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 생각: 코로나가 준 선물 ◈
지난주 금요일 임시 사택으로 이사하고부터 난 가족과 이틀 동안 별거했다. 건축으로 교회를 온전히 비울 수도 없었지만, 얼굴만 봐도 꼬리를 치고 달려드는 놈들도 한몫했다. 그러다 몸 상태가 급작스레 나빠지는 바람에 등 떠밀려 집으로 들어갔다.
사흘간 거의 사경을 헤맸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아팠다. 그럼에도 감사함을 느꼈던 건, 완주군청의 코로나 확진자를 돕는 시스템, 특히 전화 모니터링을 해준 여직원의 친절은 큰 힘이 되었다. 마치 자신이 아픈 것처럼 공감하고 염려하는 진심이 느껴져서 더욱 그랬다.
군청과 협업을 맺은 군산 소재 병원으로 이동해 아내와 대면진료를 받고 C.T와 엑스레이 촬영과 혈액검사 후 수액주사를 맞은 후 귀가했다. 갈 때는 천사가 운전을 대신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올 때는 내가 천사가 되었다.
전 가족 코로나 확진은 우리 가족을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해준 선생님이었음을 밝힌다. 여기서 탄생한 이 목사 어록!(^^) ‘사람은 아픔을 통해 부드러움을 배운다’
게다가 격리 기간을 마치면 2년 넘게 무게감으로 존재하던 코로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름 홀가분함마저 들었다. 하지만 목자의 확진으로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는 부담감은 코로나보다 강력한 것이었기에, 송구한 마음이 크다. 지금까지 목사로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니 나 또한 무척 난감한 일이었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극심한 통증과 고통 중에서도 견딜힘을 준 것을 꼽으라면 ‘나는 목사다!’라는 자긍심과 자신도 아프면서 나보다 조금은 낫다는 이유로 밤새 몸을 주물러 준 가족과 자가 격리 7일 이라는 한시적 제한, 즉 7일 후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래,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과 통증이라면 몇 사람이나 이 순간을 견딜 수 있을까?
내 주변 사람들 모두는 ‘나는 000!’에 해당 된다. 집에서는 아빠와 엄마와 자녀로, 교회에선 직분자로, 직장에선 소속원으로 존재하며, 나를 위해 밤새 몸을 주물러주는 가족이고, 이 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는 자가 격리 7일 간의 유통기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군대에 가서야 실감난 말이 있다. “거꾸로 매달려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 3년도 견뎠는데, 7일쯤이야...
그래도 긴 강을 건넌 것 같은 느낌이다. 교회마당에 널브러진 건축 자재들 사이, 가식해 놓은 나무들에서 봄꽃이 여드름처럼 피어올랐다. 아! 생명은 그렇게 조용히 꿈틀대고 있었다.
자가 격리 6개월의 시간, 그 다음 들꽃의 봄꽃은 그렇게 환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