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에 들어가면, 3월 한달 간은 여기저기에서 신학교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 답하게 됩니다. 학교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것을 묻고 답하기도 하고요. 학교 밖에서도 시대에 맞지 않은 이상한 선택을 한 죄로 이런 질문을 받기 마련입니다. 저도 툭 치면 툭 하고 답할 수 있을만큼 그 질문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학우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대부분 비슷한 답들을 합니다. 수련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다가 불같이 성령을 받고(?) 눈 떠보니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성령을 받는다> 이게 뭘까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일이 이들에게 일어났다는 이야기 인가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불같은 성령의 경험, 없으신가요? 저는 있을까요? 저도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알려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성령 강림의 사건을 오늘 전해볼까 합니다. 차차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우선은 오늘 우리가 나누어 읽은 성령강림절, 그 사건의 기록을 한번 다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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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맞이한 성령강림절은 오순절이기도 합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유월절부터 오십일 째가 되는 날입니다. 이날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 십계명을 받았지요. 이 날을 기념하는 축제일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우리가 나누어 읽은 성서 본문, 사도행전 2장은 이 오순절 기간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간혹 제자들이 모인 이 장소를 마가의 집 다락방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데 성서에 기록된 바는 아닙니다. 여하간에 오늘 우리가 나누어 읽은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어디인가 모였을 때 그들에게 아주 신비한 일, 성령의 강림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오순절 성령 강림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 제자들이 성령의 힘으로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말소리가 나니까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을 모였는데 아니 글쎄 말소리가 각각 자기네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말이지요. 성경에서는 놀란 구경꾼의 말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 부분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7절부터 11절의 말씀입니다.
7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8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9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11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우리는 바대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리비아의 여러지역, 로마, 유대 사람,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 크레타 사람, 아라비아 사람. 모여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참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갈릴리 사람들의 말을 자기네 말로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인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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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네 말로 들렸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큰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나와 다른 말씨를 쓰는 나라에 가보면 이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 감이 옵니다.
작년, 재작년이 제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꼈는지 이곳저곳 국외로 나갈 일이 많았는데요. 영어를 사용하는 공식적인 회의 자리에 떡 하고 놓이니 저의 영어실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고 귀여운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 회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제 영어 스위치는 자주 꺼지더라고요. 이 스위치가 딱 하고 꺼지면 영어가 더 이상 의미 있는 음성언어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음으로 들릴 뿐이지요. 저한테는 이게 굉장히 스트레스여서 한동안은 국제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매일밤 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나 멍청이 아닌데 오늘 한마디도 못했어” 하고요. 아무리 번역기가 잘되어 있다고 한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언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언어의 장벽이라는 게 생각보다 큽니다. 하물며 파파고가 없었던 딥플이 없었던 이 시기에는 어떠했을까요.
반면에 국외에 있다가 한국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은혜롭습니다. 이렇게나 내 세상일 수 없습니다. 커피를 주문할 때에도 점원에 빠른 말씨에 긴장할 필요가 없습니까. 저는 점원보다도 더 짧고 더 빠르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아아하나요. 영어 쓰는 놈들이 문제집으로 “커피 한잔 주시겠습니까?” 이런 거 공부해서 백날 외운들 “아아하나요” 이 말을 알아 듣기나 하겠습니까?
한국어를 사용하는 저는 한국에서는 미국이나 독일에서와 다르게 아주 날아다닙니다. 자신감이 넘치죠. 지나가는 모든 말이 제가 원한다면 정보 치환됩니다. 외국에서는 누가 말을 시킬까봐 눈을 피하기 바빴는데 여기서는 길을 헤메는 어르신을 보고 나서서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지하철에 앉아서는 옆자리 아니 옆옆 자리라도 아저씨의 통화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고, 그래서 그 아저씨가 주식을 샀는지 팔았는지까지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씨 같다는 이유로 특별한 힘을 따로 쓰지 않더라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다른 지역 사람들, 외국인들. 이들의 타지생활이 녹록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씨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말을 익히며 살아남기위해 발버둥을 쳤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들이 갑자기 특별한 힘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가장 편한 언어, 자기네 말씨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토씨하나 놓지지않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잠결에 들어도 알아듣는 그 말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서로들에게 묻기 바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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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벨탑 사건과 정반대의 사건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지요. 이 때만해도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세우고 하늘로 오르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그 탑을 무너뜨리시고 언어를 다 흩어 버리셔서 서로의 언어가 통하지 않게 하시지요. 어려서는 이 바벨탑사건을 들으면서 내가 외국어를 익혀야하는 원흉이 여기에 있구나 격분하기 바빴는데 조금 커서는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에 닿는 탑을 세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를 따져 묻게 되었습니다.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탑을 쌓는다는 것은 건축이지 않습니까?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크기가 큰 건축물일수록 설계가 중요하겠지요. 이때 철근 같은 것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건축물을 올리는데 필요한 자재들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알 필요도 있었겠고, 누군가는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는 돌이 필요하겠구나, 여기서는 흙이 이만큼 필요하겠구나. 이렇게 말이죠. 이렇게 누군가 그려놓은 그림을 가지고 또 누군가는 시간표를 만들어야 했을테고 오늘은 이만큼 하고 내일은 이만큼해서 몇날까지 이만큼 올린다 이런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요. 그림과 시간표에 맞게 진두지휘를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이제 그 지휘아래 아래 사람들이 착착 움직여야 큰 탑을 올릴 수 있었겠지요. 흙을 푸는 사람, 돌을 깨는 사람, 그걸 이고지고 나르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움직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탑을 세운다는 것은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모래놀이를 하듯이 하하호호 웃으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지휘봉을 흔들고 누군가는 그 지휘봉에 따라 좌로 우로 움직여야 가능한 것이었을 거라는 겁니다. 하느님이 무너뜨린 것은 다분 탑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런 관계. 누군가가 누군가 위에 군림하는 이런 관계를 흩어 놓은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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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언어가 나뉘고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바벨탑 사건에서 끝나지 않고 모두가 말하고 모두가 알아들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강림의 장소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생기는 긴장과 불안이 없고, 바벨탑을 지을 때에 있었던 군림도 없습니다. 사랑이 깃든 복된 하느님의 이야기만이 그 자리를 메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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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제가 아는 성령 강림의 사건을 전해드리기로 했지요. 그 이야기를 이제 들려 드리려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여러분도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온전히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고 나라면 어떨까 헤아려볼 수 있어도 그건 상상일 뿐이고, 그 상상 속에서도 온전히 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설가 김연수는 이런 심연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이다.”
건널 수 없는 심연을 건너게 하는 힘, 소설가는 이런 힘을 희망이라고 불렀지만 목회자인 저는 이런 힘을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건너갈 수 없는 이 심연을 뛰어 넘어 서로의 말이 통하는 기적과 같은 순간입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가 지날 무렵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현수막 하나가 걸렸습니다. 제목은 518 엄마가 416엄마에게 였습니다. 현수막의 내용은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18 민주화 운동의 유가족 모임을 비롯한 518단체 회원들이 팽목항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정부에 조속한 행동을 촉구하며 내건 현수막이었습니다.
“당신의 원통함을 내가 안다. 우리 쓰러지지 말자. 우리 힘내자” 서로의 말이 통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이후 오월 어머니들과 세월호 유족들의 만남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연대는 연대로 이어졌습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였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태원 참사 초기부터 유족들과 만나고 함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행동에 나섰고, 이태원 유가족들은 오송참사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연대를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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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런 연대가 오순절 일어났던 성령 강림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연대가 건널 수 없는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명과 본질을 가르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심연을 건너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같은 말씨를 가진 그러니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탑을 하나 쌓고자 하는 사람들만의 친교모임을 흩으시고 이들의 결합을 부수십니다. 성령은 끼리끼리만 모인 그들만의 리그를 거침없이 헤치시고 하느님의 복음을 소외된 곳 없이 나누십니다.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모두를 끌어안는 다양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성령을 다양함을 단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함을 다양한대로 두시고, 우리에게 그 다양함을 넘나들게 하십니다. 다양함 속에서 하나 되는 연대의 힘을 누리게 하십니다.
서로의 원통함을 알아보는 힘, 연대의 성령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사이에 놓인 심연을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십시오. 오늘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다른 사람의 말을 내 말로 들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 말을 흘려 듣지 마십시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원통함을 알아보십시오. 그리고 함께 행동하십시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