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을 읽고
더위가 시작될 무렵 더위를 잊게 해줄만한 책을 찾다가 아이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야성의 부름을 발견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골드러시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얼음위에서 썰매를 끌던 썰매 개들과 인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늑대의 피가 흐르는 벅은 남쪽지방에서 인간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 정원사 조수가 노름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벅을 캐나다의 급송 우편을 수송하는 사람에게 팔아버렸습니다. 편안한 삶에서 갑자기 얼음과 눈 위를 달리는 고된 노동을 하게 된 벅은 영리함과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썰매 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어버린다.
우편 수송 일을 마친 벅은 또다시 금을 찾아 북쪽으로 떠나는 사람에게 팔려갔다. 그들은 아무 경험 없으며 배려도 없이 주인에게 혹사당하며 얼음이 펼쳐진 북쪽으로 떠나다 벅은 죽음 직전에 손턴이라는 사람이 구해냈고 옛 주인은 얇아진 얼음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손턴의 보살핌으로 기력을 되찾은 벅은 주인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믿음이 생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벅은 점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야성의 기억을 떠올리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숲에서 얼룩늑대를 만난 벅은 자신을 부르는 야성의 소리를 확인하고 늑대와 함께 자연을 누비다가 다시 손턴에게 돌아오곤 한다. 어느 날 손턴의 야영지로 돌아온 벅은 인디언 부족에게 습격을 당해 죽은 손턴을 발견하고 분노하여 한 마리 야생의 늑대가 되어 주인 손턴을 죽인 인디언 부족을 공격하고 아성의 생활로 돌아간다.
벅은 남쪽의 따뜻한 곳에서 편안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썰매개로 팔려가면서 고된 노동을 하게 되는데 이런 환경을 통해 벅은 자신의 피에 흐르는 야성을 되찾고 본능적인 삶을 살고자 떠납니다. 아마도 남쪽에서 편안한 삶을 살았다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숲속에서 부름이 들려왔다. 길게 끄는 울부짖음이었던 예전의 부름과는 달리 뚜렷하고 명확한 소리였다.”
온갖 경험을 통해 벅은 점점 자신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기억의 한 자락을 되살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핏줄 속에 끈질기게 이어져 온 야성의 본성입니다. 그 본성을 깨달은 벅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야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문명의 세계에서 야성의 세계로 돌아가는 벅을 보며 문명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첫댓글 인간과 동물이,
곧 문명과 자연이 공생할수있는 방안이 있다면 무엇인가...
동물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많이 생각해봅니다. 인간이 지구상의 주인은 아니고 어쩌면 동물들의 터전을 우리 인간들이 점령하고 그들을 쫓아낸건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주변의 강아지, 고양이도 제대로 돌보지못함에 마음이 무겁기도 하구요. 사람을 두려워하지않고 잘 따라주어 같이 살수있기를 정말 소망한답니다. 세렝게티를 꿈꾸고 하다못해 애버랜드의 사파리도 즐겁습니다.
시베리안허스키나 말라뮤트로 짐작되는 벅이 야생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인간의 핏줄 속에 끈질기게 이어져 도사리고 있는 본성,거부할 수 없는 본성,나의 본성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