫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는 카트만두 공항에서 이륙했고 나는 갑자기 무의식적으로 숨을 헐떡였다. 눈앞에 하얗게 빛나는 히말라야의 봉우리가 시야 전체를 채우고 영원히 펼쳐질 것만 같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창에 얼굴을 대고 완전히 풍경에 흡수되었다.
내 걱정에도 불구하고 헬리콥터는 곧 고도 2,600m의 루클라 비행장에 착륙했다. 먼지가 가라앉자 사카모토와 그의 동료들이 신나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체바자르에서 '개처럼 죽어가고 있다'는 사카모토의 모습은 지극히 건강해 보였다.
"야, 미야하라!" 그가 불렀다. 헝클어진 수염을 기른 곰인형 같은 그가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야, 히말라야는 크다. 히다카 산과는 완전히 다른 규모다."
잠시 후 조종사의 재촉에 따라 사카모토 일행은 헬리콥터에 올랐다. 남겨진 우리 셋은 헬리콥터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오랫만에 찬 산 공기를 들이마시고 심호흡을 했다. 우리는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며 내가 숭배하는 텡보체로 걸어갔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남체 바자르로 향하는 길을 벗어나 아마다블람에서 콩데까지의 모든 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로 인접해 있는 큼중과 큰데 마을로 향했다.
산에 대해 흥분하면서 네팔 관광의 가능성을 보았다. 당시 네팔에서 나의 주요 직업은 숙박업과 소규모 공업이었지만, 네팔의 공업에 대한 가능성을 흐릿하게 보았다.
우리는 에베레스트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머물 수 있도록 샹보체 언덕의 동쪽 가장자리에 롯지나 호텔을 지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우리의 장래의 호텔에 온다면 우리는 근처에 비행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파른 언덕 너머에는 풀을 뜯는 데 사용되던 더 완만한 경사가 있었다. 좀 더 내려가자 경사가 10°에 불과한 고원에 이르렀다. 바위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 2~3층 집 크기의 노출된 화강암 두세 덩어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강암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면 이 공간은 소형 비행기의 비행장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 지역은 샹보체라고 하며, 옛날에는 야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해, 남체 바자르와 쿰중-쿤데 사이에 공동 토지 사용 권리에 대한 분쟁이 있었고, 양측이 나무를 베어내기 위해 경쟁하면서 숲은 곧 사라졌다.
나는 그 지역에 호텔과 비행장을 지을 진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불 주위에 앉아 수다를 떨면서 호텔 계획에 대해 앙카지에게 말했다. 그는 내 체형을 분석하듯이 잠시 내 얼굴을 응시했다. “당신은 분명히 그것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명백한 자신감으로 내 아이디어를 지지하며 말했다.
샹보체 동쪽 끝을 옴 라사라고 하는데 호텔을 지으면 딱 좋은 위치가 될 것 같다. 밝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언덕 위에 서서 내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이보다 더 웅장하고 거대한 풍경은 없었다.
아마다블람('어머니의 목걸이')이 있고, 로체와 눕체를 잇는 능선 너머 8,000m 사우스콜 위로 에베레스트 일부가 보인다. 아마다블람의 오른쪽에는 캉테가와 탐세르쿠가, 남쪽에는 좁은 두드코시 강 계곡의 양쪽으로 줄지어 있는 콩데 봉우리가 있다. 탐세르쿠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히말라야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들을 보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흰색과 검은색 산들을 넘어 있다는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산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고 감명을 받는다. 거대한 규모 때문인지, 아니면 가파르고 끝없는 얼음과 눈의 코트 때문인지 궁금하다. 10억년 동안 육지와 공기가 압력을 받아 형성된 산의 풍경은 바로 그 때문에 무한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호텔을 지을 수 있는 곳은 아마 여기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샹보체 고원의 남쪽 가장자리는 소형 경량 항공기의 비행장으로 유력한 장소처럼 보였다.
카트만두에서의 전환점
카트만두로 돌아와서 나는 텡보체 여행을 포함해 카트만두에서 보낸 2년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사무직 외에 지리 주변 가내공업 연구, 제지공장 건설을 위한 테라이 산림조사, 카트만두 계곡 수동 베틀 조사를 통해 네팔의 현실을 접하게 되었다.
1년이 지나면서 직업 만족도가 점차 떨어졌다. 나는 곧 34살이 되고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그것을 빨리 해야 했다. 남체바자르에서 가져온 에베레스트 뷰 호텔 건설의 꿈이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건물 도면, 비용 견적, 수입 및 지출 전망과 함께 호텔 제안서를 완성하는 데 한 달 반이 걸렸다. 이 서류들을 네팔 정부에 제출하여 호텔 건설 허가를 신청했다. 관광국은 내가 근무했던 무역산업부 산하였다. 더구나 차관보의 집이 내가 사는 집 옆에 있어서 그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 협상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또한 수상인 수리야 바하두르 타파의 동생인 하렌드라 바하두르 타파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제안한 대로 형을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일이 훨씬 쉬워졌다. 수상과의 만남 다음 날, 나는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차관인 카일라쉬 비크람 아딕카리가 나를 불렀다.
다음 날, 나는 이미 내 서류를 가지고 있던 관광청의 수석 책임자인 티르타 툴라두하르를 만나러 갔다. 이후 쿰부 지역의 지도 또는 호텔 및 공항의 계획된 건설 현장의 상세 지도와 같은 다른 문서를 제출한 후 마침내 호텔 프로젝트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툴라두하르 씨는 친절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네팔 관리들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일하기 전에 이야기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 부처와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8년 9월 3일 마침내 에베레스트 뷰 호텔의 건설 허가가 승인되었다.
다음 단계는 민간 항공국으로부터 샹보체 공항 건설 허가를 받고, 카트만두와 샹보체 사이의 소형 항공기 운항을 네팔항공과 논의하는 것이었다. 툴라두하르 씨가 이 프로젝트를 지원했지만, 민간 항공국은 공항의 위치가 불가능하고 처음부터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호텔 에베레스트 뷰를 운영하기 위해 '트랜스히말라야 투어(주)'를 등록했습니다. 회사는 우리 각자가 100달러를 투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네팔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내가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공장에서 몇 년 동안 일한 경험을 활용하여 자연 과학을 위해 또는 일종의 제철소 사업을 운영할 수 있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닥쳐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네팔에서 호텔 사업을 하게 되었다. 사과는 결국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공항도 샹보체 언덕에 건설한다는 조건으로 양 마을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네팔인들에게 호텔이 해외 원조가 아니라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이건 국가이건 무엇인가를 얻으면 동시에 잃는다. 네팔이 계속 해외 원조를 받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인 독립의 정신을 머지않아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국가의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자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국가의 성장을 가로막는 대외원조에 대한 의존도로 약화된다. 더욱이 원조는 부자와 가난한 자, 또는 도시 거주자와 산촌 거주자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확대한다. 또한 가장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잊혀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극도의 짜증을 느꼈다.
도쿄에서
1968년 12월 27일, 카트만두에서의 3년간의 체류를 쉬고 호텔 건설을 준비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나는 도쿄의 대기 오염에 역겨웠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과 거리의 모든 분주함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떠난 지 며칠도 안 됐지만 벌써 네팔의 맑은 공기와 맑고 푸른 하늘이 그리웠다.
나의 아내는 지난 여름 카트만두에서 도쿄로 돌아와 막 첫 아들을 낳았다. 나는 수입이 없었고 도쿄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무임승차를 하고 있었다. 1, 2년을 버티기 위해 아내의 가족을 부양하면서 호텔 프로젝트를 참을성 있게 일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히구치 아키오 조교수, 미야키 야스오 씨, 마츠다 타카오 씨를 비롯한 AACK(교토 아카데미 알파인 클럽)의 분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들 모두는 내 요청에 쉽게 응했다. 그날 밤 우리는 책에 반쯤 묻혀 있던 히구치 조교수의 서재에서 계획을 검토하고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논의했다. 그 후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며 네팔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 중 3명은 네팔에 여러 번 갔고, 국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히구치 조교수는 계획서를 보고 말했다.
"예산 총액을 '8848만 엔'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계획서의 총 예산은 8,800만 엔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등산가가 아닌 것 같아요.”
숫자 '8848'은 물론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이며 예산은 1미터당 10,000엔이었다.
네팔로 돌아감
약 한 달 후인 5월 말쯤, 우리 건축 설계사인 쿠마-산과 나는 카트만두에서 UN의 Pilatus Porter PC-6 항공기를 전세하여 루클라로 날아가려고 했다. 나는 쿠마 씨가 건물의 본격적인 디자인을 그리기 전에 자신의 눈으로 호텔의 실제 건축 현장을 살펴보기를 원했다.
옴 라사(Om Lhasa)는 동쪽과 남쪽이 1,000m 아래 두드 코시 강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언덕 꼭대기에 있다. 호텔 에베레스트 뷰의 건설은 사업이라기보다 모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모험인 동시에 사업이 될 운명이었다. 그것이 부담한 상업적 핸디캡은 말할 것도 없이 매우 드물었다.
우리는 호텔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품질은 높게 만들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호텔의 수준은 원래 계획에서 몇 단계 올라갔다. 호화로운 호텔을 짓는 것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호텔이 건설되는 과정과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잘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히말라야 산맥에 건설된 최초의 관광시설인 만큼 향후 관광산업 발전의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거기에다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이곳에 지으려면 주변 자연과 환경에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아야 한다.
또한, 호텔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자연환경의 가치를 높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했다. 이것은 상식적인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이었다. 탐색일 수도 있지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수행해야 했다.
1969년 11월 카트만두에 도착한 직후 일본에서 첫 송금이 들어왔다. 일본에서 네팔로 민간투자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 자금으로 우리는 건설 기계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쿰중 마을에 야영장을 지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오랜 지인 앙 템바의 집에 방을 빌려 건설 현장으로 갔다. 우리가 도착한 날 고산병에 걸린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저녁에 창을 마시고 모두들 순식간에 저산소 상태에서 취하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부은 얼굴에 멍한 눈으로 잠에서 깨어났고, 여전히 발이 불안정했지만 숲을 통해 30분 정도 올라 옴라사 호텔 건설 현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쌀쌀한 공기 속에서 수정처럼 맑은 히말라야 산맥 위의 하늘, 산 그 자체, 숲,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웃사이더로서 나는 쿰중의 평화로운 은둔과 아마 다블람, 캉테가, 탐세르쿠 및 콩데의 봉우리가 차례로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볼 수 있는 경치를 즐겼다. 이 동네 사람들은 남체바자르보다 소박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의 토론
어느 날 카트만두로의 귀환이 다가오고 있을 때 에드먼드 경이 쿰부 병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급히 그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병원을 찾았다. 그는 책상과 의자를 안뜰로 가져왔다. 나는 차와 수제 과자를 대접 받았다.
힐러리 경은 호텔에 반대했다. 그는 네팔 정부에 프로젝트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고, 일본 알파인 협회에 편지를 써서 내가 아이디어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라고 말했다.
힐러리 경은 "우리 계획에 대해 들었지만 당신의 목표가 히말라야 트러스트의 목표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런 곳을 호텔과 같은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나쁜 생각입니이다. 그것은 셰르파 문화를 파괴할 것입니다.”
나는 호텔을 짓게 된 동기가 상업적이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기 말고 포카라에 짓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가 물었다.
"포카라는 확실히 또 다른 좋은 곳이 될 것이지만 어쨌든 저는 단지 호텔을 짓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네팔 관광을 홍보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힐러리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쿰부는 호텔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서로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호텔을 지겠다는 생각은 포기하지 않으시겠죠? 나는 단지 쿰부와 셰르파 사람들의 자연 환경을 사랑합니다.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나는 그에게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확실히 에베레스트 산은 말할 것도 없고 히말라야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문제였다. 에드 경의 말에 동의했지만 계속 진행했다. 에드먼드 경이 처음 셰르파와 접촉했을 때 그는 그들의 문화와 등산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그러한 속성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문화'란 무엇인가? 셰르파의 문화를 보존한다는 것은 박물관에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셰르파의 정직함, 명랑함, 타인에 대한 배려, 긍지, 철학을 낳은 인간 사회를 존중하고 그것을 파멸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우리의 근본적인 생각은 같았지만 각자의 노력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다. “지역사회나 국가가 참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선이나 도움을 받는 것보다 지역 주민들이 자주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낙성일
그렇게 드디어 호텔을 오픈하는 날이 되었다. Hotel Everest View의 첫 손님이 루클라에 도착하기 전날이었다. 루클라에서 호텔까지 하루 만에 걷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손님들은 밤새 강바닥에서 야영을 했다. 그들의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고베 시장인 미야자키 다츠오 씨를 포함하여 많은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다.
당시 일본 알파인 클럽 부회장이었던 요시자와 이치로 씨. JAC의 고베 사무소 지점장인 순지 츠다 씨; 오래전에 고등학생을 위한 등산 코스 강사로 함께 일했던 고베 알파인 클럽의 후지타 히로시 씨와 그 외 수십 명이 왔다.
그들이 호텔에 도착한 날, 우리는 호텔이 더욱 완공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아침 늦게 출발했다. 우리는 약간의 시간을 벌기 위해 남체 바자르 비스타리 비스타리(천천히 천천히)로 비탈길을 올랐다. 물론 이 고도에서 처음부터 서두르면 안 된다.
호텔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나는 청소가 끝났는지 전령을 보냈다. 너무 서두르면 고산병이 올 수 있다는 핑계를 대고 'OK'라는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한참을 멈췄다. 그리고 드디어 손님이 호텔에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로비가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쿰중 마을에서 모여 들었고, 손님들은 인파를 헤치고 방까지 가야 했다. 멋진 호텔 오픈과는 거리가 멀었다.
복도 창문용 유리는 한 달 전에 카트만두에서 보냈지만 3,600m 높이의 람주 라에서 눈 때문에 통행이 차단되어 건너편에 짐을 보관했다. 우리는 운반을 위해 남체바자르에서 장비를 잘 갖춘 50명의 포터를 급히 보냈지만 손님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가져오지 못했다.
저녁 식사는 바람이 많이 부는 주방에서 조리되어 식당으로 옮겨져 뜨거운 물에 데워진 접시에 신속하게 제공되었다. 우리 중 일부는 합판이 식탁을 통해 날아가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야 했다. 아침 점심은 괜찮았는데 저녁 저녁은 다들 추워서 부들부들 떨면서 먹어야 했다.
이튿날은 다행히 날씨가 맑았고, 파란 하늘에 우뚝 솟은 히말라야 산맥이 선명하게 보였다. 모두가 거기에 행복해 보였다. 얼음 봉우리의 전망은 숭고했다.
스기노 히사노라는 오사카의 할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미야하라 씨, 71세의 할머니가 실제로 여기 있는 것이 믿겨지십니까? 이제 나는 내세에 가지고 갈 좋은 이야기가 생겼습니다. 이 호텔을 지은 것에 대해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올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호텔을 짓는 데 들인 모든 노력이 보상을 받았다고 느꼈다. 나는 그녀가 그 광경에 감동한 만큼 감정적으로도 그녀에게 감동받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스기노 씨는 히말라야 관광 가이하츠의 계좌에 당시 개인이 기부하기에는 막대한 금액인 100만 엔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라고 예치했다. 호텔의 첫 손님은 고산병에 걸리지 않고 이틀 밤을 보냈다.
네팔에 온 동기 중 하나는 콘크리트 속에 갇힌 사회보다 푸른 하늘과 푸른 자연의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네팔에 왔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나는 네팔에서 자연에 대한 동일한 태도와 사랑으로 일관되게 행동하고 있었는가?
관광산업은 자연과 사회, 문화를 망칠 수 있는 산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네팔의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며 관광시설을 짓고 있었다. 나는 여기 히말라야에서 나무 몇 그루 이상을 베어내고 호텔을 짓고 초원을 긁어 공항을 건설하고 있다. 나 같은 외국인이 '개발'이나 '현대화'와 같은 구실을 휘두르며 당당하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용납될 수 있을까?
이 물음 앞에서 나는 내 행위를 포함한 '발전'과 '근대화'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질문은 자연과 사회 환경에 부합해야 하는 이 두 단어의 문제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대 물질주의 사회는 인간성보다 경제적 효율성을 갖춘 인간을 요구하며, 결국 정신영의 고귀함을 잊게 만든다. 사람이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믿는 사람이 되면 정신의 멸망과 같은 또 다른 재앙을 당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더라도 '발전'과 '현대화'는 인간성과 지혜, 통제의 필요성과 끊임없이 균형을 이루고 발전의 속도와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
특히 아직 물질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네팔의 경우 발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인류애가 만연하기를 개인적으로 바랐다. 기술과 산업 문명의 관점에서 네팔은 훨씬 뒤쳐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물질적인 길이 인간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증거인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네팔은 새로운 가치 시스템을 창출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네팔은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약간의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현대화해야 할 수도 있다. 나는 Hotel Everest View와 그 공항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풍요로운 정신을 얻으려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또한 팔짱을 끼고 바라보기만 한다면 영혼의 황폐함과 빈곤의 비극이 결코 개선될 수 없다는 것도 필연적으로 사실일 것이다.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쿰부 밸리에 실험 농장을 세우는 것, 그 전까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때였다. 그것은 호텔을 위한 신선한 유기농 채소의 공급원이 될 수 있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한 위치는 루클라 중간 두드 코시 강을 따라 5시간 거리에 있는 추모아였다. 우리는 땅을 사서 M에게 물었다. 우리는 토지를 구입하고 도쿄농업대학 Rapti Experimental Farm의 시마다 씨의 후배인 타케무라 유키오 씨에게 시설 관리를 부탁했다.
가능하면 호텔과 농장을 합쳐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도 생각했다. 비판적인 내 친구들은 내 아이디어를 '판타지 자본주의'로 낙인찍었다. 나는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케무라 씨의 노력으로 이 농장은 쿰부뿐만 아니라 솔루를 위한 야채도 생산했다.
마침내 샹보체 비행장
1971년 8월 2일 공항건설 기공식을 거행했다. 텡보체 수도원의 나왕 텐진 라마께서 친절하게 축복을 베풀었다. 행사에는 쿰중과 남체바자르의 촌장들과 정부 관계자들과 많은 다른 사람들이 참석했다. 우리는 번갈아 가며 땅을 팠다.
네팔 정부의 쿰부 지역 행정관인 차크라 바하두르 비스타 씨는 “이것은 쿰부에게도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며 우리를 축하했다. 그의 노력은 공항 건설 협상을 타결에 이르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술(창) 한 병씩 대접한 후 의식은 끝났다.
다이너마이트는 개인이 구입할 수 없었고, 불도저는 높은 비용과 수입 승인 문제가 있었다. 나는 카트만두에 있는 대사관과 해외 기술 협력 기관을 통해 일본 정부로부터 기계 원조로 불도저를 가져오려는 비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불도저를 엔진 블록을 제외하고 포터가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작은 부품으로 분해하여 쌍발 항공기로 루클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엔진블럭의 무게는 약 300kg 정도였고, 분해하려고 하면 큰일 날 수 있기 때문에 헬리콥터를 전세하여 바로 샹보체로 나르기로 했다. 우리는 200명의 포터들의 고용하여 열흘 동안 불도저인 두 개의 철 덩어리를 루클라에서 샹보체까지 운송할 수 있었다.
드디어 불도저를 시동할 시간이 되었다. 키를 넣고 잠시 동안 실린더를 예열한 다음 키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브룸, 브룸! 첫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우리는 기뻐서 소리쳤다. 트레킹 시즌이 끝난 5월이 되자 공항 공사가 한창이었고, 호텔도 시설을 더욱 충실하게 만들고 실내 장식을 완성하는 등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불도저가 잘 작동하는 동안 일본에서 구입한 두 개의 착암기에 문제가 생겨 카트만두에서 빌린 두 개의 스웨덴산으로 교체해야 했다. 인도에서 2톤의 다이너마이트가 마침내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비행기로 운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라모상구에서 포터가 운반했다. 산의 고요함은 메아리치고 울려 퍼지는 천둥 같은 폭발에 의해 깨졌다.
불도저, 착암기, 다이너마이트는 샹보체의 3대 보물이었다. 부품 수급이 어려울 수 있어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이 네팔 정부에 파견해 네팔 공항을 시찰한 영국 공항 전문가가 우연히 호텔을 찾았다. 놀랍게도 그는 이곳이 기울어진 STOL 비행장을 위한 좋은 위치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계획을 재고하고 그의 사양을 사용하여 길이 700m, 경사도 4~5%, 계류장 끝에서 최대 16%까지 점차 증가하는 이상적인 고도항을 구축했다.
불도저 2대, 착암기 2대, 다이너마이트 1.6톤을 가지고 2년 동안 작업한 후 5월 말, 마침내 공항이 로열 네팔 항공 필라투스 포터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 1973년 6월 1일은 시험비행이 있던 날이었고, 나는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 하늘을 확인했다.
호텔 직원은 시험 비행이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남체 시장, 쿰중, 쿤드의 마을로 달려갔다. 비행기가 성공적으로 착륙했다면 나는 술통을 사서 모두에게 축하주를 주어야 하며 우리의 머리가 고꾸라질 때까지 마셔야 한다.
오전 8시,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작은 점이었지만 점점 커져서 태양이 날개에 반사되었다. 그것은 공항을 두 번 돌고 탐세르쿠 기슭으로 향했고, 우리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활주로에 둑을 두고 직선으로 접근했다.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모두 비행기를 향해 달려갔다. 지난 5년 동안 수없이 꿈꿔왔던 장면이었다. 민간항공국과 장기간 교섭을 했고, 장비에 대한 기금 마련과 준비 작업을 했고, 캘커타 항구에서 세관을 통해 교섭을 하고 실제 공사를 했다.
그토록 간절히 바랐고,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가끔은 내 소원의 본래 목적을 되새겨야 했다. 항공기가 내 앞에 착륙하는 날을 믿지 못했을까? 아니다. 나는 그 상상을 믿었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드디어 해냈다.
인파를 헤치고 에밀 윅 대위가 큰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함께 악수했다. 스위스 조종사는 1960년 스위스 다울라기리 원정대를 위해 필라투스 포터를 타고 네팔에 처음 왔다. 그 이후로 그는 네팔에서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이 전설적인 조종사는 기꺼이 시험 비행에 자원한 사람이었다.
호텔은 마침내 샹보체 공항을 사용하여 정식 운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건설만큼 운영도 어려웠다. 호텔에서의 작업은 등산 원정대의 베이스캠프와 비슷했다. 우리는 손님을 위한 물류 계획을 세워야 했고, 날씨는 예측할 수 없었고, 때로는 부상을 입은 트레커를 대피시켜야 했다.
호텔로 손님을 이동시키는 주축이었던 카트만두와 샹보체 사이의 항공 서비스는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로팔항공은 원래 하루 2편의 항공편을 운항할 예정이었으나 그 절반도 운항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호텔 운영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따라서 샹보체로의 항공운송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해서 호텔 운영이 훨씬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비카스 또는 비나스(Bikas or Binas)?
카트만두에 살면서 네팔을 방문하는 일본인들로부터 종종 다음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다. “네팔을 돕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는 "네팔 사람들은 자신을 개선하려는 욕구가 부족하거나 더 나은 것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거의 없는 것 아닙니까?" 나도 이런 인상을 부정할 수 없기에 막연한 대답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큰 짜증을 느꼈다. 질문은 순수한 선의를 포함하는 것 같은데 왜 나는 그것들로 인해 고민했을까? 지원과 자선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 못했고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아니면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종종 그냥 독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원과 자선은 종종 사회의 민주화, 인민의 능력개발, 자주적 정신 함양과 같은 국가의 발전과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바로 통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종종 빈곤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불의를 조장하는 딜레마를 내포한다.
호텔은 작동을 했다. 그러나 손님을 위한 모든 필수품이 제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공항 공사도 필라투스 포터에게 충분할 만큼만 만들어졌다가 멈췄다.
네팔의 민간 항공 정책은 우리가 종종 신뢰할 수 없는 로얄 네팔 항공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호텔 경영 실적이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는 이익을 현지에서 재투자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으며 항상 현금이 부족하다.
이 호텔은 미성숙한 이념을 가진 이기적인 외국인들이 자원하여 호텔을 짓는 허영심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의 목표가 아무리 작더라도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결과에 만족해야 할까?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이러한 이니셔티브의 축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신해야 할까?
호텔 에베레스트 뷰 프로젝트는 다른 프로젝트와 협력하여 어떻게든 양쪽 끝이 맞도록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다. 우리는 비즈니스 측면을 분리하여 볼 수 없다. 이 프로젝트를 개인적인 취미라고 부를 생각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한 모든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 될 것이다.
이 호텔은 어떤 종류의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는 동기에 따라 지어졌다.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계속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아직도 의심을 품고 있는 걸까? 호텔이 여전히 적자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없다. 기아와 빈곤이 여전히 주요 이슈인 네팔에서 호텔이 사회적 생산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호텔 에베레스트 뷰의 건설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하고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우리에게 엄청난 지원을 제공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러나 현재 네팔의 상황은 외국인 투자에 적합하지 않다.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의 안정, 국민의 도덕성과 인식이 중요하다.
일본 기업이 네팔에 투자할 필요가 전혀 없고 수익은 너무 낮고 위험은 너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투자를 유치했다. 불행히도 네팔의 경제는 성장하지 않았다. 해외 원조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은 민간 투자의 중요성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 내부의 측면 커뮤니케이션은 매우 분열된 것처럼 보인니다.
네팔에서 살기 시작한지 16년, 에베레스트 뷰 호텔을 계획한지 14년이 지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세월 – 알려진 대로 – 과거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
캐서린 휘틀리
나는 에베레스트 뷰 호텔을 사랑스럽게 기억합니다. 호텔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1974년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 캡틴 윅이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조종사였으며 카트만두에 있는 그의 집에서 훌륭한 라클렛 저녁 식사를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Everst View 창으로 에베레스트 산을 바라보던 멋진 추억. 이러한 추억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운영중입니까?
쉬질리엔 탄
예, 여전히 고소 적응을 위해 하이킹을 하는 트레커들이 자주 찾는 호텔입니다.
인드라 샤르마
모든 독자에게 눈을 뜨게 합니다. 네팔에 가고 싶지만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로 그 소원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내 조상은 카트만두에서 왔습니다. 훌륭한 글. 감사해요. 나는 그곳에서 약간의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토니 샤프
나는 1982년에 거기에 있었습니다. 호텔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내 생각은 너무 많은 손님이 고소적응 하지 않고 Syangboche로 직접 비행 한 후 고산병을 겪었기 때문에 호텔이 일찍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했지만 나이가 많은 관광객이었습니다.
쇼쥬 가쿠야
故 미야카와 씨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2021년 4월 27일 보름달 호텔에서 열릴 메모리얼 피아노 콘서트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한 번 우리를 위해 숙소에서 기타를 연주했습니다.
데벤드라 바스넷
그곳은 멋진 장소이며 맑은 날에는 에베레스트와 다른 봉우리의 전망이 세상과 다릅니다. 거기에서 밤을 보낸 적은 없지만 전망이 있는 테라스에서 아침 식사를 위해 트레킹 그룹과 함께 몇 년 동안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비전과 인내에 대해 Miyahara san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프라딥 발크리슈나 아타발레
나는 일간지 네팔리 타임즈를 온라인으로 읽고 싶습니다. 흥미롭네요.
마헨드라 싱 림부
나는 나의 친구이자 상사인 Toshiro Haruta 씨가 그의 좋은 친구였기 때문에 Miyahara 씨를 잘 기억합니다. 하루타 씨는 네팔의 나비와 나방을 조사했고, 미야하라 씨는 친절하게도 그가 여행 및 관광 차량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도움 덕분에 노인 하루타 씨는 도로로 갈 수 있는 외딴 지역까지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6권의 호평을 받은 네팔 나방 동물군이 탄생했습니다. 미야하라 씨 덕분입니다.
리처드 엘리엇
훌륭한 기사, 대단히 감사합니다. 1978년 2월, 아시아를 여행하는 두 달간의 배낭여행 중 나는 비행기를 타고 샹보체로 날아갔습니다. 짜릿한 비행! 나는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지만 머물렀던 남체의 덜 고급스러운 숙소입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들이 어떻게 그 트랙터를 거기에 올렸는지 궁금했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나는 또한 "컨트롤 타워"를 보았지만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며칠 동안 이 지역에서 트레킹을 한 후 나는 카트만두로 돌아와 여생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사진과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차드 울리에이트
캘리포니아주 산후안 카피스트라노
A Himalayan High | Nepali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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