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85)
《무당의 예언 탓인가 사고를 당한 김삿갓》
봄이 되었지만 김삿갓은 별로 할일이 없었다.
낮에는 친구들조차 농사일로 모두 들녘에 나가 있으니 허탈감에 빠져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황은 조금 달라져
모임방에 나가 淫談悖說을 듣고 여담을 나누다가,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수안 댁과 정을 나누는 것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어쩌면 이런 재미라도 붙였기에 천동 마을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던 장마철인 어느 날, 그날은 김삿갓이 모임방에 모인 친구들에게 술 한턱을 냈다.
김삿갓이 술을 사게 된 까닭은 마누라 수안 댁의 충고 때문이었다.
"남의 술을 한 번 대접받거든 당신은 두 번씩 술을 사드리세요. 남의 술을 얻어먹기만 하는 사내처럼 쩨쩨한 인간은 없으니까요. 돈은 뒀다 뭐에 쓰게요. 우리 집 돈은 모두다 당신 소유인걸요."
그러면서 수안 댁은 삿갓이 모임방으로 나가기 전에 넉넉한 돈을 쥐어 주었다.
그날은 초저녁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밤이 깊어서도 계속되었다.
모임방 친구들과 나눈 술에 거나해진 김삿갓은 도롱이를 쓰고 조조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오늘은 술맛도 좋았지만, 참새와 땡굴이의 음담에는 정말 놀랐는걸.
너무 웃다보니 배가 다 아프구먼." 그러자 조조가 말을 받아,
"아닌게 아니라 그 친구들 걸쭉한 농담에 배꼽이 빠질 뻔했네." 한다.
두 사람은 오늘, 모임방에서 오가던 음담패설의 여운을 생각하며 서로 껄껄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렇게 소리내어 웃던 김삿갓이 흙탕길을 천방지축 걸어가다 일순간 발을 잘못 디뎌 두 길이 넘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앗! 이 사람아!"
조조는 무심중에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벼랑 아래로 떨어진 김삿갓은 "아이쿠!" 소리만 한 번 질렀을 뿐, 인기척이 없었다.
조조는 부랴부랴 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김삿갓이 풀밭에 빨래처럼 널 부러져 있었다.
"이 사람아! 어디를 다쳤기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가?"
김삿갓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사지를 조금씩 움직거리며
"인명지재천이라, 죽지는 않았으니 걱정 말게!"하며 위급한 상황임에도 익살을 부렸다.
그러자 조조는 무심중에 웃음을 터트리며 "예끼 이 친구야!
어디를 다쳤는가 말일쎄, 자네가 죽은 줄 알고 걱정하는 줄 아는가?"
"그러게, 죽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가 없는 걸 어떡하나.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네."
"뭐? 다리가 부러져 ... 그게 정말인가?"
조조는 기겁하여 김삿갓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워낙 캄캄한 밤이라서 어디를 어떻게 잡아 일으켜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사람아! 내가 업을 테니 어서 등에 업히게!"
조조는 김삿갓을 부축해 등에 업고 벼랑을 기어오르다시피 올라왔다.
그리고 김삿갓을 업은채 땀을 비오듯 쏟으며 집으로 데려갔다.
"이거, 미안허이..."
조조의 등에 업힌 김삿갓이 말하자.
"미안은 그만두고 많이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수안 댁! 수안 댁! 어서 방문을 열어요!"
삿갓의 집에 다달은 조조는 황급한 어조로 수안 댁을 불렀다. 그러자 다급한 소리에 놀란 수안 댁이 벼락같이 뛰쳐
나왔는데 비에 쫄딱 젖은 두 사람의 모습도 기가 막혔지만 남편인 김삿갓이 조조의 등에 업혀 축 늘어져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 머니 ... 이게 무슨 날벼락이에요!"
수안 댁은 울음 섞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무당의 예언대로 남편이 사고가 나, 다 죽게 된 몸으로 친구인 조조에게 업혀 온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놀란 마누라를 보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보게!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네.
재혼을 하면 남편이 또 죽게 된다는 무당의 예언은 멀쩡한 거짓말 이었어!"
그러자 수안 댁은 남편이 죽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한편으로 뛸 뜻이 기뻐하며,
"어디를 어떻게 다치셨어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그러면서 황급히 방문을 열어 젖혔다.
조조의 등에서 방바닥으로 눕혀진 김삿갓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그러자 김삿갓의 험한 몰골을 씻길 물과, 비에 젓은 몸을 닦아줄 천을 찾아 황급히 밖으로 나가던 수안 댁은 조조에게 부탁을 한다.
"수고스럽지만 약국에 가셔서 의원님을 빨리 좀 모셔와 주세요. 어서요!"
조조는 황급히 의원을 부르러 약국으로 향했고, 수안 댁은 대야에 물을 받아와 김삿갓을 씻기고 있었다.
"어디를 다치셨어요?'
"응, 다리가 부러진 것 같네, 꼼짝할 수가 없구먼"
수안 댁이 비에 젖은 남편의 저고리는 벗겼지만
바지는 발이 부러진 김삿갓이 아파하므로 벗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곧 가위를 가져와 김삿갓이 아파하는 다리 쪽
바지단을 갈라내고 보니,
발목 위에서 무릎 사이 정강이뼈가 어그러져 보였다.
수안 댁이 그 모습을 보고, 공포감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도,
마치 자신의 팔자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조조가 의원 영감을 모시고 왔다.
의원이 진찰을 하는 동안에도 수안 댁은 공포감을 억제할 수 없었던지,
"의원 어른! 이 양반 설마 돌아가시지는 않겠지요?"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부인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사람이 죽기가 그렇게도 쉬운 줄 아시오 ?
다리뼈가 좀 부러졌으니 서너 달은 누워 있어야 겠지만 그러고 나면 완전히 회복될 테니 아무 걱정 말아요!"
의원은 부러진 곳을 버드나무로 동여매 준 뒤에 산골을 듬뿍 내 주며 말했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산골이나 열심히 먹어요.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 정도의 횡액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인데, 무슨 걱정인가!"
늙은 의원이 태평스럽게 위로해 주는 바람에,
김삿갓과 조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수안 댁만은 아직도 미신의 망령에 사로잡혀 마음을 놓을 수 없는지, 계속 불안해하였다.
모두가 가버리고 나자 김삿갓은 상처가 새삼스럽게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누라가 걱정할 것이 안쓰러워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한잠 잘테니, 당신도 아무 걱정 말고 눈을 붙여요."
"제 걱정은 마시고 당신이나 어서 주무세요.
상처가 아파서 어디 주무실 수나 있겠어요?"
"걱정 말아요.
당신이 잠을 자야 나도 마음 놓고 잘 수 있을게 아닌가."
"알았어요. 그럼 저도 잘 테니 당신도 주무세요."하며 김삿갓에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도 불을 끄고 옆에 눕는다.
생각해 보면 둘은 오다가다 아무렇게나 만난 부부간이다.
처녀 총각으로 만난 처지가 아니기에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부부였다.
그러나 이렇게 만난 남녀간이라도 밤마다 살을 섞으며 지내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정이 두터워졌다.
그래서 김삿갓은 자신 때문에 수안 댁을 불안하게 된 게 무척 미안했다.
(수안 댁 ! 당신에게 이런 걱정을 끼치게 되어 정말 미안하네. 그러나 나는 결코 죽지 않을 테니 그 점만은 안심하게. 그러니까 당신은 "또다시 과부가 된다"는 잘못된 망상만은 깨끗이 씻어 버리게 ! ...)
김삿갓은 마음 속으로 그런 기원을 올려 보다가 , 자신도 모르게 혼수 상태에 빠져 버렸다.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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淫談悖說 음담패설
淫 음란할 음
談 말씀 담
悖 거스를 패
{忄(심방변 심) + 孛(살별 패)}
說 말씀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