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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우체국으로 보내는 편지
최도선
오늘은 나붓나붓 눈이 온다고 편지를 쓰리
멧새가 쫑쫑 언 땅을 쪼다갔노라고 쓰리
꽁꽁 언 논 위에서 썰매를 지치는 아이들이 있다고도 쓰리라
붉은 동백꽃은 산호색보다 더 예쁘다고도 써서
남태평양 바누아투 섬 가까운 산호해에 있는 수중 우체국으로
앵두 빛 글자 또박또박 적어 보내리
시베리아에서 살다 온
순천만 흑두루미가 잠시 다녀가도 좋겠냐고 묻고 오라고
물의 독서
최정연
물 아래 달을 봐라
콸콸한 문장이네
몇 개의 모음들이 괄호 밖에 흘러넘쳐
지금은 은어가 오는 시간,
달빛공지 띄우라네
산란하는 조약돌도 물 소리 헤이는 밤
오십천 수면 아래
무슨 등불 켜두어서
뜨거운 이마 짚으며
다상량의 달을 보나
수심 찬 질문들이 부서지고 또 고여서
물결 책 갈피마다
각주로 박혀있네
내 몸도 출렁, 불려나와
행간의 밑줄 될까
폐가에 내리는 비
홍진기
앵두꽃 속눈썹이 가는 비에 다 젖는다
기울어진 살강다리
거미줄에 걸려있고
마당가
웃자란 잡초
떼를 지어 몰려온다
주인을 기다리다 수삼 년을 그냥 보낸
대문 밖 물감나무
죽지뼈가 접치는데
봄비는
해마다 와서
살을 섞고 돌아간다
무 싹을 바라보는 견해들
고은희
잘라놓은 반 토막 무에서 싹이 돋아 나왔다.
할머니는 처녀 적 사립문 같다고 하고 아버지는 막 빠져나오는 송아지 같다고 하고 나는,
혁명 같다고 했다.
연속 재배하면 벌레 먹고 풀이 날개를 치면 한없이 나약해져버리는 무. 두더지가 지나간 자리를 싹둑 잘라두었던 것인데, 잘린 쪽은 이미 구름으로 덥혀져 있다. 구름의 본성은 땅으로 스며들고 스며든 본성이 하늘을 닮아간다는 것. 부채 살 같이 퍼진 무의 속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는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이 함께 들어 있는 채소라서 무를 여러 번 말하면 맵고 지린 맛이 난다.
구름에서 속 씨가 웅크리고 있다. 모든 싹은 처음에는 속잎이었다가 속잎이 겉잎이 되는 동안 사립문이 헐리고 철 대문이 달리고 송아지는 개의 값을 뒤집어쓰고 음매음매 컹컹 짖는다. 그 사이,
혁명은 손가락질 받았다.
무청은 줄줄이 엮여 내걸리고 반 토막 무만 남아 필사적으로 싹을 틔우고 있다. 철 대문에서 싹이 자라고 싹이 노란 송아지가 컹컹 짖는다. 한 개의 무를 할머니는 구름 쪽을 먼저 썰고 나는 파란 하늘 쪽을 먼저 썰자고 한다.
매운 입술이 내미는 혁명의 싹,
반쪽 남은 무를 보고도 분분한 의견이 한 집에서 산다.
달과 목련과 거미의 가계
김미나
달 거미 한 마리 지붕을 밟고 목련나무로 걸어와요
거미의 집을 허무는 게 아니에요
물덩이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솜 트는 기계 멈춰있는 집 앞의 목련나무
꽃송이 안으로부터 달이 솜털을 짜기 시작했나봐요
자동차 바퀴에 찍힌 고양이 울음소리도 되살아나요
솜이불을 짜는 소리 할머니의 귓바퀴에 감겨요
나는 벼락처럼 자라난 목련나무의 꽃과
달의 이빨들이 하나의 틀을 이루는 소리를 생각했어요
먹구름을 집어 삼킨 듯 검게 물드는 것들은
솜틀집 앞 배수구에 걸려있나 봐요
그늘 쪽에 얼어있는 지난 봄눈 덩어리들이
아지랑이 피워 올려요 아직 꽃샘추위는 발끝을
야금야금 베어 물고 있었죠
그러니까 목련들도 밤의 이불을 덮고 싶어
나뭇가지 침대에 꼭 맞는 그믐이 올 때까지
할머니의 꽃상여를 짜듯
깊은 어둠을 지우려고 달의 이불을 짜고 있나봐요
봄눈 녹자 귀신도 볼 수 있다는 물웅덩이엔
달과 목련과 거미가 한 가계에서 태어났다는
소문이 고여 있었어요 이불 한 채 그려진 목련나무,
노란 나비들이 먼저 날아와서 날개를 풀고 있었어요
김미나
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양을 찾아서
구녹원
마침내 양은 사라졌다
한 의식을 잃고서 나는 은주발에 담긴 눈*이 되고 싶었다
갈피가 다 바랜 경전 속에 없던 신이
밑창 닳아 낮아진 가죽신 아래에서 흘렀다
눈 내리는 게르 뒤란에서 그 의식은 치루어졌지
양 한 마리는 선택되었고
모든 자연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무죄한 저 걸음걸이
죽음으로 걸어갈 때 누구라도 하늘을 보고 땅을 볼 것이다
단도가 양의 숨길을 통과하는 직전 그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워지고
목자牧者는 숨 털 한 올을 뽑아 속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한다
산 자에게 건너간 울음소리, 가슴에서 질척이고
가장 조용히 자기를 버려 안식을 얻는 양의 침묵을 본다
양떼구름이 언덕으로 무리 지어 지나갈 때
두루마리 편지처럼 자꾸 도사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초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펼친다
만나고 싶은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침상 캐시미어에 머리를 파묻고 싶었다
천년을 흐르는 구름도 있었다
양은 어디에 있을까
*벽암록 제 13 칙 파릉(巴陵)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 차용.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고
나혜경
스발바르, 하면 밥 냄새가 난다
죽어도 죽지 않는 지구의 목숨 있다면 첫밥은 그곳에서 짓겠지
얼음이 있던 자리에 쌀을 안치고 불을 지피고 뜸을 들이고
무너진 세계는 밥심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북극해 스발바르섬 암반 속에 모신 씨앗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 가여운 것들은 최후의 보루가 되어 최면에 걸린 듯
긴 잠에 들었다 처음도 끝도 아닌 아찔한 높이를 견디고 있다
뜨거운 밥보다 더 뜨거운, 찬밥 있다
손대지 말아야 할 밥이 먼 곳에 있으니
멸망을 염려하지 말라
오래된 가뭄에서 꺼내 듣는 빗방울 소리처럼
세상은 뒷주머니에 꼬깃꼬깃, 뛰는 심장 하나 접어 넣고 있다
그 날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
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
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
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
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
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시작법(詩作法)
천양희
구름과 비는 짧은 바람에서 생겨나고
긴 강은 얕은 물에서 시작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모든 시작詩作의 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 걸 알게 된다
내면에서 신비롭게 걸어나온 말맛들! 말의 맛으로
쓸 수 없는 것을 위해 쓴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혼자 걸을 때 발걸음이
더 확실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이미 쓴 것들은 써봐야 소용없고
이미 잘못 쓴 문장들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
무슨 작법으로 자연을 받아 쓰고
무슨 독법으로 사람을 받아 읽기나 할까
모든 살아 있는 시의 비결은 시작에 있다고?
시작의 비결은 어떤 복잡한 문장이라도
짧은 줄로 나누어 첫 줄부터 시작하는 데 있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작할 수는 있지
그러나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선 안 되는 것이지
경외감을 가지란 말은 아니지만
진지해져야 한다는 말 놓치면 안 되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의자의 위치만 바꿔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볼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없는 것일까
시는 시인의 땅에서 바람을 향기롭게 하고
시인은 오직 시를 위해서만 몸을 굽힐 수는 없는 걸까
얼마나 쓰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들
현실을 받아 쓰는 서기書記가 되기 위해
쓰지 않는 것이 쓰는 것보다 더 중노동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중요한 건 스스로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일생 동안 시쓰기란 나에게는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삶을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었다
그래서 의연하게 고독을 살아내면서 나아가지만
시는 달리는 이들에게 멈추기를 요구하네
빠름보다는 느림을 준비하네 그러므로 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것이네
그게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
이 세상에 눈물 가득한 예지는 이것뿐이네
고독이 고래처럼 너를 삼켜버릴 때
너의 경멸과 너의 동경이 함께 성장할 때
시를 향해 조금 웃게 될 때
그때 시인이 되는 것이지
결국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오래 남는 눈
강영은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알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묏새
하재범
불면의 새벽
묏새 소리 고드름처럼 아리다
옥녀봉 끝자락
섬이었던 집
달의 유혹에 집나간 아버지
그믐녘 어둠에 묻혀왔다
다시 떠나고 나면
더욱 외로워지는 섬
어머니의 뜰에 내려온 묏새
훠이 훠이
어머니 한숨소리
한 줌의 좁쌀로 쪼고 있다
아파트 베란다 마른
담쟁이로 바스락거리는 어머니
-내 죽거던 재콩 만들어 건너 산에 뿌려다오
바람처럼 흩어진 내 어머니를 삼킨 묏새
무명 돛을 달고
섬을 찾아 산에서 내려오는가 보다
베란다 건너
동살과 함께 고물에 올랐다
머-언 먼
치자꽃 향기
저녁의 황사
정양효
이 모래 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안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턴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한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질경이의 꿈
임 경 묵
질경이도 꽃을 피우냐고요
바람이 구름을 딛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백산 정상에서
꽃 안 피우고 살아남는 게 어디 있나요
노루오줌도 찰랑찰랑 지린 꽃을 피우고
심지어 개불알꽃까지 질세라 덜렁덜렁
망태를 흔드는데요 사실 말이지
그렇게 아웅대며 서둘 필요는 없거든요
밟힐 때마다 새파랗게 살아남아
가끔 뿌리까지 헹궈주는 바람을 끼고
소백산 허리에 닥지닥지 달라붙은
저를 보신 적이 있잖아요
실직한 당신의 낡은 등산화 밑에서도
이렇게 구겨진 날을 밀어 올리잖아요
혹시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온 길이 후회되세요
흔적도 없이 지워드릴 수도 있거든요
가파른 오르막길이 팍팍하고 힘들면
부담없이 제 발목쟁이를 또옥 따서
풀싸움이나 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세요
길 잃어 막막한 당신이 뿌리 채 뽑아서
하늘 높이 제기차기를 해도 그만이구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가진 그늘은
씨방처럼 부푼 땀방울들을 말리기엔
너무 키가 작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발목쟁이를 드린다는 거예요
대신에 당신의 캄캄한 어깨를 껴안고
하산하던 씨앗 한 톨이
고개 묻고 돌아가는 당신의 뒤안길 혹은
보도블록 틈에 질긴 뿌리를 부리고 서서
언젠가 당신의 지친 발목쟁이에
입 맞출 수 있다면
저는 밟혀도 정말이지 괜찮거든요
이젠 당신도 다시 한 번
울먹이는 희망을 돌볼 시간이잖아요
<제8회 수주문학상대상작>
횡계리(橫溪里)
김인자
계엄군처럼 마을을 점령하는 개코원숭이를 본 적 있는가
툭하면 횡계리에 출몰하는 안개가 그러하다
언제 초록으로 푸르렀던가 찬란한 햇살이었던가
지워진 길 위로 비상등을 켜고 유령처럼 흘러다니는 자동차들
전속력으로 질주했으나 닿을 수 없는 허황함이 허공을 가른다
안개의 입자가 집과 사람을 후루룩 마신다
흰 복면을 한 자작나무도 환한 어둠에 묻히고
산그림자 젖은 제 무릎을 덮을 때
얼룩만한 진실도 없다는 듯
인간의 길에 새 한 마리 납작 깔려있다
홀연히 오는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화라 했던가
바람의 조사가 끝나자 일제히 시작되는 안개의 조문
선자령 고원에 구금되어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않던
할미꽃들도 조문 행렬에 합류한다
그윽하여라 가슴마다 봉우리마다 하얀 무덤들
당혹스럽다 가혹하리만치 저 냉정한 흑백
아무도 덮을 수 없는 것을 안개 덮고 묻는다
생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처럼 대관령 옛길을 내려간다
계절이 바뀌면 비로소 고립무원 설국(雪國)을 건설한 것이
안개였음을 알게 되리라
상처가 깊을 수록 영혼은 펄럭이게 마련
타올라보지 못한 자는 끝내 그것이 왜 불안인지 알지 못하리
안개에 취해 그리운 이름 부르며 대관령 넘을 때
칙칙한 그늘이라도 언제든 오겠다는 헛명세 말고
다시는 올 수 없다는 인사도 연습해 두어야 하리
이곳은 안개와 바람과 눈(雪)의 주민이 거주하는 횡계리
대관령 면사무소 지나 밀린 엽서를 우체통에 넣고
하나로 마트에서 하루치 생을 봉지에 담는다
문 밖에는 여전히 내 슬픔 쓰다듬어줄 촉촉한 안개
유빙(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 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배추값이 오를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에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모르겠다.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 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비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데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에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어 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햇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에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2011년 경행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와디
박명보
사막은 수천의 쪼개진 기억을 갖고 있다
한 번의 범람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은,
말라버린 사막의 강
깊게 패인 바닥이 누워있다
흔적이란 누군가 머물렀던 자리
수식 없이 정면으로 걸어간 바람의 족적이다
상처가 저희끼리 부딪고 쓸리는 소리
모래가 우는 산*을 오른다
바람이 한 획을 그을 때마다
비명은 커진다
눈을 감고 걷는 길
느린 걸음 걸음
지금 여기 속하지 않은 당신도
애초부터 이별 쪽으로 방향을 둔건 아니었으리라
지난 문장을 만지며
발자국 옮길 때 마다
點字 흩어지듯 모래는 무너진다
아무 일 아니듯
다시 제 구덩이를 덮는 모래
돌아보니 걸어온 길 고르지 않다
그렇듯 가벼운 형식에도 무거움이,
보이지 않는 비틀거림이 들어 있다는 것, 명백하게
흰 달이 무너진 사원 위로 떠오른다
아무 일 아니듯
독신의 생을 모래위에 눕힌다
*모래가 우는 산 - 중국의 명사鳴砂산,
개인 날에 모래소리가 관현악기의 소리같이 들린다 하여 鳴(소리낼 명), 沙(모래 사) 를 따서 명사산이라 함.
모호한 가방
황혜경
지구본을 옆구리에 끼고 수선집에 가던 길에서
명랑한 만세를 외치던 내 친구 붉은 치마를 만났다
수심 없는 얼굴에는 가든에 가둔 가득처럼
종(種)이 다른 꽃들 화려하게 피어났다
붉은 치마의 서랍 안으로 착지하는 새들과 정지하는 말들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가방을 만들어 준다고 했을 때
떠오르던 실내
뒤집어도 볕이 들지 않던 실내
안을 떠올린 건 그날뿐만은 아니었다
헌책방 구석에 앉아 누군가 그어놓은 븕은 밑줄을 읽다가
애인여기(愛人如己)를 발음할 때도
서랍 안의 얼굴들 서로서로 겹쳐보였다
남을 내 몸같이 깊이 사랑한 적 있었나
쌍둥이 자리는 질투를 배제하는 별자리라는 걸
비서 아가씨 k가 내 좁은 서랍을 뒤져 읽어주던 그날 오후
눈을 돌려 바라본 밖의 문양들은
뒤늦게 누가 누구를 감싸주는 형태였고
수선집 아줌마는 바지의 앞면과 뒷면을 잘라내고 붙여
겉과 겉을 맞대거나 속과 속을 이어 붙여
바지의 겉과 속으로
가방의 안과 밖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을 시작하고
나는 그 곁에서 외부와 내부에 대해 생각한다
외부에 의해 내부가 내부에 의해 외부가 결정되는 일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생일에 출생할 나는 방 안에서
부고(訃告)란을 맡아 쓰는 아저씨와 밤새 안과 밖의
사람의 붉은 부위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또, 잘린 케이크와 시든 꽃 사이로 핏물인지 꽃물인지
얼룩진 치마를 입고 한 아이가 뛰어 들어오다가 밖으로 사라질 것이고
바지의 외부의 바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바지에 의해
가방이 완성될 때까지
나는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를 반복하다가
어려운 가방에 무심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지구본을 슬쩍 넣어본다
무엇이 무엇을 감싸고 무엇이 무엇을 담는지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주위가 깜깜해지고 곧 밝아오기도 하니까
상호적인 것들은 모호하기도 하니까
안과 밖의 배후를 갖게 된 가방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만들어준 모호한 가방을
나는 하나 갖게 되었다
게더링 드럼(gathering drum)
게더링 드럼을 주문하고 혼자 받는 것은 오류였다
모임이나 집회, 채집이 생각나 둘이 아닌 것이 떠올랐으니까
설명서에는 '여럿이 함께 연주할 수 있는 타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럿이 두드리며 강약 조절하기
속도를 다르게 두드리기
도구를 이용해서 두드리기
혼자의 손바닥은 두 개
의식과 관련된 인디언 놀이를 함께 하라 하시면 아마존으로 가겠어요 차라리 여인 부족을 따라 치난니 버섯*을 따러 가겠어요 탐스러운 육체를 탐하자, 라고 말하는 사람은
수려한 수렵風을 모르는 사람이지요 우물우물 맞은 편에 앉아 먹고 있는 입이 노려보고 있다면 지나서 나무를 섬긴다는 야루보족의 숲 속으로 '통과하다'라고 말하는 순
간 나는 강줄기의 아랫부분 과거가 됩니다
나는 그때 말하는 북을 말하고 있었어요
통과하는 중이었어요
어떤 날은 여러 장소에서
레인 스틱으로 비를 부르는 연주를 하기도 했죠
리듬을 즐길 수는 있었지만 리듬 주머니를 몸에 달지는 못했어요
그러므로 나는 소리는 나의 리듬이 아니라면서요
내가 지금 게더링 드럼을 혼자 두드리는 것은
통과하면서 외로워질 수도 있기 떄문입니다
함께한 행적, 지웁니다
두드리고 부르면 천천히 스며드는 남은 빛의 조각들
혼자 갖고 놀다
물에 젖은 헝겊 새 무겁, 고요 날지는 못하, 고요
리듬 교육은 제 빰을 후려치는 제 손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육을 시작하는 생의 싸늘한 손박닥들, 븕은 손자국들,
엄마의 목소리는 가장 음악적 샘풀이며
아빠의 목소리도 좋지만
엄마의 음역이 더욱 아이와 비슷하다지요
처음의 음색으로 노래부르며 둥둥둥
가장 아끼는 것을 내줄 수 있을 때까지
게더링 드럼은 내가 혼자 두드릴 겁니다
함께 울어야 할 운명이므로
혼자 외로운 겁니다.
*아마존의 여인 부족인 아루보족이 여성의 본능을 억제, 성욕을 다스리기 위해 먹는 버섯
문제적 화자
화자 언니는 왜 죽었을까
열심히 하는 중이라 털을 곤두세운 레빗
헝클어져도 잠들어 있는 내 벗
느리게 가는 것은 거북이지
딱, 버티고 서서 가지 않는 거북스레
두 해에 초 하나는 안 될까 그런 셈으로는 열아홉
후한 거래상을 만나면 네 해에 한 개도 가능할지 몰라
나는 홈-스쿨인데 매일의 해답을 필요로 하는 물음인데 뒷걸음치면서 오늘 후지부지 문제를 덮어버리고 가면 내일 소식 불통인데 잘근잘근 나를 분할하는 물음들과 유사한
경험들 나만의 것이 아니겠지
화자의 콧구멍에 혀를 밀어 넣으려는 문제 많은 사람이 둘 있었다 사랑이라고 했다 그곳은 화자의 영역, 그렇게 침범하는 건 아니지 숨을 쉬려고 입을 열었으나 말하는 화자는 아니었다 크고 무거운 궁둥이를 가진 화자가 열매를 믿던 어느날 날썌게 석류 한 줌 훔쳐 입에 털어 넣고 뛰던 날도 있었지만 열매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건 중대(重大)한 화자의 문제, 내다 버린 언니의 시체가 다 식을 때까지 읽히지 않는 메뉴판을 펴놓고 앉아 있던 고집도 문제, 꽃이 되고 싶던 언니에게 화자는 문제, 거추장스런 청각을 주렁주렁 달고 듣지 않는 화자를 언니는 묵인했지만 그건 궁극적으로 화자의 문제였지 과거이긴 하지만 우는 아이를 자루에 담아 남의 집 대문 앞에 두고 사라지는 화자의 엄마들처럼, 화자가 소실(消失)의 미덕을 일찍 알고 있던 것도 문제라고들 해 벗어 둔 허물을 그리워하다 또 껴입고 가는 게 문제라고, 화자가 잃어버린 가방은 주인에게
소용없듯 누군가는 발견하겠지
빨간 칸나를 먹으면 빨간 똥을 누는 달팽이
얼음에 박혀서 맴돌지 않는 달과 팽이, 나의 속성
달에서는 체중이 1/6이라는데 무거운 내가 문제라는데 친족들이 몰표를 주고 논의해야 할 사항들이라고 하지만 강아지는 내 문제의 친구이고 문제를 이해할 떄까지 답을 구하고 있을 테지 심혈을 기울인다는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참자 평균을 벗어나는 것이 문제니까 공식은 없으므로 나는 손들고 섰고 문들아, 머리 들라, 찬송하는 하얗게 굳은 화자의 석고
화자 언니는 왜 죽었을까 문제적 화자 때문인가
위 아래로 쏟으며 냄새를 맡으면서
화자 언니 손을 잡고 가고 싶었던 곳은
누드주의자 마을인지도 몰라
늦게 벗는 인간이라 문제라고 합디다만
원래 늦되는 아이라 다루기 힘들었다고 합디다만
없는 주제에 눈동자를 굴리며 침묵을 지키면
창조작인 인간으로 보일 때도 있다고 합디다만
코코코, 문제의 납작코를 더 두드리는 화자는 참 나쁜 손가락이었다고 합디다만
학교에 가본 적 없는 아이들이
나무그늘 학교로 모여듭니다 한 자리 비워 둡니다
작은 의자에, 이제는, 나를 , 앉힐 수도 있는데,
꽃씨 있습니다 화자를 위해 언니가 나눠드립니다
우리
서로의 사기술은 우아하다
"화장을 안 한 너의 얼굴은 아이 같구나"
"나는 네가 짖는 게 참 좋아"
너는 몸의 근원이 심장이라 왼쪽을 보호했지만
모성의 방식이 모두 삭제되어도
나는 마음 없이 오른손으로 내게 죽을 먹이기도 해
그러니까 그건 정말 아프고 굶주린 나
너의 손은 어떤 글씨체를 갖게 될지 미정이었지만
나는 오블라토*에 먹기 싫은 장미를 싸서
너를 위해 꿀꺽 삼킨 건조한 입이 된다
앞으로 축하해야 할 일들 때문이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손바닥을 마주치는 일은 어땠지?
둘이서 하나의 입으로 앵두를 깨물어 터뜨리는 일과 같았지
안녕, 터진 앵두들
너는 불결한 것이 정결한 것을 속인다고 말했지만 난 그 반대의 상처가 더 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너도 넣지 마 왜 삽입은 흡입이 될 수 없는 걸까 너는 길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깊어지는 법을 배우진 않았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 너도 나도 늘어난다는 것을 모르니까 너와 나는 짧았지 네가 명료해질수록 나의 입술은 수축했지만 왜 관계는 꽃잎처럼 가벼울 수 없는 걸까 나는 한번씩 너를 쏟고 너는 내 꿈의 사막을 다 지나 내 피를 쏟으며 곧 너와 나는 작아진다 성별을 뒤바꾸며 우리 쪽으로
여기는 남의 집인데 누군가 다녀가면
버려진 채 남의 죄를 대신 짓고 있는 것만 같고
오늘은 지금인데 또 나의 너는 딴생각에 빠져 있구나
시간 배분을 잘못한 너와 나에게 오늘은 시간이 없다
우리는 홀몸이니까 듀엣이나 커풀 테라피를 꿈꾸지 않았지만
너는 속살은 잘 무르지만 금방 회복된다고 속삭였고
나의 혈액은 너보다 조금 복잡하고 예민하다
인공 달빛 조명 기구가 우리를 비추고 있지만
젖지말자, 젖으면 더 외로워지니까
다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남기라 하면
오랫동안 나는 혼자였지만
"나는 너를 생략한 우리였다"
처음부터 나는 우리
우리는 한팀
그러니까 덤벼보시지
*먹기 힘든 쓴 약을 싸서 먹는 데쓰는 녹말지
영향을 끼치는 사람
4인용 테이블의
세 자리를 비우고 밥을 먹는 한 사람 앞으로
당신은 비밀을 신고 오지
신지 않던 오래된 구두에는
더 오래전에 떠난 거미들의 집
어떤 날, 한 사람의 동작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전달되는 목소리들마다 겹으로 들려오기 시작할 때
어딘가에 한참을 못 미친다는 한 사람의 생각들 사이로
부정적인 말에 민감한 아이가 툭, 돌을 집어 던지는 것처럼
느닷없는 결과로 당신이 올 때
아, 당신의 범주 안에 있었던 것이구나, 알게 되지
오래전부터 수묵 담채로 서서히 번져오던 당신의 그림자
여러 맛이 뒤섞여 있어 누가 최초의 당신이었는지 알 길이 없고
어차피 도미노는 과정과 결과를 즐기는 놀이
당신이 쓰러져 만들고 있는 사태가 확산되고 있다고 해도
누군가는 원인을 제공해야 하는 놀이를 당신이 하고 있는 중이고
하나의 덧니가 치열(齒列)에 끼치는 영향보다는
덧니의 주인들은 덧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명백하지
본연의 자세를 지녔던 본체 이후, 여러 색을 덧칠하게 된
그 후로 한 사람은 거짓말을 잘하는 신자를 하나 믿고 있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섞인 것들은 감미롭지 않아 빠이빠이
한 사람과 한없이 가까워지고도 한없이 멀어지면서
당신은 비밀을 신고 가지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 미스터리 써클을 만들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리고 시간의 간격을 달리하며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한 사람 앞에 앉아 같은 표정을 짓는다면
알게 모르게 어떤 작용이 있었던 게 분명하지
11월
최갑수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 앉아 오래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11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 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겸연쩍기만 한데
고드름
최갑수
외로움은 위험하다
제 몸을 녹여
제 눈물을 모아
아래로 향하는 고드름 아래로 향할수록
날카로워지는 고드름
나는 외로운 사람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 눈물들을 모아
어느 맑은 날
마침내 부러지고 만
외로운 어떤 사람의 일생을
본 적이 있다
그 도시의 외곽
최갑수
그 도시의 외곽에는
집을 넘어가는 계단과 세모 네모 출렁이는
창문이 있었다 보기 좋게 노을을
배반하는 석탄화차와 한참을 바라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은 흰눈의 깜빡임
상가를 지나는 발굽 뒤로 두터운
구름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떌감을
닮아갔고 불길한 노인들의 육감만이
날씨와 더불어 교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도시의 외곽 어둡고
적막한 공터에는 귀가 닳은
공중전화와 그믐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눈먼 바람만이 이따금 선잠을 잤다
불 밝힌 상가들이 그것을
딱딱 쳐다보며 서 있었다 피카디리 극장 옆
잘 접어진 마분지 같은 무화과나무
유치한 눈발을 받아내느라
먼 바다 밀물 소리를 껴앉고
잠이 들곤 했다 행인처럼
또 행인처럼 눈이 내리고 지친
불빛이 내몰리는 결코
녹아 흐르지 않을 하루
눈시울이 붉어져
빈 수레 소리 요란한
그 도시의 외곽에는
고만고만한 것들이
그렇게 견뎌가고 있었다
은난초(隱蘭草)
윤정구
무인도에서 시집온 은난초를 만났다
친구는 은난초라는 이름 대신
보춘(輔春)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솟아오르는 몸에게도
한 구석 허(虛)한 데가 있는가 보다
떠들썩한 세상에도 허한 데가 있고
은난초처럼 조촐한 꽃이 피어
허한 것을 메우고 있는 것을 알겠다
보(輔)라든가 은(隱)이라든가
그런 조용한 글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향기롭게 받치고 있는 줄을
왁자지껄 떠들고 넘어가는 봄 낭떠러지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핀 은난초를 통하여 본다
그런 작은 깨달음이 숨어 피는
무인도를 생각한다
향기 가득한 바다를 생각한다
한 잎의 女子,1*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같은 女子,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병들다
강해림
들린다는 건
하늘의 일
귀신도 아니고 넋도 아닌 것이 부지불식간에 들어와 버려
덜컥 병든 몸
뼈도 박도 못하고
무덤까지 가지고 갈 병 하나 옆구리에 차고 사는 일
너 아니면 죽을 만큼 아파서
내 살과 뼈를 안치고 애끓는 일
그 많은 권태와
귄태의 궁전에 핀 꽃들의 오지 않은 부음과
오지 않은 시간의 비문에 흘리는 농담과
죽은 꽃들의 다비식에 불려나온 늙은 고요와
젯상에 올린 고봉밥보다 더 수북한
불온으로 배를 채우고도 허기져 손가락이라도 물어뜯다 죽을 일
징역 사는 일
진짜 무당이 되려면 만 번을 울고 가야 한다는데
만 번을 돌고 돌아 헤맬 일
대낮에 거울 속 캄캄한 무덤에서 나온 여자를 바라보는
참 쓸쓸한 일
칼 위를 걷는 일
두 발 달린 짐승이면서 한 번도 땅에 발 디뎌본 적 없는
허공과 섹스 하는 일
내가 시 쓰는 일
저녁의 자귀는 천 개의 귀를 가졌다
김영식
당신은
손이 천 개인 천수보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나는
귀가 천 개인 자귀나무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지 귀가 손이 될 순 없지만
초록이 생리혈처럼 시끄러운 오후의 자귀 아래 서면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린 귀들이 천 개의 더듬이를 세우지
천 개의 눈이 달린 손이 있듯
천 개의 눈을 가진 귀도 있지 귀가 눈을 얻었으니 그는 얼마나 선량한 것일까 바람이 불면
천 개의 귀 속으로 달이 뜨고 천개의 달팽이관을 빠져나온 고양이들이 천 개의 골목으로 내려가고
아이들은 칭얼거리는 귀를 베고 잠이 들지 그러나
나무는 나무를 위로하지 못하지 내가 나를 위로하지 못하듯
까마귀 한 마리 앉았다 가면 저녁이 되지 이윽고 저녁의 입구로 두런두런 귀 큰 사내들이 돌아오고
잎맥처럼 버석거리는 여자들은 식은 아궁이에 맛있는 귀를 안치지
달빛이 길게 혓바닥을 내밀어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면 분화구 같은 구멍 속에서 우우 허기진 짐승들이 뛰쳐나오고
손 없이 한 생을 흘러온 것들엔 손을
귀 없이 한생을 흘러온 것들엔 귀를
천 개의 귓밥은 정처 없는 것들을 불러 모아 뜨신 밥 한 그릇 먹여 보내기도 하는 걸까
밤이 깊으면 저것 봐!
땅바닥으로 뛰어내린 잎들이 펄럭거리는 귀를 펼쳐 가만히 젖은 것들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걸
당신은
손이 천 개인 천수보살의 손에 대해 얘기하지만 나는 지금
눈이 천 개인 자귀나무의 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지
애인의 연애는 정당한가
이상도
애인은 다른 남자와 연애 중이다. 나는 양지바른 쪽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 죽였다. 애인이 사랑하는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생각하는 사이, 목련이 피고 벚꽃이 피었다. 봄이 머무는 걸 느낄 수 있었으나 봄나들이 가는 병아리는 보이지 않았다. 껌을 씹으며 배달 가는 다방 레지의 슬리퍼 소리만 질질 끌렸다. 그 소리는 지하로 흘러가다 지상으로 역류하곤 했다. 애인의 연애는 정당한가? 생각하는 사이, 긴 가뭄과 한 번의 홍수가 지나갔다. 숨을 헐떡이며 좀처럼 기울지 않는 해를 보았다. 넓은 그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늘을 찾아 헤매는 사이, 쉽게 단풍들고 낙엽이 졌다. 애인은 나를 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뒤늦게 단풍놀이 가는 관광버스가 줄을 이었다. 줄지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푸르름으로 눈이 내렸다. 애인은 나를 떠나 행복할까? 생각하는 사이, 구름의 방향이 바뀌고 누런 해가 꼴딱 저물었다. 고기압과 저기압의 골짜기로 영하의 바람이 몰려왔다. 담배연기는 매캐했고 다방의 커피는 쓰고도 달았다.
슬픔의 씨
이대흠
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다른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 사이를
천년이라고 하자
한 빗방울과 다른 빗방울 간의 거리를
천리라고 하자
천년동안 비 내리고
지척인 천리는 구름에 가려졌다
그렇게 천년에 달팽이 껍질 하나 뒤집어쓰고
내 그대에게 여러번 다녀왔으나
천리 먼 길에
마음 발바닥 짓물러졌으나
다리가 다 닳아 자라발이 되었으나
그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 빗방울과 다른 빗방울의 사이
그 아득한 거리에
빙하기에 묻혔으나 다시 발아한다는 연씨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슬픔의 씨 하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천년이 지나고
수많은 천리를 사이에 두고
나 그대를 향해 우두커니 서 있는 이 생을
천형이라고 하자
천직이라고 하자
술 받으러 가는 봄
이화은
물병아리 한 마리가
딱,
반 되짜리 주전자 뚜껑만한 고것이
겁없이 봄강을 끌고 가네
꼬리물살이
풍경화 속 원근법 같기도 하고
후라쉬 비추고 가는 외로운 밤길 같기도 한데
고 뚜껑이 잠시 물속으로 잠수라도 해버리면
강은
덩치 큰 아이처럼 철없이 길을 쏟아버리고 마는데
반 되가
턱없이 말술이 되기도 한다는 걸,
오래된 풍경화 속 원, 근, 어디쯤에
후라쉬 불빛 가까이 들이대고 보면 거기
쭈그러진 아버지 반되짜리 주전자
꽥꽥 혼자서 울고 있다네
술 받으러 가는 아이처럼 물병아리
달그락 달그락
추억 쪽으로 너무 멀리 가지 말거라
봄은 겉 늙어버린 덩치만 큰 아이 같으니
물푸레나무
박형권
저 나무, 물푸레나무
안에 들어가 살림 차리면
숟가락과 냄비를 들고 부름켜로 들어가
방 한 칸 내고
엽서만한 창문을 내고
녹차 물을 끓이면
지나가던 달빛이 창문에 흰 이마를 대고
나물처럼 조물조물 버무린 살림을 엿보겠다
나는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고
겨울 들판에서 옮겨온 밤까치꽃 같은 여자가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벽에 귀를 댄다
물푸레나무에는 물이 많아서
천장에서 똑똑 물이 떨어져
그릇이란 그릇 죄다 받쳐놓으면
실로폰 소리 나겠지
겨울 내내 물 푸다가 봄이 오겠다
여자하고 나하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서로 좋아하는 것
나의 하초와 여자의 클리토리스가 파랗게 물이 들도록
끙 끙 끙
어떻게 어떻게 힘주다 보면
나도 모르게 봄을 낳아서
갓 낳은 알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상이 찾아오겠다
그때 창문을 열면?
접속
황수아
나는 탄타로스의 굶주림을 닮은 곳으로 접속할 것이다. 아편굴처럼 흰 접속의 동굴에서 내 눈이 지워질 때까지 연기를 피워 올릴 것이다. 필생의 익명을 얻고 싶다. 배가 고파 손톱이 사나워지기 전까지는 단 한 번의 해킹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디를 사기 위해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르지도 않을 것이다. 캔을 따고, 맥주거품을 입술로 헤집어 아물어가는 접속의 흔적을 찾지도 않을 것이다. 오래 전 잃어버린 몽상을 미행하는 일도 너와 스쳐갔던 일순의 일순간을 주소 창에 찍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줄곧 자라나던 내 속눈썹이 데시벨을 휘감을 때쯤 찬바람은 경쾌한 바이러스를 몰고 올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붉은 무덤을 닮은 메신저 안에서 서서히 독살될 것이다. 그 순간 낯선 행성의 언어로 유언할지 모른다. 패스워드가 사라지고 로그아웃을 할 수 없는 자멸의 접속을 바라던 삶이었다고.
-2010년 <현대시>2월호
황수아 시인: 1980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08년 《문학수첩》에 '통조림'으로 등단.
갯벌
권혁수
고무함지에 담긴 아이가 갯벌을 헤엄치며 논다
너무 넓어서 갈 곳이 없어진 아이
발가벗긴 아이를 갯벌 위에 올려놓은 여자가
갯벌을 뒤진다
생계의 검은 바닥, 그 깊은 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자의 호미질은
매섭게, 단호하다 허리를 펼 때마다
갯벌 위에 올라앉아 개흙이 되어가는
아이를 바라보고
밀물을 준비하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자신이 파놓은 검은 구멍을 다시
들여다본다
무릎으로 갯벌을 버티고 앉아 있는 여자의
보이지 않는 정강이가
갯벌에 주저앉아 혼자 노는 아이를 떠받치고 있다
자신을 꺼내기 위해 갯벌을 파헤치는,
날마다 썰물 진 젖가슴을 갯벌에 묻는
저 여자
등 뒤에 밀물이 다가서는 줄도 모르고
아이의 입에 젖을 물린다
정맥류(靜脈瘤)
심진숙
왜 자꾸만 역주행을 하는 지 몰라
마음이라는 것,
질주하던 고속도로
밀리는 자동차에 막혀서
무거워진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보면
내 몸이 잊어버린 것들
욱씬욱씬 되살아나는 것이다
온 몸 구석구석 12만 킬로를 돌고 돌아
심장으로 향하는 길, 고장 난 판막 앞에서
어제의 피와 오늘의 피가 충돌한 흔적
비틀린 정맥들이 시퍼렇게 솟아있다
전진할 수 없는 돌아설 수도 없는 길에 갇혀서
나 돌아갈래!
박하사탕* 처럼 부서져버린 피톨들
뜨거운 것들은 언제나 지나온 길 위에 있어
살갗까지 파랗게 드러나는 기억의 뿌리,
어제의 시간이 자꾸만 역류를 한다
아직 못 마친 숙제가 있다는 듯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떠나온 길은 지워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2000년 이청동 감독 영화
-<문학들> 2010년 봄호
두번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
두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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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보르스카의 시에는
서양의 전통적 사조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망한 우주적 상상력이 투영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많은 비평가들은
쉼보르스카의 시를 낯설고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새롭고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1923년 폴란드 쿠르니크 출생.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유월
조연호
계집애들이 쪼그려 앉아 맑고 투명한 땀을 쥐며 공기놀이에 열중한다. 얼굴을 만져주던 면사(綿絲)같은 잠이었다. 덥고 더럽고 지켜야 할 것 많은 유월, 물웅덩이가 바람개비처럼 어린 모기들을 훅훅 창가로 날려보낸다. 타인절대금지, 라고 써넣은 팻말을 화장실 문에 못질하던 노인의 손이 오늘은 붉은 애호박에게 끈을 달아준다. 많은 자식들에게 그는 그렇게 못질을 하고 끈을 고쳐 매 주었을 것이다. 애정없이, 허기진 기억이 내 안에 들어온다. 어리고 어질고 어지럽혀진 유월, 문밖을 나서면 어미새처럼 둥지 주위를 맴돌다 푸드득 날아가는 골목길이 자기 울음보다 더 밝아지곤 했다.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천년의 시작,2004년
우는 화살
강영은
사내는 몸속에서 울음을 꺼냈다 울음은 우는 화살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울음의 변방에 빗살무늬를 장치한 구름이 빗발쳤다
과녁을 향해 당겨지는 화살은 빗줄기의 연대, 피할 도리가 없으므로 그가 사랑한 사슴과 말과 여자는 붉은 비애(悲哀), 피가 흥건했다
광대처럼 광대싸리나무 속에 울음을 가둔 그는 온몸이 화살통인 사내, 핏발 선 눈으로 뼈를 날려보내는
사랑이 과녁이라면, 흉노의 피를 지닌 그를 사랑하련다. 오랑캐, 오랑캐 하고 부르면 말 편자처럼 닳아 돌아오는 그를,
구멍 뚫린 염통에서 붉은 울음 꺼이꺼이 토해내는 서녘을 밟고 일몰의 태양이 멀어진다 입시울소리처럼 오래전에 잃어버린 일촉즉발의 활시위가 팽팽해진다
배를 갈라 울음을 꺼낸 단발명중은 살부림의 효시(嚆矢),
북방중원의 무덤 속인듯 오후 6시의 과녁이 운다 몸이 떨리고 목젖이 운다 과녁을 삼킨 나의 화살은 그렇게 흐느낀다
명자나무 우체국
송재학
올해도 어김없이 편지를 받았다
봉투 속에 고요히 접힌 다섯 장의 붉은 태지(苔紙)도 여전하다
화두(花頭) 문자로 씌어진 편지를 읽으려면
예의 붉은별무늬병의 가시를 조심해야 하지만
장미과의 꽃나무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느리고 쉼 없이 편지를 전해주는 건
역시 키 작은 명자나무 우체국,
그 우체국장 아가씨의 단내 나는 입냄새와 함께
명자나무 꽃을 석삼년째 기다리노라면,
피돌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가미로 숨쉬니까
떨림과 수줍음이란 이렇듯 불그스레한 투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자나무 앞 웅덩이에 낮달이 머물면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종종걸음은 우표를 찍어낸다
우체통이 반듯한 붉은색이듯
단층 우체국의 적별돌에서 피어나는 건 아지랑이,
연금술을 믿으니까
명자나무 우체국의 장기 저축 상품을 사러 간다
독작
류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시집 <상처적 체질> 2010년 문학과 지성사
목련 이야기
심진숙
국민학교 1학년 1반, 처음으로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었을 때
행여나 지각을 할까봐
아침 허기도 덜 메운 채 집을 나섰네
교실 문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고
나보다 먼저 출석한 묵련꽃망울이
수즙은 얼굴을 파르르 떨며 서 있었네
부지런한 목련처럼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린이로 무럭무럭 자라났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에
봄이 몇 번이나 왔다 갔을까
팝콘 같은 꽃을 터뜨리며 새봄이 올 때마다
눈부신 햇살이 목련의 심장을 적중해버렸네
기필코 개근상을 받으려는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목련은 봄의 호명에 어김없이 다시 꽃을 피웠지만
잎이 나기도 전에 낙화를 먼저 알아버렸네
성장통을 앓는다 했네 고도성장이라 했네
사춘기를 넘긴 새나라의 어린이들이
점점 불온한 학생으로 변해가는 동안
세상은 굳게굳게 문을 닫아 걸었네
높은 담장을 넘으려고 어떤이들은
기러기를 타고 훨훨 날아가기도 하였네
철이 없이 철새들 하늘을 오락가락 하는 동안
새봄 새학기 담장 안에는 조숙한 목련꽃
푹푹 고개를 꺾네, 책상 위로 시든
꽃잎이 지네, 눈부신 봄날이네
-<문학들> 2010년 봄호
상처적 체질
류근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生覺한다는 건
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마당 깊은 집
이선이
小寒 지날 무렵, 강원도 산골 폭설에 갇혀 보았지요
마당 안에 무덤을 들여놓은,
빈집이 된 지 오래인 그 집엔 실팍한 거미집 속 독거미만이
하얗게 으스러지고 있었지요
어릴 적, 우리집 남새밭엔
적산강산 살다 가신 감실할매 봉분이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하고 있었지만
죽어서라도 사람소리 흥성하라고 싸리울타리 기웃이 열면 보
이는 남새밭에 모셨다지만
도대체 어떤 쓸쓸함이 무덤을 마당 안까지 불러들였을까 하고
휘날리는 눈발만 그저 사납게 맞고 서 있었는데요
인적도 마을도 아득할 때, 우리 가슴에 봉긋봉긋 솟구치던 그리
움이란 것들 저리 솟아
그리움에 젖 물리다 무덤과 한 살림 차린 걸까요
썩은 서까래 밑
오소소 잔기침 재우며 죽은 듯 살고 있는
외딴 그 집 지나칠 때
오얏씨처럼 말라붙은 가슴에 꽃피는 소리, 젖 도는 소리
저렇게 올망스레 저승살림을 또 차렸구나
내 쓸쓸함까지를 몰고가는 무지막지한 눈바람
등짝을 사정없이 얼리고 말았지요
나도 그 희고 둥근 마당에 하룻밤 묵어가고 싶었지요
이선이 시인
경남 진양 출생.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서서 우는 마음>, 평론집 <생명과 서정>
조신(調信)의 꿈
김인(金寅育)
꽃을 생각한다
한 열혈 사내의 최후를 생각한다
제 모가지를 뚫어 콸콸 쏟아지는 피를
뜨겁게 꽃으로 피워내던 사나이
그 처절한 격정을, 열애를, 생각한다
그건 아무나에겐 불가능한 일, 놀랍고 가슴 저린 일!
다 버리고, 본원마저 버리고
오로지 표적했던 단 하나의 꿈
참 우습구나
굶주리고 헐벗고 빌어먹는 동안
거추장스런 것이 바로 당신이었다니!
그 혐오의 실재가 사랑이었다니!
지우자
허무의 나, 이율배반의 나
햇볕 켜켜이 알몸으로 나를 말리자
극한으로 가벼워져서 마침내 내가 나를 잊을 때까지
간을 꺼내고
부질없이 쿵쾅대던 심장도 꺼내고
세상 앞에 무릎 꿇린 저 아귀 같은 창자도 마침내 꺼내고
하루, 하루, 가벼워져
어느 가을날 문득 투명한 바람이 되자
잠자리의 날개처럼, 나
꽃피는 봄날의 반짝이는 여백이 되자
속절없는 한 생을 비우고
눈 뜨면 이미 아닌, 꿈의 생을 지우고
저 부신 적멸로 가자
사랑아, 너도 같이 그렇게 가자!
김 인(본명: 김인육)
1963년 울산 출생
2000년 『시와생명』 등단
2004년 시집 『다시 부르는 제망매가』
현재, 『미네르바』 편집위원, 월간 『가족이야기』 편집위원, 양천고 교사.
저것이 완성일까
-김선굉
지는 후박나무의 잎을 바라본다
아주 느리게 시간이 개입하고 있었다
잎은 천천히 떨어졌으며,
무슨 표정과도 같이,
마치 무슨 순교와도 같이,
몇 차례 의젓이 몸 뒤집으며
툭, 하고 떨어졌다
저것은 그러면 완성일까
어떤 완성일까
아니면 또 다른 완성으로 가고 있는 걸까
툭, 툭, 떨어져 쌓여 몸 뒤척이는
저 마른 잎들의 근심은
茶山에 기대어
이인주
초당에 앉아 한나절 蓮池를 바라본다
못물에 풀린 구름이 저보다 환한 하늘을 삼키고
시치미 뗀다 눈치 챈 금빛 잉어가 주둥이를 내밀어
다급한 맥박을 전한다 공중에 흩어지는
물고기의 숨같은 초서들, 茶香이 식어갈 때 애써 원망하지
않는다
눈귀를 닫아건 세상과 고인 세상에 몸 적시는
그대들도 나도 탁한 당쟁의 못물에 갇혀 어지럼증
앓고 있나니, 이 아픈 耳鳴을 언제쯤 풀거나
공명도 부귀도 이미 먼 북방의 풍문처럼 아득하고
나는 한갓 시골벽지에 몸이 매인 몸
문지방을 넘은 뜻만 하늘만큼 자라
날마다 펼 수 없는 부피를 韓紙에나 넓힐 뿐
바람을 갈아 칼을 벼린들 무엇하나 내가 쳐내야 할 숲은
난마로 얽혀 밤이면 가슴에 채이는 물소리가
쇠 끓는 소리처럼 나를 끓이는데... 목민심서, 목멘
심사...
오후엔 우이봉에 올라 멀리 흑산도를 바라본다
파도에 홀로 몸 말리고 있을 형님,
나보다 뜻이 깊고 진중한 군자의 표현에 닿으려
굽이굽이 격랑 이는 편지를 띄운다
뜻은 같으나 몸이 같지 않음의 비애를 이리도 한합니다
대장부 한 세상이 광풍에 찢기는 돗폭 같습니다
갈매기떼가 한 하늘을 이등분하며 다시 전하지 못할 말을
물고
섬 쪽으로 가라앉는다 황혼이 마지막 기운을 동백숲으로
쏟아붓는다
내 기어이 오늘밤엔 울혈의 사연 밀어올리는
저 동백의 숨은 개화를 엿보리라 우련한 달빛 등지고
붉은 꽃눈을 닮은 처사 하나가 백련사로 접어든다
ㅡ 2005년 《교단문학상》 당선작 ㅡ
물방울집
이인주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받거나
처마끝 낙숫물이 궁글린 물방울을 헤아리고 있으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집 속에 들어앉아
내가 둥근 일을 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부풀린 물방울로 지은 집 한 채가 있어
둥글고 온전한 방 속에 몸을 푸는 내가
안과 밖이 잘 어우러진 창의 굴곡을 훒고 지나갈 때
마음과 달리 나는 물방울집 밖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좀체로 뚫고 들어갈 틈입을 주지 않는 물방울집은
갓 구워낸 빵처럼 부드러워 보이나
온 힘을 다하여 밀치고 들어가려 하면
그만큼의 반동으로 나를 미끄러뜨리며 단단한 경계가 반짝 일어서는 걸
그 때 알았다
아무렇게나 굴러 살점이 발겨진 뼈 하나를
기둥처럼 붙들고 중심 잡을 수 없을때
울림 큰 바람의 세계는 중심이 텅 비워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면벽하는 정신 하나 투명한 연잎 위 이슬로 맺히려 하고 있을 때
풍경은 그때서야 가장 깨끗한 경계를 세워두는 것이 아닐까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맑고 투명한 물방울의 집은
갈고 닦은 뼈로도 깨뜨릴 수 없는
부풀린 생각의 모서리를 보기좋게 다듬은
둥글고 단단한 물방울다이아처럼 빛나는데
다시 생각의 중심을 비우고
부딪쳐 생채기난 몸집 둥글게 말아
구심력을 잡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둥글고 단단한 물방울집 한 채가
내 안에 들어와 있음에
흠 칫 놀라는 것이다
-김우정 문학상 대상
고산에 걸린 달
이인주
축전이란 말이 설핏한 비감으로 다가오는 고산생가, 초승달이 걸렸다
高山이 孤山인 줄 눈치 챈 사람끼리 멍울진 가슴을 맛대고 점층법으로 밀물진다
먹물처럼 번지는 외로움 고봉으로 안아 월궁을 짓겠다?
준령을 가슴에 앉히려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으나
비워지지 않는 뚝심이 가파른 산을 오른다
얽히고 설킨 길, 우뚝한 능선 하나 아름답게 걸던 사람들은 다 앞서 갔다
남은 자들만 모르는 길을 더욱 깊게 하는 밤,
고산에 걸린 달이 차갑게 맑다 달 속 여의주가 박힌 현인의 눈 짚힐듯 말듯 하였다
이미 오래 전 경전을 작파하고 달 솟그으로 들어간 삼, 나오지 않는다
땅 위의 집들은 이지러지면 그 이유를 쓴다 풀벌레가 애면글면 어둠을 우는 데,
알 것 없다 산중의 어부가 괵를 낚아 무어헛하려고?
그저 五友나 벗하며 사시를 견디게! 가벼운 헛기침 시치미로 떼시며
어른 꼐서 다 오른 고산을 사뿐사뿐 냐려오신다 짊어진 달이 한 살이다
진검승부
마지막 숨을 모둔 서녘달이 으스름 대나무 숲을 가르고 있다
빛날이 건너간 자리, 대나무는 요요하다
벤 자와 베인 자가 짚히지 않는 내상을 여미고 선 발치
피의 이분법이 자아내는 잔혹한 어룽
팽팽하게 맞서는 긴박한 힘들의 행보는 수직이다
장과 멍 같은 靜中動의 흐름 속
펼칠 다음 괘가 떠오르지 않는
검을 쥔 당신, 천지간 방책이 된 죽창이 겨누고 있다
어둠이었던가
뼈마디에 맺히는 별빛의 결기를 키운 힘이,
발등 찍는 아픔을 뿌리인 양 내리고 버텨온 날들
쏴아아, 어둠 편으로 기울어질 때
떨리는 댓잎이 퍼렇게 운다
뒤꿈치 없는 그림자가 살얼음판을 쩌르렁 울린다
저 공포를 넘어 죄를 건너 닿고 싶은 이름이 천형인 당신
돌아 나올 길 없는 지옥을 걸어 들어가고 있는 밤
숨이 숨을 밟는 걸음이 통곡의 벽이 된,
통곡 안에도 그 너머에도 있지 않은 응답
대쪽 서슬을 디디는 바알간 알발은 부신 빛의 날이다
한 방울의 피
그 저릿한 온기를 맥의 한끝에서 다른 끝으로 받는
눈빛이 젖은 당신은 이미 승부사가 아니다
진검도 승부도 가뭇없는
첫물 죽순처럼 마알간 原, 그 알속을 오롯이 베어낼
그 칼이 그대 손안에 있다
이인주 경북 칠곡 출생
경북대 화학과및 동댜학원 졸업
2006년 <서정시학> 등단
2002년 <수주문학상>2003년 <신라문학 대상>
2008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2009년 <파블로네루다 기념문학상><중봉 조헌문학상>수상
겨울 월정사
이영재
월정사 숲에 들어 곧게 선 나무에게
나무야 사랑해
귀엣말 고백하면
온 산이 붉게 물들어 제 몸을 불질렀지
가을비 지나가고 얼음 속 월정사
생애는 단풍아닌
상처로 여물어
빈 절간 흰 산을 쓰고 곤히 잠든 동자승
사행천 계곡에 섶다리 위태롭다
펑펑펑 함박눈이 함박나무에 쌓이고
수북이 고봉밥 쌓던 어머니가 그립다
-내일을 여는 작가 2009년 겨울호
김영재
197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오지에서 온 손님외 다수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 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수상
구절초
박기섭
찻물을 올려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 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 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 하나 지어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 잔을 올립니다
혜존(惠存)
이경임
낯선 시인의 이름으로 시집이 왔다
사 십년 빈한하던 이름 뒤 혜존이라는
민망한 말씀의 겸손 얹혀 있어 부끄럽다
첫 시집의 감동을 함께 나눌 이들이
일면식 하나 없어도 기꺼운 까닭인지
시인의 두근거림이 행간마다 살아있다
먼 뒷날 내 쓸쓸한 별자리에 이름 하나
가까스로 얻으면 기쁘게 혜존이라
덧붙일 사람의 집이 너무 멀어 아득한 날
이경임 시집 『프리지아 칸타타 』,[만인사]에서
강가에 앉아
김 공 자
<제117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깨진 유리처럼
마음마저 흩어지면
저를 버려 길이 되는
강가에나 앉아 본다
풀꽃들
서로 손잡고
물빛마저 환한 봄날
'흐르는 물과 같이
살아가면 되는 것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생각이다 싶을 때쯤
한 마리
새끼 피라미
해를 향해 뛰고 있었다.
거좋은 시조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