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세계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침묵은 미래 세계의 신비입니다.
내가 서점 점원이었으니 월부 책에 대해 말해볼까? 아마도 월부책의 원조는 '김찬삼의 세계 여행 전집'이 아니었을까? 몇 권인가 전집을 묶어낸 출판사는 장사를 했는데 마케팅 기법이 대단했어. 바로 월부 장사를 한 거다. 우리 집도 월부책 전담 직원을 뽑고서 직장으로, 가가호호 가정집으로 나갔다. 우리 점방 월부 아저씨에게 들은 무용담을 소개할까. 아~ 어찌 그때를 잊을까. 직장엘 찾아가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월부 카드를 썼대요. 팔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주문을 받았다는 게 실감이 날 게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이 있지 않은가. 더우기 외국으로 출국하는 것조차 어렵던 시절, 김찬삼은 그걸 건드린 거야. 외국 여행이라는 사람들의 꿈을 대리만족 시켜 준 거지뭐야. 통일이 대박이라지만 김찬삼의 여행기도 대박이었다. 와이프 시집 올 때도 가지고 온 책목록에도 끼어 있던 걸. 온갖 사진으로 도배한 책을 월부로 사니까 책값도 별거 아니거든. 지금에야 사람들은 영악해져 월부로 책을 사는 걸 망서릴 거야. 하지만 카드도 없고 뭐든 몫돈이 있어야 살 수 있던 시절에 월부로 끊어서 물건 값을 치룰 수 있다는 건 공짜로 사는 거 같았다고 해. 이제야 세상이 다 월부로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고, 인생 자체가 월부인생이니까 쉽게 월부에 혹할 일이 없지 그땐 월부로 책을 사는 사람도 파는 책장사도 황금을 줍는 거같이 노다지판이었다나. 생각해봐. 50만원짜리 책을 현금으로 사려니 주머니에 거액이 있을리 없고 10개월 월부로 산다면 월 5만원이라 뭐 대단한 금액이 아니잖아. 당시 월부 제도가 없었다. 책구입 카드만 쓰면 당장 책, 다섯 권 또는 열권짜리 호화장정 전집을 살 수 있잖은가? 김찬삼의 세계여행 시리즈에 대한 시중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당장 집에 가서 세계 여러나라의 실상을 총천연색 사진으로 볼 수 있잖은가. 뉴옥, 파리, 로마 등등 세계 각국의 모습을 보는 것만해도 대박이 아니었을까? 김찬삼 이후 무슨무슨 세계명작소설부터 철학에다가 역사까지 전집류가 출판계의 대세가 되었다. 나중엔 요리책, 일글리쉬 나인 헌드러드(900)-영어회화, 이 건 레코드로 카셋트로 나왔다. 전집류로 나와서 월부로 팔았으니. 우리 집도 돈 좀 만졌다. 우리 서점에 월부 수금사원도 두 사람이나 두고 달마다 월급날이 되면 직장으로 책값을 받으러 다녔다. 요즈음 생각해보면 골치 아프게 직접 사람이 돈을 수금하러 다니니 퍽 불편했을 게다. 카드로 사면 자동으로 수금할 수 있잖은가. 사무실에 돈을 월급날 받으러 가면 사무실 근무하는 분위기가 장터같이 요란벅쩍했을 테니. 말도 마. 식당에 술집에 다방에 외상 그은 걸 두고 한복차림의 다방 마담까지 출입했거든. 물론 점잖은 분이 외상으로 찍~ 그은 외상값은 직접 가게로 가서 돈을 갚았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술집 외상은 꼭 직장으로 와서 받아 갔다. 직접 가서 돈을 갚으면 그 자리에서 또 한잔 마시게 되거든. 술집 웨이터는 나한테 받으러 오질 않는다. 직접 오면 또 한잔하고 가니 매상이 오르잖아.
우리 서점에는 전국구 월부 책장사가 이따금 내려왔다. 전국구가 뭐냐고? 출판사에서 고용했거나 프리랜서로 월부 책장사를 하는 프로를 그리 부르거든. 대단하더구먼. 여관에 방을 잡고서 면 단위로 뛰는데 엄청났다. 우리는 차를 제공했지. 당시 시골에는 교통편이 아주 나빴다. 지프차는 기동력이 뛰어나서 아주 시골까지 초토화를 시키더구먼. 얼굴에다가 말솜씨까지 갖춘 사람들이 어떻게 구슬렸던지 매일매일 월부책 구입카드를 열두어 장을 내놓으니까. 역시 프로는 뭐가 달라도 달랐어. 그중에도 유달리 잘 생긴 세일즈맨은 책 팔다가 처녀 하나를 꼬셔서 결혼까지 하는 걸 보곤 강호엔 고수가 많다는 걸 느꼈어. 당시 책값은 이랬다. 가깨(곱하기)라고 일본 말로 불렀는데 하찌고 또는 시찌가깨. 즉 85내지 70%로 넘어오면 15에서 30%가 우리 같은 도매상 차지가 되고 거기에 5~10% 정도 빼고 소매상에 넘겼다. 월부 책은 보통 50%에 가져오면 30%가 세일즈맨 몫이고 나머진 서점 몫인데 월부로 팔았으니 수금사원에 현금회전 때문에 20%가 온전한 이익이 되는 건 아니지만 책장사도 할만 했다. 잡지는 기껏 10내지 15% 정도 마진이 붙었다. 참고서는 황당하다. 채택료가 붙어서..........그만 두기로 하자. 하지만 원성이 만만찮았어. 무턱대고 월부로 책을 산 사람들이 월급날이 되어 책값을 받으러 가면 그제야 월부가 무서운 걸 안 거야. 월부책 값 갚느라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라고 우리한테 원망하는 사람도 있었거든. 어쩌겠어, 우리도 장사꾼인데.
월부 이야길 조금 더 해볼게. 내가 직장을 잡고서 제일 먼저 가다마이,양복을 빼 입었다. 삼각동 조흥은행 본점 근처에 있는 양복점에서 맞췄거든. 월급날이면 아주 월급에서 공제했다. 꽤 비싼 가게였는데 몇 개월 나눠 내니까 부담도 없고 좋더라고. 요즈음 같이 카드로 끊으면 간단하지만 그때는 카드가 뭔 카드. 신용카드 없던 시절에 일일이 외상 값 받으러 다니느라 쓸 데 없는 힘 쓰는 것보다 경제적이지.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 신용카드가 아닌가? 월급날 돈 받으러 회사로 찾아왔어. 흐흐흐 술도 그렇게 마셨는데 월급날 뒷문으로 도망가는 직원들한테는 화장을 진하게 한 마담이 직접 돈 받으러 왔어. 직장에서 무슨 창피냐고. 망신 시키려는 수작이지뭐. 이야기 꺼내놓고 보니 월급장이들 외상 긋는 풍경도 써볼만하겠네.
당시 책을 사는 사람들의 풍속도를 볼까. 5.16 혁명이 나고 제1차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숨가쁘게 세상이 바뀌더구먼. 영화 상영 전에는 항상 대한 뉘우스에서는 월남에 파병한 우리나라 군인들이 베트콩을 얼마나 죽이고 베트콩이 점령한 지역을 자유 월남 세상으로 만들었다는 전쟁 이야기하고 수출하느라고 시골에 가가호호 가발 장사꾼들이 머리칼 수집하러 다니는 장면이 단골로 나왔다. 부산 항구에 큰 배가 부두에 정박하면 맙소사 일꾼들이 그물 같은 걸로 수출품을 배에 선적하는 장면도. 요즈음 같으면 콘테이너로 배에 싣는 건데. 그것도 크레인으로 말이야. 당시엔 전부 사람 손으로 처리했다. 수출 얼마했다고 매일 신문에 나곤 했다. 남대문, 숭례문 옆에 있는 상공회의소 삐죽한 꼭대기엔 전광판으로 오늘까지 우리나라 수출액이 얼마라고 나왔다. 작년에 무역의 날 60주년이라더군. 50년 전, 1964년 12월 5일 우리나라 수출이 1억 달러를 달성한 걸 기념해서 수출의 날로 정했다지? 이제는 무역의 날로 이름도 바뀌고 금액도 무려 조 단위라네. 2024년 수출액은 6,838억 달러, 세계 순위는 6위다. 수출액 1억불을 넘기면서 세상은 뭔가 흥청거리기 시작했다. 월남에 가서 숱한 젊은이들이 다치고 죽어서 오더라만 우리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 시킨 게 바로 월남전이라 해. 공장이 늘어나고 수출로 돈을 번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라 경제가 숨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까지 돈이 돌고 도니까 떼돈을 번 벼락부자들이 생겨났다. 이 양반들이 맨처음엔 좋은 집을 사겠지. 그러면 다음에는 소고기나 사먹고 말까? 부자들은 좋은 집에 치장할 게 필요했다. 처음에는 호마이카 장농에다가 응접실 소파하고 싱크대 들여놓고 하면서 집 치장부터 할 테지. 그 다음은 바로 책이야.
그걸 눈치 채고 출판사들이 책에다가 분칠을 한 게야. 금빛으로 삐까번쩍한 호화장정을 한 책으로 눈을 돌린거야. 내면의 뭣인가 부족한 그들은 유식한 체 하기 위해서 책을 사겠지. 그래 소고기가 아니고 속에 뭔가 든 걸 흉내 내고 싶었던 거야. 그런 용도로 전집류가 딱이었던 거야. 전집류는 그래. 금장을 두르고 삐까번쩍하게 외양을 장식하는 게 특색이었어. 응접실, 그땐 거실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에 책장을 꽉 채우게 전집류를 들여놓으면 흡사 도서관에 온 거 같더라나까. 뭐 어때, 폼을 낸 벼락부자도 좋고 책을 팔아먹는 우리 서점도 돈 벌 수 있어 좋은 거지. 옛날에는 돈을 벌면 족보를 사고 벼슬을 하면 조상 묘소를 치장했다지만 그때는 책을 사고 대학 졸업장을 박았다고 하드만.
이어령, 다들 알고계시겠지, 을 이야기해볼까 '전쟁데카메론'이 한국일보에 주말 연재 소설 형식으로 연재되었다. 이어서 '장군의 수염', '바람이 불어오는 곳'(서양문명을 소개한 거), 우리나라 문명을 소개한 '흙속에 바람속에' 를 출간하며 베스트 셀러 작가로 등장한다. 경기고에서 국어선생을 하다가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이어령 선생은 우리나라 문단의 반짝이는 아이콘이었다. 풍부한 지식과 온갖 자료, 박학다식한 선생의 필체는 화려했다. 더구나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 선생의 작품을 만났으니 완전히 푹 빠져들었다. 그뿐일까? 출판계의 구세주였지 뭐. 이어령선생은 72년 창간한 문학사상이란 잡지 주간으로 문학계의 권력으로 등장한다. 당시 순수 문학잡지 중 현대문학은 평론가 조연현과 미당 서정주로 대표하는 동국대 국문과 세력권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해. 시인 미당과 쌍벽을 이루는 소설가 김동리 선생을 따르는 서라벌예대 문창과(요즈음 중앙대) 출신들이 월간문학을 중심으로 포진했다면 이어령 선생은 둥국대와 서라벌을 제외한 대학과 자신의 모교 서울대 출신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더 이상 말하긴 그러네. 내가 문학에 몸을 담았던 게 아니니까. 서점에 있으면 저절로 듣게 되는 풍월로 알아 주게나. 책방 점원 주제에 .......... 만약 이어령 선생이 요즈음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나왔으면 그만큼 각광을 받았을까? 그는 책을 읽다가 멋진 귀절, 반짝이는 지식이 나오면 카드에 옮겨 쓰고 저장을 한다고 해. 당신이 책을 쓸 때 적절하게 써먹기에 박학다식한 재사(才士)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리스만이라는 미국 학자의 '고독한 군중'을 자신의 책인양 출간해서 욕도 얻어 먹은 거로 기억된다.
당시 시 월간지는 현대시학인가 있었는데 나중에 '심상' 을 박목월 선생이 창간했다. 목월, 버릇없게 불러보는 건 그래야 운율이 맞아 떨어지는 거 같아서. 그 양반은 스포츠 머리를 했다. 대단한 멋쟁이셨지. 말소리도 얼마나 구수한지, 당시에 목월 선생이 티브이에서 강의를 하고나면 경상도 사투리가 인기가 엄청 올랐대나. 우리 고향에 문학강좌로 내려오신다는 소문을 들으면 제빨리 팔리지 않아서 구석에 처 뱍아 두었던 심상책을 제일 좋은 자리에 먼지를 털고선 진열해 둔다. 선생이 책방에 들르지 않을 턱이 있나. 당신의 월간지가 떡하니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가방에서 당신 시집 몇 권 꺼내서 사인을 해서 주시더라고. 내가 눈치가 빠르게 서가에 꽂힌 선생의 시집이나 심상을 꺼내서 사인을 받겠지. 우리 서점 단골한테 목월의 싸인 받은 걸 선물로 드리면 얼마나 황송해 하는데. 서점 매상은 이렇게 올리는 거라고. 고모부가 이런 날 기특하게 보시고선 나보고 서점을 맡아라 하는데 난 거절했다고. 당시 책방 점원에 불과했지만 내 꿈은 더 높고도 멀리 있었어. 사실 이 제안을 거절한 걸 무척 후회했다. 기껏 월급쟁이하려고 서울 가서 꼬질꼬질하게 살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참 서점집 아이가 뭔 말이래. 난 우리 아버지가 고모부하고 동업으로 서점을 경영하는 줄 알았거든. 커서 보니까 아니야. 고모부한테 매인 월급쟁이에 불과했어. 한때 교과서 배급권을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지만 문교부 교과서 담당자들의 부정문제로 판매권을 교육청으로 강제로 반납했어. 졸지에 빈털털이가 된 셈이야. 남보기엔 그럴 듯 했지만 우리집은 처남매부간이라도 주인과 종업원에 불과하더라고. 똑똑한 척하는 걸 보니 내가 서점 경영을 맡았으면 잘 했을까? 천만에 교양서적 팔아서 돈이 되겠어. 역시 승부는 참고서, 학생들 상대로 장사를해야 되었다고. 우린 동아출판사가 주된 거래처였다. 교학사 하나 빼고는 출판사 전부하고 거래를 한 옛말로 거상(巨商)이었어. 인터넷 상거래가 일상화된 요즈음 서점은 다들 문을 닫게 마련인데. 고모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은퇴하고난 다음 자식대에 서점을 직원한테 넘겼지만 얼마가지 않아 문을 닫더구먼. 세상이 바뀌어 인터넷 거래가 뜨면서 서점은 문을 닫을 수 밖에. 그래도 서점은 장사꾼이라기 보다는 뭔가 고상한 선비마냥 함부러 대하질 않더라고. 많은 학자와 문인들,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어. 시골에서 책방을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에서 고은, 황석영, 이문구, 미당, 김동리, 권정생, 박목월, 이가원, .......이런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와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은 서점 점원으로서 대단한 영예가 아닐까. 고은선생과 황석영과 함께 했던 술자리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밑줄 쫙은 글 쓰다보니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어서 교류라고 했으니 우습다. 얼굴 익힌 정도라고. 이문열이는 내가 고향 떠나고난 뒤에 서점에 들러 나를 찾았다. 서점에 커다랗게 싸인을 남기고. 동창이었거든.
김주영 선생이 막 월간문학에 대뷰하고 활발하게 글을 쓰던 시절이었다. 고료가 꽤많이 모였다고 서울에서 문인들을 부른거야. 문학강좌라는 형식으로. 문화회관이라고 가톨릭 직영 문화센터에서 한500여 명을 모시고 강좌를 열었는데 황석영씨 차례에 문제가 발생한 거야. 역에 내리자마자 혼자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다가 온 황석영이 이리비틀 저리비틀하면서 겨우한 말은 이랬어. "작가가 뭘 쓰겠어. 뭔가 쓰긴 써야 하는데...써야하는데 쓸 자유가 없단 말이야. 그렇다고 저 높은 곳에 계신 분들한테 욕할 거 없어. 작가라는 우리 대갈통이 깡통인걸 누굴 욕해......그래도 하고 싶다. 욕이나 걸판지게 뱉어내고 노고지리통에 들어가면 어때...." 이런 말이었지 싶다. 이 양반 찾느라 내가 술집뒤지느라 고생깨나 했는데 강연을 망친 거지 뭐. 끝내 고은선생이 야단치시기에 내가 단상에 올라 술 주정을 부리던 황석영을 붙잡고 겨우 내려왔는걸. 충격이었어. 그렇게 통제가 심했던가. 작가가 쓰고 싶은 걸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시대의 절망을 그에게서 배웠지. 우리 가톨릭 안동교구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는 극장이 있었고 레스토랑과 음악다방이 있어 시골에서 문화 살롱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가끔은 송건영 동아일보 전 편집국장 같은 반체제 거물이 내려와서 강좌를 할 때면 스릴이 넘쳤다. 교구장이시던 두봉 주교께서 방패 역할을 해 주지 않으셨다면 꿈도 꿀 수 없던 침묵의 시대였다 그때는. 바로 유신의 막바지라 세상도 숨이 차서 헐떡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가톨릭 안동 교구에서 가톨릭 농민회에서 감자였던가? 하여튼 커다란 문제가, 아~ 농민회 회장 오원춘 사건 일어나며 농민회 지도신부가 잡혀가고 경찰이 목성동 주교좌 본당 입구를 틀어막고서 전기와 수도를 끊어버렸다. 신자들과 경찰 대치사건은 유신독재 시대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다.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내려오시고 겨우 진정됐지만 정권은 시민들의 봉기에 놀랐던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가톨릭을 중심으로.
우리가 유신 시대였다면 미국은 히피가, 베트남 전쟁 때문에 생긴 반전세대가, 일본은 전공노가 비행기를 납치해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한편 도꾜대학 강당에서 강연 중인 교수를 단상에 올라간 학생이 칼로 찌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럽은 어땠을까.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뉴레프트)이 거칠게 유럽 대륙을 쓸어갔다. 중국에는 거대한 물결, 문화대혁명이라 했던가, 홍위병이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난동을 부린, 문화가 실종 된 엄청난 대변혁기였다. 후랑크 시나트라 같은 정통 가수의 시대에서 비틀즈가 나오던 회오리 바람이 일던 시절이었던 격변의 시대였다. 그랬다. 지구 어디서나 변화의 물결에 몸살을 앓고 있던 힘든 시절이었다. 바햐흐로 유신이 그 흉칙한 이빨을 들어내려고 눈치를 살피던 바로 그때였다.
그래도 잊혀지지 않아. 추운 겨울, 퇴근 무렵에 들르는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책이야기를 할 때가 그립다. 책방 난방은 톱밥 난로를 썼거든. 이게 화력이 얼마나 좋고 오래 가는지. 무쇠 난로에 주전자를 얹어두면 구수한 보리차 냄새가 죽여줬다고. 아직도 김주영선생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우리 책방의 뜨끈뜨끈한 난로와 보리차 냄새를 잊지 못한다고 해. 다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하루에 한번 서점엘 들르지 않으면 뭔가 텅빈 것같다고 했다. 그때 김주영 선생이 월간문학에 등단하고서 한창 글 쓰던 치열한 시절이어서 아쉬움이 더했을거야. 권정생 선생도, 지례예술촌 촌장 김원길 선생도 단골이었다. 10여년 나이가 어린 날 데리고 황석영, 조해일과 이문구 작가가 서울에서 내려오면 꼭 날 끼워서 술 사주시던 고향 선배님이시고 이제는 문단의 원로가 된 분들을 어찌 잊을까. 미당과 목월선생님도 날 아주 귀여워 해 주셨는데. 그때 문학지에 추천해 주신다할 때 문단에 등단해볼걸. 농입니다 그려. 내가 무슨 글을 쓴단 말입니까. 그냥 작가들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한 젊은이에 불과했는데. 내 고향을 일러 추로지향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공자님 고향과 마찬가지로 글을 숭상하는 곳이라고. 그만큼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던 곳이 내 고향이었어. 이렇게 묵향이 그윽한 곳에 태어난 넌 뭐냐, 아주 별종이구나.
아 내가 근무한 서점을 중심으로 고향의 예술 쪽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자연스레 미술가 협회와 문인들, 전통문화를 복원하자는 운동이 태동했다. 그러면서 각종 단체가 문화회관에 사무실을 가지게 된다. 문화회관은 가톨릭 안동교구 소유 극장과 레스토랑 찻집이 있어 문화사랑방 역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각 문화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단체가 생기면서 간사로 불초 서점 점원이 맡게 되었다. 그 결실이 하회탈춤을 태동하게 되었다. 하회탈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를 기리는 성공작이 아닌가?
언젠가 신문, 70년대 신춘문예 평론 부문이었어. 조선시대 문과 과거 급제자 숫자가 한양이 으뜸이었고 이북의 정주가 두 번째라했어. 하지만 이북에서, 이괄의 난과 이시애의 난과 같이 반란이 자주 나자 과거 급제는 시켜주고 진사 위로 벼슬길은 막았다고 해. 그 다음이 우리 고향 안동이야. 성씨 별로, 전주 이씨가 제일 많았다면 그 다음이 안동 권씨고 그 다음은 안동 김씨라했어. 영남학파, 퇴계의 학맥이 조선 시대의 큰 흐름이었지만 숙종 이후 남인이 축출 당하면서 영남학파는 산림에 은거한 재야 선비로 벼슬 구경도 못했다. 대신 기호학파가 득세를 했지. 학문으로는 영남학파, 지역으로는 경상도가 지역 차별을 서럽게 당했다. 요즈음은 호남이 차별을 심하게 받는다고 하지만 옛날에는 그 반대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서점 점원, 책방 점원도 큰 벼슬이라고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야단치면 어떡하지. 내 출세기가 아니고 그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벗님들의 추억도 더듬어 보시라고 어렵게 이야길 꺼냈습니다. 내 치부까지....... 일별하시고 음음..커피라도 마시면서 우리 옛날로 돌아가봐요. 서점이 보통 점방하고는 뭔가 다르잖아요.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낸 추억의 한자락에는 책방이 있었던 게 아니던가요? 그놈 책방 점원이라 주워 들은 게 많아서 탈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