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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시선과 다양한 시적 주체들
김금란·양철식·박수림·김지란·김정옥·김명학의 시
일상의 가치를 생각하며 바라보는 곳이 각기 다른 삶의 지향과 바탕에서 비롯된다.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시인들이 시를 통해 다른 공감과 파장을 경험한다. 그렇기에 시라는 동일한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다양한 주체들’이라는 용어는 낯설지 않다. 여섯(김금란, 양철식, 김지란, 김정옥, 박수림, 김명학) 시인의 시들을 통해 시적 의미를 살펴보며 ‘다양한 주체’가 사유한 시적 내면까지를 논해보고자 한다. 어차피 시의 정서는 시인이 바라본 세계에 대한 개별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동일한 상상력일지라도 이완과 팽창을 거듭하여 어느 순간 시인들마다 개별적인 시의 특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뷔퐁이 말했듯이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라고 했을 때 변별성으로 천착해낸 아래의 시들은 그런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베란다 한쪽에서
햇빛의 무릎을 베고 고양이가 자고 있다
바로 옆 선반 위에는
이국의 다육식물 들이 자라고
온종일 바람도 다녀가고 구름도 다녀가고
가끔은 이름 모를 새들도 다녀간다
한때 웅크린 내 등이
눈물 자국 흥건한 어둠을 업고
쪼그려 앉아있던 그곳에
어느 날, 블라인드를 떼어내자
햇빛은 기다렸다는 듯 창을 뚫고 들어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양이를 재우고, 다육식물을 키우고
바람을 구름을 이름 모를 새들을 불러들이더니
이제는 젖은 내 이불까지 말리고 있다
햇빛이 세든 내 작은 베란다에
마음 좋은 유모가 산다
-김금란, <빛을 들이다> 전문
카메라에는 눈 대신 렌즈가 있다. 그 렌즈가 바라보는 중심이 초점이라면, 김금란 시인의 시로 수렴된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자. 우선 김금란 시인의 시선은 고요하다. 그렇게 주변을 한 동안 침묵에 들게 하고나서야 일상이 시작된다. 그런 일상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준비된 마음과 심정적인 안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하루의 부산한 아침이 지나가고 집안에 혼자 남아 평온해질 때 서서히 주변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볼거리가 눈에 들어와도 지나쳐버리면 그만인 일상들이다. 그런 것들을 하찮게 넘기지 않고 존재론적 의미와 상호 관계로 사유해가는 시인만의 고도한 감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다수 여성들이 한가해진 시간에 TV를 본다거나 음악을 들으며 소일하는 경우가 허다하겠지만, 시인의 눈은 소소한 것에도 모성母性의 눈길을 떨치지 못한다. 베란다 한쪽에서 따스한 햇빛을 쬐며 잠든 고양이와 그 햇살 조금을 받아 다육이가 자라고 바람 따라 들어온 구름도 방안에 들다 가고 새들도 기웃대기를 반복한다. 생각해보면 시인에게 과거 속 수년 전 ‘그 여름날’의 베란다는 삶의 고통으로 최악의 시간을 보냈던 마지막 피난처였다. “한때 웅크린 내 등이/ 눈물 자국 흥건한 어둠을 업고/ 쪼그려 앉아있던 그곳”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런 고통을 지우기 위해 어느 날 그곳에 붙은 블라인드를 떼어 내게 된다. 그 열린 공간으로 눈부시게 들어온 햇빛에 조금씩 마음이 환해지면서 암울한 과거의 기억을 지워내며 심리적 안정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아예 햇빛마저 세貰 들어 살며 시인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시인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변화시킨다. 기어이 햇빛은 시인의 유모乳母가 되어버렸다. 지난 과거 속에만 존재하는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처럼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물을 뿜은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는 이 말에 시인은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마다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김금란 시인은 평소의 일상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외부의 변화된 현상들을 받아들이면서 존재론적 고통의 회복을 이뤄냈다. 개인의 고통은 당사자의 노력이 있어야 변화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도덕적인 윤리의식의 해이는 쉽게 치유할 수 없다.
나라도 반쪽 난 땅 그 어디쯤 전라도 땅
생긴 것은 쪽 빨아 먹고 버린 포도 껍데기
그런 잡놈이 하나 있는디
아 그놈이 또 대단한 놈이겄다
그 놈이 본시 전라도 땅 어디서
빤질빤질 선상질하던 놈인디
그때부터 욕심이 주렁주렁
생각이 조물조물
부업으로 목욕탕을 하나 차렸겄따
아 근디 거기서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겄따
가만히 생각하니
그놈 욕심이 또 발광이 나서
이놈의 것 내가 학교 하나 차려불란다
해서 이리저리 돈을 먹이는디
여기도 먹이고 저기도 먹이고
구청직원도 먹이고 면서기도도 먹이고
박사한테도 먹이고 쪼다한테도 먹이고
배고픈 호랑이 먹이 먹이듯
갓난아기 젖 먹이듯
조심조심 여기저기
이놈 돈 안 먹은 놈이 나라 안에 업것따
그놈의 돈이 원체 힘이 쎄서
돈 먹은 놈들 똥줄이 타서
어서어서 학교를 차립쇼 했것따
그놈 재주가 신통방통
돈이 좌르르
여기 뚝딱하면 대학 하나
저기 뚝딱하면 고등학교 하나
이리 뚝딱 저리 뚝딱
××여상 △△여고 □□고
○○대 ◇◇산업대 ▷▷예술대 ◆◆대 ◈◈보건전문대
아이고 숨차라 한 번에 다 외기도 힘들구나
아 그리하여 학교를 지어 대는데
이 학교 등록금 갖고 저 대학 뚝딱 세우고
저 학교 등록금 갖고 이 대학 뚝딱 세우고
그 놈이 재주가 신통방통
돈이 좌르르
-양철식, <니홍하뎐> 부분
사람이 살아가는 집합체가 사회라는 형태를 구성한다. 그 구성원들 모두가 윤리의식을 갖고 있다면야 그곳이 곧 유토피아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양철식 시인의 시적 고발은 비감하다 못해 사회 윤리의식의 부재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가슴 아픈 현실 앞에서 이성복 시인은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미물을 보며 안타까움을 이렇게 말했다.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아, 입이 없는 것들”을 통해 피해를 당하고만 사는 사람들의 비애에 깊이 공감한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밑 바탕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가되고 상처는 비정할 만큼 크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렇다면 양철식 시인이 바라보는 가치는 무엇인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의식에서 비롯된다. 즉 사회의식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적 세계는 참여적 인식에서 가능하고 그 일면에 도사리는 의식은 그것을 부정하려는 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놈 그동안 해 먹은 돈이/ 1004억, 어찌 그리도 천사같은지/ 영락없는 홍길동이지/ 나라에서 정한 부실대학 7곳 중/ 당당히 4곳을 차지했껐따”라며 구체적 적시를 통해 거론되는 양철식 시인의 시적 지향은 부조리한 집단으로 향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이 앓고 있는 고통은 내부의 문제가 아닌 외부 즉 사회 구성원 중 소수가 가해자가 되기 때문에 쉽게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교묘해져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고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해칠 수 있는 심각한 우려를 안고 있다. 그것을 해소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은 국가 또는 사회가 윤리의식 교육 강화를 통한 지속 계도로써 가능하지만, 그마저 장담할 수 없다. 그런 것까지 익히 간파한 시인은 시를 통한 고발을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그것도 우리민족의 민중의식이 담긴 판소리의 가락처럼 은유와 해학을 곁들여 읊어대는 신명이라 해도 인간적인 분노가 팽배해 있음을 감출 수는 없다. 응당 시인은 음풍농월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다. 시대 의식에 대한 투철한 자의식으로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눈요기만으로도 그것을 완화할 수 있다.
낡은 양푼에 조개를 씻는다
남김없이 실토하라고
냄비에 담아 불 위에 올린다
닦달한 바다가 넘칠까 그 앞을 떠나지 못한다
과거는 통증이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처음부터
천둥소리를 낸다
단단하고 쫄깃한 언어의 살이
따닥따닥 닫힌 빗장을 여는 소리
말하고 싶었던 것, 말할 수 없던 것들로
자폐된 오랜 말의 단절
본심本心을 한 술 떠 본다
아직 열리지 않는 저 불안한 것들
토해내지 못한 질퍽한 기억들
자백으로 받아낸 말들이 뽀얗다
김지란, <조개탕을 끓이다> 전문
김지란 시인에게 시의 ‘정처’는 일상일 수밖에 없다. 그 일상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통점 같은 억압을 표출하는 출구로 삼고 있다. 또한, 일상의 접점에서 발화된 서사는 시적 요소로 선택된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일상은 누구나 다반사로 이뤄지는 것이지만, 내밀한 충동과 시 미학적인 세계로 들추어낸다. 그러나 매번 밥 때를 맞춰 상차림을 준비하는 것은 고역일 것이다. 물론 즐거움도 있겠지만, 마치 조개탕에 들어가는 조개를 통해 여성들의 억압된 의식을 해소하려는 듯한 내심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 상상력의 발화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불평등에서 기인한다고 볼 때,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과거는 통증이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처음부터/ 천둥소리를 낸다”는 그것은 하루 이틀에 이루진 것이 아니다. 쌓인 병증으로 가슴속에 도사린 트라우마는 매우 깊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조개탕은 불을 가해야만 완성된다. 불은 어찌 보면 여성들의 가슴속에 억눌린 홧증을 건드릴 수도 있다. 고통스런 홧증을 터트리는 데는 무언가 돌파구가 마련되어야 하지만, 그것마저 싶지 않다. 마침 조개탕을 끓이면서 불기운에 입이 벌려지는 조개를 바라보며 시인은 여성의 정체성 즉 ‘정처’를 떠올린다. “말하고 싶었던 것, 말할 수 없던 것들”의 억압된 감정들을 떠올리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자 시인에게 심리적인 위안이 될 ‘정처’는 어디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이성복 시인은 <서시>에서 방황하는 화자를 내세워 ‘정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촘촘합니다”라며 주체적 삶을 살지 못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즉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인식하는 시점이 ‘정처’라는 것을 이성복 시인은 말해준다. 물론 예시된 이성복 시에서 시적 의미의 모호한 경향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시 김지란 시인의 시로 돌아가 보자. “아직 열리지 않는 저 불안한 것들/ 토해내지 못한 질퍽한 기억들/ 자백을 받아낸 국물이 뽀얗다”는 진술로 볼 때 정체성의 진위를 확인하려한다. 그것은 시적 세계와는 다르다, 하지만, 현실에서조차 자기 동일성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계는 있다. 시적 대상인 ‘조개’를 통해 받아내려는 ‘자백’은 자발적이지 않고 외부의 강압에 의해 이뤄진다. 그렇다면 ‘자백’이 갖는 속성은 강요에 의한 최소한의 발화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면에는 아직도 하고 싶은 더 많은 말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시적 화자 스스로의 각성과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억압되어있는 상태 이전의 본질적인 즉 본성의 문제에서 바라봐야하기 때문이다. 본성의 회복을 통해 진정한 화자의 ‘정처’에 도달하기를 바라면서 혹시 <모퉁이>에서 우연스럽게 맞닥뜨린 사건이 작은 변화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돌아나가는 녹색 치마꼬리가 보인다
어느 누구의 꼬리가 잡힌 걸까
은행나무 길모퉁이
휙 감도는 폼이 어지간히 급한가 보다
무엇을 감추고 가는지
앞품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 한여름 동안 안고 있었던
뜨거운 날들이리라, 뜨거움이란
이 나이에 또 하나의 미련으로 남아 있지만
때론, 돌아설 수 있는 모퉁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진록의 여름도 돌아서는 순간이 있어
온전한 가을로 남아
노란 은행 알을 영글게 했겠지
늦더위 계절이 9월의 모퉁이를 돌면
미처 치켜세우지 못한 마음
또루륵 떨어진다
치마꼬리에 매달렸던 노란 은행 알
길 가는 할머니 손에 잡힌다
김정옥, <모퉁이> 전문
시는 찰나의 문학이라고 볼 때 시인은 매사에 긴장과 주의를 게을리 해선 안된다. 김정옥 시인은 어느 길 ‘모퉁이’를 돌아나가듯 사라져가는 “녹색 치마꼬리”를 보게 된다. 그렇게 시적 호기심을 끌어내는 ‘치마꼬리’의 사용 주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렇다면 부분을 통해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때 은연중 익명화된 누군가를 지시하거나 아니면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요즘 여성들이 입는 치마에 무슨 꼬리가 있겠는가 싶은 의문은 어떻게 할 것 인가이다. 그런 상상력이 피로감에 빠져들 때 쯤 “은행나무 길모퉁이/ 휙 감도는 폼이 어지간히 급한가 보다”라는 구체적 형상 묘사를 보면 허상이 아닌 실재Toipa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사실 ‘치마꼬리’라고 한다면 옛 어머니들의 한복으로 입던 치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치마꼬리’는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볼 때 길가 은행나무의 늦가을 풍경임을 시적 정황으로 알 수 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에서 계절의 변화를 읽어내듯, 인간의 생애도 세월이라는 경과를 통해 변화해가듯 자연의 순환처럼 확장과 전위轉位의 과정이 닮았다. 시인은 “아마, 한여름 동안 안고 있었던/ 뜨거운 날들이리라, 뜨거움이란/ 이 나이에 또 하나의 미련으로 남아 있지만/ 때론, 돌아설 수 있는 모퉁이가 있어서 다행”이라며 자연의 순리에 따라 변화되어가는 은행나무처럼 시인도 그런 과거의 시간이 있었음을 상기한다. 속절없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져가는 “녹색의 치마꼬리”는 자연과 같이 인간에게도 세월의 경과에 따른 상실감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며 세월의 무정함을 안타까워한다.
시인은 포착한 일상을 시인만의 것으로 소비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자연 변화에 대한 천착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공존과 실존에 대한 의문과 질문까지도 자연스럽게 수렴하고 있다. 자연의 무구한 시간이나 인간의 나이로 적층되는 유한한 시간 안에서 “노란 은행 알/ 길 가는 할머니 손에 잡힌다”며 자연과 인간의 순환은 유사 반복됨을 일깨워준다. 작은 변화에도 시적 감각을 발휘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론적 사유 안으로 유인해가는 김정옥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다. 관점이라는 시선은 매번 또 다른 상상력을 유발한다.
이쁘긴 하더라
애교 열두폭 휘휘 젓는 요염한 것
얌전하니 순한 것
까불까불 좀 가벼운 것
고상하니 우아 떠는 것
하물며 이것들이 겁없이 바람이 났다는 것
그것들 보자고 우르르 몰려드는 인파
그들도 봄바람 났다는 것
아무한테나 헤프게 벙긋벙긋 웃지를 않나
가느다란 허리 흔들거리질 않나
수줍은척 살짝 얼굴 가리질 않나
뒤돌아서 엉덩이 씰룩거리질 않나
온통 바람난것들 색색이 모여
꼬리치질 않나 무서운 봄바람 중독되더라
부럽긴 하더라
저토록 아름다웠던 적 생각이 안나서
도도하게 활짝 피워본 적 없어서
봄바람에 흔들린척 나서 본 적 없어서
박수림, <바람난것들> 전문
시인이 구분하는 색감色感과 미감美感을 통해 공명해오는 프리즘의 파동은 크다. 그 진앙지는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사변에 대한 응시에서 비롯되었고 오롯하게 시적 감각 즉 ‘느낌’이 되어주었다. 그 대상이 실재하는가와 실재 하지 않는 허상인가를 따지려든다면 가늠부터 쉽지는 않다. 우선 ‘바람난것들’이란 말부터가 발칙스럽고 예사롭지 않는 호기심을 도발한다. “이쁘긴 하더라”는 어감에서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시기와 질투가 은근하게 깔린 것 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분위기에 편승해 공감은 해주었지만, 시인 내면에는 여성 특유의 시기와 질투심이 온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엉뚱하겠지만, 이성복 시인은 <느낌>이란 시에서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라며 ‘느낌’에 대한 문답을 명확히 제시해준다. 그에 반해 박수림 시인은 ‘바람난것들’에 대한 ‘느낌’을 “애교 열두폭 휘휘 젓는 요염한 것”으로 폄훼하면서도 모호한 어투로 다양한 특징을 횡적으로 나열해간다. 거기다 ‘바람’이라는 부정적인 사회 인식을 더하여 “아무한테나 헤프게 벙긋벙긋 웃지를 않나/ 가느다란 허리 흔들거리질 않나/ 수줍은척 살짝 얼굴 가리질 않나/ 뒤돌아서 엉덩이 씰룩거리질 않나/ 온통 바람난것들 색색이 모여/ 꼬리치질 않나”라며 부정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기어이 그 패악으로 궁극에는 ‘중독’이라는 무서움을 각성하도록 경고까지 한다. 하지만, 박수림 시인도 여성의 본성을 숨길 수는 없다. 시인의 눈으로 봐서도 “부럽긴 하더라”라며 마음 한 켠으로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기변명에도 충실하다. “저토록 아름다웠던 적 생각이 안나서/ 도도하게 활짝 피워본 적 없어서/ 봄바람에 흔들린척 나서 본 적 없어서”라며 그런 부류와 다르다는 자존심을 잊지 않는다. 시를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시인이 사유하려는 관점이 어디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은근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한 부분을 빗대어 봄꽃놀이를 즐기는 서정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는 시적 발로까지도 식상하지 않다. 어차피 시의 본질인 서정에서의 발화도 자연을 매개로 하는 삶의 욕망이고 전체가 될 수 없는 부분에서 교차하기 때문이다. 우린 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치열하게 얽혀있는 교집합을 의식하지 못한다. ‘소금자루’는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형상화된 실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보낸 아내 생각 지우려 이사를 결심했다.
잠시 피었다 시든 꽃으로 늘어선 장롱 안 옷가지에는
환한 향내가 음습한 내음으로 낡아져가고
기다림 묻어나는 냉장고, 싱크대며
두루 아내 손길 정리하다 눈 들어보니
부엌 베란다 구석 아내가 쪼그려 앉아 있다
암처럼 굳어진 차가운 몸으로
검게 탄 솥단지 붙들고
혼자 얼마나 울었던지 짜디 짠 물 뚝 뚝 흘리고 있다
퍼런 서슬 잠재우고 품고 살던 등 푸른 생선도 잊은 채
하얗게 부서진 몸으로
가자, 이젠 그만 가자 달래도 외로 고개 돌린 채
못 간다며, 이대로는 못 간다며 꿈쩍 않고 버틴다
분주한 발걸음, 재촉하는 소리에 허리 펴고 바라 본
부엌 窓 너머 무겁던 하늘 왈칵 비 쏟아부어대던
김명학, <소금자루> 전문
그것을 의식할 때는 자기 삶에 대한 갱신 즉 변화의 시점이거나 그런 계기와 맞닥뜨려야만 깨닫게 된다. 우리는 가상에서나 존재하는 이상세계Utopia를 갈망하면서 현실이라는 실재Topia 세계에 살아간다. 결국 이상세계와 실재한 세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명학 시인은 시로써 과거 한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시적 진술 속에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음을 고백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낸 것은 자연의 순리에 따른 생명현상이다, 반면 아내와 함께 살았던 그 집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떠나는 이사는 사랑하는 아내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극복하고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궁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차피 이상세계라는 유토피아는 인간의 삶속에서는 불가능해 꿈만 같은 시원의 상태라고 상상해본다면 불행을 떨쳐내고 새롭게 살아가려는 노력 또한 인간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궤도를 가진‘슬픔’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주변을 별자리처럼 오래도록 맴돈다. 이성복 시인은 <슬픔>을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내지 않는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라며 간절하게 묻고 있다. 그런 슬픔마저도 시인은 담담하게 감당해야만 한다. “잠시 피었다 시든 꽃으로 늘어선 장롱 안 옷가지에는/ 환한 향내가 음습한 내음으로 낡아져가고/ 기다림 묻어나는 냉장고, 싱크대며/ 두루 아내 손길 정리하다 눈 들어보니/ 부엌 베란다 구석 아내가 쪼그려 앉아 있다”는 것으로 보더라도 삶의 출발은 가장 자연스럽게 시작되지만, 차차 인간이 규정해 놓은 심연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것 또한 순리에 따른 것으로 인식해야한다. 그 순환의 질서에서도 냉혹하리만치 생로병사와 지수화풍의 자연법칙은 인간의 기율을 압도해버린다. 형체가 무화되어 사라지듯 사랑하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암’이라는 덩어리에 의해 행복이라는 교집함 상태에서 예외가 되어버렸다. 결국 인간의 생명이 다해서야 당도할 수 있는 이상세계는 실재한 현실과 다르지 않다. 냉혹한 현실의 심연을 통과해야만 당도할 수 있는 곳이 Utopia라면 현재 살고 있는 세계는 불모지Dystopia인지 모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현실 바깥의 Utopia라고 내면화된 세계를 꿈꾸며 고유한 본성을 잊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소금도 본래의 성질은 푸른 바다였다. 그 안에 파도가 살고 등 푸른 고등어가 유영하던 대양大洋이었다. 그 소금을 결정체로 만들어낸 인간도 본래는 흙이었음을 다 안다. ‘소금자루’는 김명학 시인의 시적 세계로 유입되면서 잠재된 서정적 자아를 깨우는 계기가 된다. 소금자루를 통해 바다를 떠올리며 “가자, 이젠 그만 가자 달래도 외로 고개 돌린 채/ 못 간다며, 이대로는 못 간다며 꿈쩍 않고 버틴”아내를 떠올린다. 은유로 형상화된 ‘소금자루’라는 대상은 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의식 즉 아내에 대한 시적 상관물임은 여지가 없다. 소금의 형상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무화과정을 거쳐 사라진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간이 경과해도 변하지 않는 본성은 남아있다. 비 갠 뒤 하늘을 보면 우리가 꿈꾸는 일곱 색깔 무지개가 보이는 곳이 Utopia라고 믿어야 한다. 그런 환상적인 순간은 너무 짧아 안타까움은 클 수밖에 없다. 사랑과 행복도 그런 것이다.
우주라는 메커니즘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생각과 행위는 작고도 작아 스스로의 만족이나 기쁨을 감당하지 못한 때도 있다. 우리는 성장하며 알게 모르게 주변의 동질적인 요소를 묶어 인연을 만들어 간다. 그렇게 인연으로 맺어진 사회적 관계로 인해 예상치 못한 즐거움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험은 오래 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여기에서 시적 세계와 실재Topia와의 간극 분리까릴 상상하기에는 이르다. 여섯 시인의 시 6편을 통해 바라본 시적 세계에서 모든 시의 접점은 몸으로 맞닥뜨리는 찰나에 발현됨을 알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잠재되어 있다가 사유의 반복으로 형상화되는 것도 당연하다. 전체성보다는 개별성의 도드라진 점도 있지만, 시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는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사물이 시적 대상화로 포착되어 시인의 내면화를 거치게 된다. 이때 언어를 통해 변신하게 되는 즈음에 시라는 발화과정에서 문학적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 특히 주변의 풍경적 사물에 집중한 사유는 시인들의 시적 세계를 강화시켜 새로운 확장을 시도하는 경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첫댓글 반딧불이는 뭔고?
숲속시 동인이 만든 동인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