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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壬午軍亂/1882년)
The Im-O Military Revolt (in 1882. Korea)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신식무기로 조직된 별기군(別技軍)이 광화문 앞에서 훈련을 받는 모습.
5군영에서 뽑은 80명의 건장한 남성들로 창군된 별기군은 일본 교관들에 의해 훈련을 받았는데
구식군대는 별기군을 倭별기라 부르며 무시하곤 했다. 대우가 좋은 신식군대가 달갑지 않았던
구식군대는 아무래도 척화적, 수구적 색깔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수도방위 임무를 맡았던
구식군대의 명칭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이다.
조선 제25대 왕 철종(1831~1863)의 단명 이후 12살에 새 왕으로 등극한 고종(1852~1919)이 어리다는 이유로 장기간 대리청정을 누리던 고종의 친부 흥선대원군이 이제는 왕에게 실권을 내주어야 할 때라는 최익현의 상소와 조정대신들의 압력으로 대리청정 10년만인 1873년에 물러나자 그 자리를 왕후 민씨와 민씨 일가가 차지하게 됩니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척화(외국문물을 거부하는 수구파) 대 개화(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혁신파)라는 극한 정치적 대척점에 서서 서로를 증오하던 며느리 명성왕후 민씨와 그 일가의 세도정치에 백성들의 피로감은 높아만 갔죠.
흥선대원군이 탄핵으로 물러나고 고종이 권력의 전면에 나선지 10년이 지나지 않은 이즈음 조선의 중앙정부는 창칼을 든 구식군대 아닌 총검으로 무장한 신식군대를 양성하고자 일본 군사전문교관들의 힘을 빌어 별기군을 창설해 일본식 군사훈련을 시키는 동시에 군제개편으로 전통군대인 5군영의 3곳을 폐쇄하자 폐쇄군영에 속했던 병사들은 모두 해고되었고, 그나마 받아야할 봉급은 1년이 넘도록 지연되었습니다.
게다가 신식 별기군을 우대하고 전통군대를 홀대하는 차별이 심해지면서 구식군대의 불만이 절정을 이루던 1882년 임오년 6월, 무위영 소속 군인들에게 13개월 만에 봉급이 쌀로, 그것도 한 달 치만 지급되었으나 군 예산을 관리하던 선혜청 관리들의 부패 때문에 겨와 모래가 뒤섞인 불량미가 지급되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구식군대는 무장을 하고 별기군을 양성하는 일본관리 및 개화파 공격에 나섰으니, 1882년 임오년에 발생한 군부의 난이라고 해서 임오군란(壬午軍亂)입니다. 임오군란은 이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과 청,일의 주도권 투쟁에 이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빨려드는 원인을 제공하죠.
척화비(斥和碑/화의를 배척하는 비석)는 흥선대원군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배격하고 쇄국을 강화하기 위한 굳은 결의를 나타내 백성들에게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신미양요 직후인 1871년 4월에 서울과 전국의 200여 곳에 세운 화강암 비석이다. 양이침범비전측 화주화매국 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즉 서양 오랑케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丙寅年)에 짓고 신미년(辛未年)에 세우다. 라고 적혀 있다. 척화비는 1882년(고종19)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고 조선이 여러 나라와 통교하게 되자 일본 공사의 요구에 의해 모두 철거되었다.
병사들은 선혜청 도봉소로 몰려가 항의했으나 관리들이 개 무시로 일관하자 그들에게 돌팔매를 던지고 끌어내 몰매를 가하는 등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선혜청 당상이자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의 체포령에 주동자 몇 사람이 체포되고 (도봉소 사건), 모진 고문을 받던 이들이 곧 반란죄로 처형될 거라는 소문이 돌자 폭력사태에 가담했던 병사들은 크게 동요합니다.
병사들은 대표를 뽑고 체포된 이들에 대한 구명문을 작성해 윗선에 호소했으나 만족한 반응을 얻지 못하자 책임자 석방을 위해 민겸호 대감의 집을 찾아갔고, 부재중이라 허탕을 친 병사들은 절망감에 그의 집 가재도구를 모조리 박살내는 등 빠르게 이성을 잃어갔습니다. 그 길로 운현궁으로 달려간 이들은 와신상담중인 흥선대원군을 만나 연체된 봉급의 지급을 약속받은 후 별도의 지시를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철수합니다.
급작스런 군란사건을 보고받은 고종은 생활이 어려운 병사들이 1년이 넘도록 어떻게 참았느냐며 잘 선처할 것을 지시했으나 명령과 복종체계를 허무는 군란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는 민겸호의 강경책으로 인해 일은 점차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들은 조직적인 행동에 나서 사병들의 봉급을 빼돌린 부정축제자들을 찾아가 살해하거나 조선에 들어와 별기군을 양성하는 일본군 관리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습격, 당황한 별기군을 제압한 다음 미처 도피하지 못한 군사교관 및 민간인 등 13명의 일본인을 죽이고 공사관을 불태웁니다.
변방의 왕족에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힘으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은 아버지의 그늘을 스스로 걷어내기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군부 쿠데타라는 혼란의 와중에 정국을 조기에 수습하고자 고종은 아버지에게 전권을 위임해 속히 군란을 평정하고 안정을 회복하도록 했습니다. 며느리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뒷방 신세로 밀려나 날마다 화병을 삭이던 흥선대원군의 입가에는 잃었던 정권의 재장악 찬스라는 악마의 미소가 흘렀겠지요?
명성왕후로 추정되는 몇 장의 자료사진들. 명성왕후 민씨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늘 불안했기에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경계해 일체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임오군란 당시 궁녀로 변장해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기에 그 이후로는 더욱 사진기는 물론 초상화 조차 멀리했다. 때문에 왕후의 사진은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명성왕후는 외교의 귀재로 불릴만큼 조선의 개화를 위해 강대국에 줄을 대는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로 눈을 돌렸으나 조선에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를 원치 않는 일본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척화파였던 구식군대 병사들은 흥선대원군의 의도에 따라 이 참에 개화파의 수장인 왕후 민씨를 없애고 척화파 흥선대원군을 옹립하려는 의도로 궁궐로 진입했으나 미리 정보를 입수한 민씨왕후는 궁녀로 변장해 궁궐을 탈출한 뒤였습니다.
10년만에 다시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흥선대원군은 고종에게 군란을 두둔하는 보고서를 올리는 한편, 별기군 전격 해체, 해산된 부대의 부활과 밀린 봉급 전액 지급, 군란 관련자 전원 사면, 전국 중요 요직 척화파로 물갈이 등의 조치로 성난 군심을 달랬으나 일부 병사들이 계속 개화파의 수장격인 민씨왕후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자 흥선대원군은 왕후가 이미 죽었다며 국모상(國母喪)을 선포, 군대의 동요를 잠재우고 민씨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일단 성공합니다.
충주에 은신해 있으면서 최측근이자 오빠인 민겸호와 김보현 등의 개화파 핵심 관료들이 궁궐 안 대원군의 면전에서 척화파로부터 난도질을 당해 죽은 시체가 개울가에 버려져 썩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왕후 민씨는 급거 청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 23살 나이의 군벌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의 조선 파병부대가 궁궐로 진입해 조선군을 장악, 무력을 과시한 후 위험인물인 흥선대원군을 잔치에 초대한 자리에서 생포, 보호라는 미명하에 톈진으로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죠. 갑자기 주군을 잃은 조선군은 수도방위부대인 훈련도감 군영으로 들이닥친 청국 군대에게 100여 명이 연행되어 그중 임모군란 주동자 14명이 청에 의해 처형됩니다.
흥선대원군과 명나라 최대의 군벌 위안스카이. 청나라 고문으로 있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은
그를 가르켜 "1898년엔 황제를 배신했고 1911년엔 제국을 배신했으며 1916년엔 공화국을 배신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라고 혹평했다. 그는 청 멸망 후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으나
배신의 역사로 점철된 그를 중화제국 황제로 인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중화민국의 권력을 장악했던 군벌 위안스카이는 1915년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중국 전역의
극심한 반발로 1916년 3월 황제 제도를 취소했으며 얼마 후 사망했다.
침략 야욕을 숨긴 채 조선정국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주둔군의 왕실 무시와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중국화폐로 조선의 경제시장을 교란시켜 회복이 어려운 중환자로 만든 것은 물론 나중에 중국 신해혁명과 삼민주의에 이은 서태후의 실각으로 공화제 바람이 휩쓰는 와중에서도 중국 황제자리까지 노리게 되는 위안스카이의 조선왕실 무시와 조선처녀 농락은 차마 글로 적기 어려울 정도의 굴욕감마저 느낍니다.
임오군란을 피해 충주로 피신했던 명성왕후가 환궁해 흥선대원군에 의해 쫓겨난 인사들을 차례로 복직시켰지만 영사관 학살사건에 분노한 일본정부는 자국민과 상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해 협박하며 과한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외세에 눌린 고종은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임오군란 때 일본인 사상자 및 공사관 등 일본 재산에 대한 손해배상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입니다.
조선에게는 엄청나게 불리하게 작성된 제물포조약 이후 조선 반도는 청일 양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전락했습니다. 조선에는 이때 청,일 양국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갑신정변, 청일전쟁, 갑오농민전쟁의 대세를 가르는 변수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잠시 척화파의 희망으로 재등판한 흥선대원군의 몰락은 다시 척화파의 약세와 개화파의 득세로 전환되면서 개화파 가운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은 전제군주제와 유교적 입장에서 동도서기론이란 온건개혁을 추진하였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정치사회 제도를 개혁하고 기독교까지 수용하는 입헌군주제라는 급진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완용(李完用)은 한말(韓末) '을사5적신'의 한 사람이다. 을사5적신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서명한 다섯 명의 대신들을 일컫는데 '을사오적'으로도 거론된다. 이들은 학부대신 이완용을 필두로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이중 이완용은 일본에 우리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했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까지 된 때문이다. 헤이그 특사 사건 후엔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물러날 것을 강요했고 총리대신의 자격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환궁한 명성왕후는 군란진압을 축하하는 뜻에서 과거시험을 열었는데, 여기에서 급제를 한 이완용, 서재필 등의 개화파들이 속속 정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임오군란은 조선에서 청나라와의 힘겨루기에서 잠시 밀린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청을 완전히 몰아내고 조선을 독식하게 만드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합니다.
나중에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은 3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의 경술국치(한일 병합 조약 韓日倂合條約 1910년/순종황제 4년)에 서명. 순종퇴위 및 조선멸망을 불러옴으로써 내부대신 송병준과 함께 나라를 일본에 넘긴 조선 최악의 매국노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첫댓글 근대조선으로 이야기해야 옳은지?
현대조선이 맞는지? 영 헷갈리지만
철종이후의 조선과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역사는 알 수 있는 역사일진데?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역사라 참으로 답답합니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역사학자나 석학들이 비겁하다 라고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역사적사실을 올려 주시니 또 하나의 편린 주워갑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역사학계의 구분을 떠난 개인적인 견해로는 근대와 현대의 분기점은 해방이 아닌가 합니다.
근대 왕정이 해체되고 현대 공화제가 개막된 시기니까요. 현대조선은 울산에 있습니다.ㅋㅋㅋ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일제의 횡포로 역사왜곡은 물론 중요한 조선사 사료들이 사라지고
민족사 연구자들도 이래저래 변변치 않은 탓이 아닌가 합니다.
누구나 알기 쉽게 중학생 수준으로 적었는데 역사수준이 높으신 소소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치욕의 역사도 교훈삼아 단디 들여다 봐야하는데 왕짜증이 울컥거리니 ㅎㅎ
저는 정말 짜증나는 인간들이 뉴라이트라고 하는 정체도 모호한 집단입니다.
식민지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가 빨라졌다는 주장도 하던데 그밖에도 주장하는 일본 찬양가는
낯 뜨거울 정도죠. 물론 객관적 사관은 중요하지만 주관적 찬양은 납득이 어렵습니다.
능참봉님이 그 시대를 사셨다면 이완용과 데라우치의 을사늑약 서명 현장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저 세상으로 함께 보냈을 듯 합니다.
눼? 핵폭탄으로? @@; 역시 독립훈장감입니다.ㅎ
시아버지와 며느리싸움에 득을 본 일본은 지금도 변함없는것 같아요 내실을 다졌어야했는데
군사정변이 망국을 초래하는 임오군란으로 갔으니 이 방대한 자료를 준비해서 올려주심에
수고많으셨습니다
역사자료를 쓰면서 저도 배우는 게 많으니 오히려 큰 공부가 되어 시간은 걸리지만 보람이 있군요.
저는 어디서 퍼 온 자료를 그대로 올리지 않는 편이지만 퍼 와도 최대한 편집을 합니다.
이유는 누구나 읽어도 이해하기 쉬운 편안한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서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정치노선이 왜 서로를 원한관계로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도 그래서인 듯 합니다.
앞으로도 회원님들과 함께 역사방을 풍요롭게 꾸며갔으면 좋겠군요. 말씀 고맙습니다.^^
파란만장한 과거만 생각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답답 분통울화 슬픔 치밀어 오릅니다
기도하는마음으로 우리나라의 미래가 통일평화발전 부강한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고저 내가 힘이 있어야 된다고
이연사 소리높혀 외칩니다
아이고 가슴이야 서로서로 아껴가서 살자구요
빨간표시 있는거 댓글달다보니 어쿠 18년 정월달 야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