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關係)가 끝났을 때
유태용
사람이 살아 가는 데엔 여러 갈래로 얽혀있다. 태어나서는 부모 자식 관계로 얽히고 성장하면서 친구 관계가 형성되며, 사회에 진출해서는 선후배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어우러져 살아간다. 그중에는 좋은 인연으로 맺은 관계도 있을 것이며 마지못해 이어가는 나쁜 관계도 있을 것이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는 복잡하고도 미묘하여 여차하면 깨어지기 쉬운 유리병 같아 조심스럽게(Be Careful)다뤄야 한다. 상처 입은 마음은 깨진 유리처럼 옆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사람 관계는 사람의 마음이 서로 연결될 때 형성된다. 그래서 모든 관계는 특별 보호 관리 될 때만 지속하므로, 관계를 계속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일방의 노력이 아닌 쌍방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좋은 관계는 좋은 것들이 투자되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는 “부모 팔아 친구 산다.”라고 말하며 내가 학교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프랑스 소설 ‘삼총사’를 본떠 마음 맞는 친구 세 명이 똘똘 뭉쳐 다녀서 다른 친구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면서 삼총사라고 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세 명이 같이 나서니 학교에서 그 누구도 우리 세 명에게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중학교는 서로가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자주 만나지는 못했으나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같이 만나 각각의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초등학교 때의 우정을 이어 나갔다. 중학교에 가서도 나의 친구 만들기는 계속되었다. 시내 출신도 있었고, 시골 출신도 있었다. 숫자도 늘었다. 세 명에서 일곱 명으로 늘어난 친구들은 가정 형편이 서로 비슷하여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정해진 차례로 친구 집으로 향한다. 물론 저녁은 친구 어머니가 해준다. 친구들을 자식처럼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친구가 고등학교에서도 같이 만났다. 동계 진학했기 때문이다.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서 자주 만날 수는 없었으나 통합 수업 때는 만나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곤 했다. 사귀고 있는 여학생을 통해 미팅도 주선하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엔 공부를 핑계로 서로 만나 빵집도 가고 공원에도 놀러 가곤 했다. 이런 사실을 부모님에게는 서로가 비밀로 하기로 하고 만약 비밀을 누설 시엔 친구 명단에서 제외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친구 관계는 빈틈이 없이 꿋꿋하게 이어졌다.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우리들의 우정과 의리는 영원할 것으로 믿었다.
적성을 고르다 보니 친구들과 달리 부산에 있는 대학으로 가게 됐다. 전국 각지에서 온 친구들 성향을 파악하기 어려워 우선 지역 정서가 비슷한 경상도 출신들을 대상으로 일곱 명을 뽑았다. 물론 내가 앞장섰다. 전체 학과를 이끌어 가는 게 우리 일곱 명이었다. 모임 명칭도 ‘칠 인회’로 했다. 다른 학교와 모임을 한다든지 학과 전체로 야유회를 갈 때도 우리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막강했던 칠 인회도 그 힘이 서서히 떨어졌다. 사회 진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병으로 군 복무를 먼저 마치고 복학하는 친구, 학군단에 입단하여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장교로 제대하여 졸업해 입학 동기 보다 몇 년 빠르게 사회에 발을 딛는 친구 등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그래도 관계는 꾸준히 이어져 갔다. 먼저 사회로 진출하여 직장을 가진 친구들이 월급날애는 학교에 님이 있는 친구들에게 막걸리 파티를 열어 주곤 했다.
시골에서 텃밭 생활을 이년 정도 하다가 대구로 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십여 년 만이다.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 만날 수가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다. 매년 한두 번 열리는 동기회 모임에서 서로 알게 된 친구다. 친한 친구는 가까이 없고 새로운 사람을 새로 사귀는 것보다는 서로를 이해 하는 게 빠르지 않겠나 생각했다. 어느 날 문과 같은 반이었던 K군 한테서 전화가 왔다. 반가웠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이다. 점심 약속을 하고 식당에서 만나 밥을 같이 먹고 헤어졌다. 그 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만나며 밥을 먹으면서 학창 시절 이야기며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관계를 이어 갔다.
새로 문을 연 식당이 있어 친구에게 전화했다. 친구는 다른 곳에서 밥을 먹으려는 순간 내 전화를 받은 것이다. 우리 집까지 와서 나를 태우고 식당으로 갔다. 식당도 처음 생기고 우리도 처음 간 집이라 안내하고 계산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밥을 먹은 후 내가 계산을 하고 친구 집 근처에 있는 복지관에서 차를 한 잔 마셨다. 일반 카페보다 값이 저렴했다. 시니어를 위한 복지 차원이라고 했다.
보름 정도 지난 어느 날 저녁 무렵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디. 뜬금없이 친구가 하는 말이 “내가 너한테서 밥 얻어먹는 사람이냐.”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친구한테 재차 물었다. 네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친구가 말을 잇는다. 친구가 밥을 살 때도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너도 사고 나도 사고 했지. 누가 많이 사고 적게 사는 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네가 무언가 오해를 하는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일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화를 끊은 뒤 며칠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이나 사회생활 할 때도 이런 식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데. 늘그막에 남도 아닌 학교 동기로부터 이런 말을 듣다니. 전화를 걸어 누가 무슨 말을 했으며 어떤 행동을 서로에게 했는지 따지고 싶었다.
사람 때문에 아파하지 않기로 했다. 모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 마음을 도려내고 애쓸 필요가 없다. 몇 사람은 흘려보내고 또 몇 사람은 주워 담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곳곳에 숨어 있는 인간 괴물은 씩씩하게 무시하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돌려주며 사는 것만도 바쁜 인생이다. 결국에는 모두 지나간다. 어떤 기쁨은 내 생각보다 빨리 떠나갔고 어떤 슬픔은 더 오래 머물렀지만 기쁨도 슬픔도 결국에는 모두 지나갔다. 변해버린 사람 탓하지 않고 떠나버린 사람 붙잡지 말고 살아가려 한다. 의도적으로 멀리하지 않아도 스치고 떠날 사람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고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아도 내 옆에 남을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