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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 소개
시인 황동규는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58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어떤 개인 날』『풍장』『외계인』『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악어를 조심하라고?』
『물운대行』『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꽃의 고요』등의 시집이 있다.
현대문학상.이산문학상.대산문학상.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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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사람 모여 사는 곳 큰 나무는
모두 상처가 있었다.
흠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오후내 저녁내 몸 속에서 진 흘러나와
찐득찐득 그곳을 덮어도 덮어도
아직 채 감싸지 못하고
쑤시는구나.
가만, 내 아들 나이 또래 후배 시인 랭보와 만나
잠시 말 나눠보자.
흠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시집 ; 몰운대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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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취해
삶에 취해 비틀거릴 때가 있다
아스팔트 갈라진 구두 끝을 비비다가
밖으로 고개 내어미는 풀꽃의
쥐어박고 싶을만치 노란
콩알만한 꽃송이를 보거나
구두끝에 꽃물 남기고 뭉개진 꽃의 허리가
천천히 다시 들릴 때
봄날 아파트 뜰에서
같이 살며 잊고 지낸 문딩이 새를
문득 새로 만날 때
눈썹이 희고 목이 노란
(이름이 뭐드라. 얼굴은 참 낯익은데)
그 놈이 까딱 고개숙여 인사를 한다!
잠시 머릿속이 환해 비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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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꿈
지난 몇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빗소리.
아침부터 시작해서 낮을 보내고
오후에도 잊힌 듯이 내리는 빗소리.
오늘은 연구실 창 밖 까치집을 적시고
그 밑에 새로 준공한 아랫집도 적시고
보이지 않는 까치새끼들
발톱까지 적시고
더 적실 것이 없어
맥을 놓아버린 빗소리.
발 하나쯤
시간 밖으로 내어놓은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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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몽땅,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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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내 그대에게 해 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 두고
간장병과 기름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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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사랑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송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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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조그만 사랑노래
아직 멎지 않은
몇 편(篇)의 바람.
저녁 한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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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더 조그만 사랑노래
연못 한 모통이
나무에서 막 벗어난 꽃잎 하나
얼마나 빨리 달려가는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금시 떨어지는지.
꽃잎을 물 위에 놓아주는
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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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
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
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
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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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아침
베어진 나무 앞에는
물 반쯤 담긴 연못이 있어
아침이면 반쯤 밝을녘에
말없이 다가가 등걸 위에
나무처럼 서 있고 하였더니
어느 날 마음 속에
가지와 잎이 돋고
또 어느 날은 꽃이 피어
오동꽃 동생 꽃 피어 못물에 비치고
동네 새들이 찾아와
내려앉으려 돌고 돌고 하더니
막 내린 서리 핥으며 낙엽이 굴러와
발 앞에 멈춘다.
아 등걸 위에 다른 사람이 올라 서 있구나.
아 이제 마음 벗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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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 눈이로군
그리고 가만히 다닌 길이로군
입김 뒤에 희고 고요한 아침
잠간 잠간의 고요한 不在
오 눈이로군
어떤 돌아옴의 언저리
어떤 낮은 하늘의 빛
언저리와 빛을 가진 죽음이 되기 위하여
나는 꿈꾼다, 꿈꾼다, 눈 빛 가까이
한 가리운 얼굴을
한 차고 밝은 步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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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받고 살다
내 시대의 건축가 김수근은
성당 건물도 감옥처럼 지었고
친구 시인 마종기는 미국서 살며
이 나라 땅바닥에 발을 붙이려
뻔질나게 달려오곤 했다.
무료 강연!
(미국서 자 본 의사집 가운데 제일 작은 집에서 살며.)
내 시대 사람들은 어디 살건
열받고 살았다.
김수근이 지은 감옥 문예회관 문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이 기쁨!
시집:몰운대行.문학과지성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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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오르내리다
아 눈높이에서 오르내리는 수평선
배는 파도 위에 꽃잎처럼 흩날리고
온몸에 바닷물보라를 맞으며,
병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술
모두 나오게 했어.
파도가 입술로 핥고 있는 섬들 무섭게 예뻤고
어떤 섬은 물보라 속에
송말(宋末) 선사(禪師)들의 수묵 초상화로 사라지고
있고
그 여백 속에서 어떤 섬은
파도에 걸린 물새가 되어 날개를 퍼덕였어.
배가 솟을 때면 같이 솟는 섬들,
한 섬 돌면 이번엔 파도가 혀로 핥는 섬.
발 밑에서 배가 헛딛은 발판처럼 사라진다 해도
차마 눈 돌치기 힘든 바다가 있다는 걸 첨 알았어.
한번 들어서면
눈감고 온몸이
눈동자 되는 곳이 있다는 걸.
시집<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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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황혼
1
길조여
중흥사도 타고
대화궁도 탔드라
절벽 밑에 큰 돌을 달아놓고
밤낮 바라보아
안목을 길렀드라
보이누나
유월에 비 내리고 비 내리고
십이월에 긴 눈 내린다
수월히 살기가 가장 수월쿠나
너무 수월하매
잠 못 드는 밤이 잦았드라
길조여.
2
무관계여
오고가는 세월
봄날의 바람소리
늦가을밤의 짧은 종소리
선조들은
불편하여
자주 강화로 내뺐드라
눈 덮인 초겨울의 뜰에
그림자처럼 떨며
궁궐 쥐구멍에
햇빛이 드는 것을 보드라
나이 들어 친구를 몰래 사귀드라
무관계여.
3
고구마로 빚은 술이
입에 달지 않드라
몸이 마르면 옷을 줄여 입고
천연스레 여자를 만나서
긴 이야기를 들려주드라
해탈처럼 쉬운 건 없지
매일밤 해탈에 탈피까지 하고
아침이면 한 바퀴 돌아
제 자리에 와 있드라
매일 난파하는 꿈 꾸고 깨어
누룩 뜬 술을 조금씩 마시고 자지
아침이면 기억에도 확실히
눈부신 해가 매일 뜨드라.
4
이제는 참 사람 없는 해변을 걷기가 겁이 나데
아직 늙지 않은 건
남포뚝 계집이 모두 안다만
어쩌다 죽고 싶어지지 않을까 겁나데
내 죽음을 아까워들 한 만큼
크게 진 빚도 없으니
주머니에 손이나 찌르고
뭉게구름 피는 아래서
뱃놈들이 싸우는 거나 구경하고
폐선에 웅크리고 앉아 담배나 한대 피우고
어슬해서 돌아오는 해변 참 겁나데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지만
바다보다는 내가 먼저 어두워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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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묻은 이슬방울까지
흘러내리다 꽃 뒷등에 잠시 동그랗게 멈춘
이슬방울까지 선명한
마당 함박꽃의 한창때를
그냥 모르고 지나쳤다.
벌들이 파고들어
꿀과 꽃가루를 온통 뒤집어쓰곤 했다.
꽃가루에 취해
갈 길 잊은 놈도 있었겠지,
제 이름이 꿀벌이라는 것도.
그럼 날자,엉뚱한 하늘로 뛰어들어,
날자,없다 치부했던 날개를 펴고.
컷(cut)!
엉뚱한 하늘!
다른 무슨 생시가 어디 다시 기다리고 있었겠는가?
시집<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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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누가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다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시집 [三南에 내리는 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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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다시 부서지는 소리
뱃속에 책 가득 채우고 인간의 품에 안겨 들어와
탁자 위에 속 다 토해놓고
발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누런 종이 봉투 모르고 밟으니
그냥 종이 것이 아닌
그냥 비어진 것이 아닌
무언가 속이 부서지는 소리
이게 무슨 소리?
봉투 속을 조심히 부풀렸다가 다시 밟는다
파지직!
한번 찼던 속 다 비워지고
이젠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없는데
새로 부서지는 소리.
누군가 속을 다 내주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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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소
즐거운 편지를 쓸 때
이중섭이 세상을 뜨고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맨몸 게 하나가 맨몸 아이의 맨불알을
물고 늘어지다가 놓았다.
서귀포에서 일어난 철회색 바람이
서울 남산 언저리에서 불 다 스러지고
그의 소들만 살아서 흩어졌다
웃는지 우는지 이빨을 옆으로 드러낸 그의 소는
외산 화집 속에서 발로 땅을 박차던
피카소의 소들보다 얼마나 슬프던지.
그 무렵 신세계백화점 근처를 지나다 보면
저기 또 여기 거닐던
이중섭의 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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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만져지는 희망
간밤 눈에 소나무 큰 가지 부러져
창유리 반쯤까지 내려와
창을 열고 만져보니 솔잎
끝이 싱싱했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종지부가 너무 길었고
마지막 어디선가 플루튼지 피콜론지
사람 마음을 콕콕 찔렀다.
잡아당기니 이파리 아닌
큰 가지 전부가 떨어졌다
부러진 곳에는 진이 굳어 있었다
제 5번보다 간명히.
허튼 희망을 안 갖고 산다는게
얼마나 비감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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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과 몸 사이의 거리
언제까지나 나는 걸어야 하는가.
새들의 날개 뒤의 어두운 황혼,
그 황혼 속의 알맞은 돌아옴,
그 때까지 내 당신을 잊지 않음,
혹은 막막한 잊어버림,
그 깊이를......나는 들여다본다,
들여다본다,
깊이 없는 황당한 깊이를
나는 들여다본다.
꿈없이 걸으며,
원근법에서 막 해방된 세계를,
그 놀라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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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사랑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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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 황동규
내 찾아왔다, 밤바다
세상일이 온통 지우고 싶은 파일(file)일 때
세상 끄트머릴 지지는
물소리를 찾아왔다.
이 세상은 그저 숨쉬기엔 너무 갑갑한 곳
흐린 밤이면 섬도 어화(漁火)도 물소리 밖으로 나간다.
아줌마가 서비스로 썰어 논 소라 조각을 씹으며
밤 배 하나라도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비치 파라솔에 수직으로 매달린 전등이 안고 있는
동그란 원
그 바깥은 온통
쉬임없이 흔들리고, 한없이 크고 괴기하고 캄캄하다.
바깥으로 한 발 내딛는다.
공기가 진해진다.
모르는 새 세상 안팎이 삶 앞뒤로 바뀐다.
또 한 발 내딛는다.
밤 배 두 척 두런두런 말 나누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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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仁喆(1940~1993.1.20)
생명의 변호사 그리고 동행자
너 세상 떴다는 전화를
너 세상 떴다는 전화를 귀에서 쏟았다.
춘란이 시들고 있다.
벽에는 가볍게 마른 자주빛 장미가
종이처럼 마른 안개꽃에 싸여
고개와 두 팔 늘어뜨리고
허리 졸린 채
매달려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매달려 있다.
마시다 찻잔에 남겨둔 냉수가 마른다.
시간이, 그지, 시간이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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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도(濟扶島)에서 / 황동규
`이게 바답니까!`
황해 처음 만난 강릉산(産) 이익섭형이 내볕은 말.
허나 썰물에 안개 걷히며
저 뻘
여기저기 돋아나는 섬들 입파도(入波島) 도리도(挑李島) 육도(六島)
저뻘
갈매기 물떼새 걸어다니다 쉬고 쉬다 또 걸어다니고
사람들 조개 소라 찾아 자루 둘러메고
꼬챙이로 열심히 땅을 쪼으는
저 뻘 속으로
동해에서는 보지 못한 사람 하나가 나가고 있다
양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맨머리 바람에 날리며
빨리도 천천히도 아니게
저 봐! 섬과 섬 사이
빛의띠처럼 둘러친 저 바다 눈부신 한가운데를 향해
발걸음도 고르게
사람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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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 / 황동규
박명薄明의 구름장들이 빙빙 돌아간다
고통처럼 단순한 몇 포기 섬들이
갯벌에는 여인 서넛이
소주처럼 쓴 물결을 휘젓는 바람소리가
아 바람이, 하늘에선 박명의 구름장들이 빙빙 돌아간다
웅크리고 박혀 있는 몇 포기 섬들
갯벌에서 여인 서넛이
허리 구부릴 때 그네들에게 잡혀주는 몇 마리 게새끼가
매어 달리는 이 풍경
아 바람이,
짧은 해안선을 짧게 달구는
풀뭇불빛 같은 이 풍경
시집 -熱河日記열하일기 (지식산업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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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李白 주제에 의한 일곱 개의 변주곡 / 황동규
때절은 시름 씻어내며
띠 풀고 계속 술을 마시리로다
정다운 밤은 맑은 얘기를 낳고
환한 달은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하네.
취기 올라 빈 산에 누우니
하늘과 땅이 곧 이불과 베개.
滌蕩千古愁 留連百壺飮
良초(雨밑에 肖)淸談 皓月未能寢
醉來臥空山 天地卽衾枕
-<友人會宿>
1
소주와 안줏감을 들고
친구 몇과 사자산(獅子山) 속으로 들어간다.
가을 깊어 능선에는 단풍이 다 지고
적멸보궁 가는 길 양옆에는 오히려 단풍뿐이다.
보궁 앞에서 종이 술잔을 돌리노니
찬 술이 새지 않고 밥통에 듦이 고마워라.
2
운명이여, 그대가 만약 존재한다면,
이수교와 총신대 역 사이에서
차를 몰고 있는 나를 잠시 잊어다오.
잊어다오, 내 나이와 주민등록번호를.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잠시 음심에 빠져
남해(南海) 해변 달리듯 차를 몰고 있는 나를 잊어다오.
3
책장 속에 묻어두었던 꼬냑 병을 오랜만에 캐어내
마개를 조심히 비튼다.
가을 깊은 밤 성냥갑 아파트 속에
마른 성냥개비, 마른 성냥개비 확 타버릴!
술에게 한껏 심호흡시킨 후 그의 거처를
따뜻한 인간의 배로 옮겨준다.
4
마신 약수(藥水)들이 때로 속에서 부른다.
약수를 담았던 산들이 부른다.
예컨대 오대산은 골짜기마다 절이 들어 있고
절마다 목마른 곳에 약수 고여 있었네.
얼음 사이로 따뜻한 물 떠 마시며 몸 떨었노니
몸 식을 때 따뜻한 무엇 몸 속에 고이지 않으랴.
5
이즈음 조금 마시고도 취하니
한수(漢水)가에서 큰 돈 없이 살 수 있겠구나.
전엔 술의 힘 빌어 잠을 이루더니
이젠 술이 내 몸 속을 빌려 먼저 잠든다.
봄 저녁 짧아 텔레비 졸게 내버려두고
혼자 신명나게 눈감고 앉아 있는 날 늘어라.
6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는
간지럼 잘 타는 주목(朱木)이 살고 있고
경남 남해 용문사에는
입 셋 달린 삼혈포(三血砲)가
밥통 셋 다 비우고 살고 있다.
그 절 아랫마을에선
땅 속에 숨었던 다천(茶川) 석탑이 죽순처럼
막 땅 밖으로 나오고 있다.
세상 어디에도 영물(靈物) 살지 않는 곳 있으랴.
새벽빛 터지는 삼천포 어시장에선
숨죽이고 눈흘기는 이쁜 물고기들이
그대의 혼을 끌리.
7
구름 위로 달이 고개를 내밀다 얼굴 숨긴다.
달에게 하늘은 무엇일까, 별 듬성듬성 뜬 하늘?
미래의 달 인간 지구 빛에 잠 못 이룰 때 있을까?
잠 못 이루는 밤 있어 인간은 결국 인간으로 남지 않을까?
하현(下弦)달 멋대로 제 길 가게 내버려두고, 자 한잔,
그대와 나 붙박이 달처럼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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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3
-마종기에게 / 황동규
며칠 전 계속 세 번 어금니를 빼고
발치(拔齒)집게를 피해 세 밤 계속 꾼 꿈이
회현동집, 너왜 알지. 스물서너 해 전
이층 다다미방에서 소주병 굴리며
문학이 가볍냐 생(生)이 가볍냐
혹은 가을밤이 가볍냐 재보던 곳.
그 집 현관 앞 벽오동이 그 동안 크게 자라
이층 창 안을 들여다보며 웃고 서 있고
앞마당에는 과꽃 무리, 철이 철이라
마음 부시게 피어 있었지.
옛날에 금잔디 동산의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남산을 바라보며 오르는 골목길
제3터널이 뚫린 후에도 그대로 있군.
옛날 어느 하루처럼 목판 위에
감들이 탐스럽게 앉아 있는 가겟집
오른편으로 꺾어들며 옛날 어느 하루처럼 눈을 감고
곧 왼편, 스무 걸음 걷고 오른편으로 돌아
열 걸음 걷고 천천히 층계를 오르면,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누가 살고 있을까?
혹시 쌀쌀맞은 여자가 나와
주인 안계시니 다음에 오라고 하지나 않을까?
망아지만한 도사견이
문 뒤에 웅크리고 있지나 않을까?
층계 중간쯤에서 슬그머니 눈을 뜨며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스스로 물었지.
뭔가 이상한 느낌, 아 오동이 없어졌구나.
층계를 마저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며
문틈으로 마당을 훑었지.
과꽂도 사라지고
나무로 만든 큰 걸이대 몇 채가
이상한 것들을 잔뜪 건 채 서 있었어.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매기
문을 연 중년 사내는
이십여 년 전 옛주인을 향해 무표정하게
들어오라는 몸짓을 했지.
그리곤 일요일이라 공원들이 없는
빈 제화 공장을 보여주었어.
마당 가득 나무걸이대에 가죽들이 걸려 있었다.
아래층은 온통 구두들 차지
이층은 감히 구경도 못했다.
오 분 만에 재회를 끝내고
나오다가 문득 지난 생각 떠올라
앞 담장 밑을 구두 끝으로 파보았다.
무언가 예전에 묻긴 묻었는데
기억나지도, 파서 나오지도 않았다.
어금니 몇 뽑거나
마음의 광도(光度) 슬르머니 낮아진
옛 애인을 만나기 전에
우리 만난 모든것,
아침에 눈 비비며 나갔다
저녁에 한잔 생각하며 돌아오는 하늘가에
외로이 떠 있는 태양을 위해 쓴 몇 줄의 산문,
산문이 뒤틀렸다 풀리며 탄력을 받아
만들어진 몇 마디 시구(詩拘)들,
그것뿐이다 우리 지니고 갈 것은
버스를 태려 아파트로 돌아가는 마음 앞에
진홍 단풍으로 살아 있는 것은.
지금 우리는 다 늙어지고......
늙다니!
현관에 발 들여놓으려는 마음을
몸이 돌려세운다.
아파트 광장으로 쫓겨나온다.
단풍나무 가지에 수액이 선명하다.
황해와 동해가 한쪽 귀에 하나씩 소리 없이 출렁댄다.
그래 친구여, 오늘밤에는
큰 대얏물 같은 태평양을 뛰어 넘어가
"지저분하게" 너를 만나지 말고
혼자 놀다 되뛰어 넘어오는 꿈을 꾸리라.
~~~~~~~~~~~~~~~~
뜯기기 전 / 황동규
건너편 능선에 새 철탑들 줄지어 서고
석양이 새 전선에 걸려 멈칫거릴 때
등뒤로 언덕 넘어가는 불 끈 송전선
성긴 구절초들이 한 줄로 서서 전송하고 있다.
다복솔 사이에 서있는 두 팔 벌린 녹슨 송전탑
가까이 다가가도 아는 체를 않는다.
그래, 뜯기기 전 허수아비.
온갖 전기 몸살로 들끓던 몸
이따금 바람이 흘러와 눕고
새들이 와 발밑을 쪼고
그림자만 말없이 움직일 뿐
아무 일도 없다.
어느 새벽, 하늘 캄캄하고 눈 덮인 땅 외려 환할 때
길나서리,수그려 빛 받는 얼굴
어깨 위에 무등 태우고.
그래 뜯기기 전 허수아비.
시 전문 계간지 딩아돌하 창간호
~~~~~~~~~~~~~~~~~~~~~~~~~~~
가을날, 다행이다 / 황동규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 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찢겨져도 사라지기 어렵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눈 맞추고 헤어진 곳을 찾아보리라.
시전문 계간지 딩아돌하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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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움 / 황동규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꽃의 고요 / 문학과지성사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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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 만어사 물고기 바위들 / 황동규
차곡차곡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것도 아닌
혼자 사는 너럭바위도 아니고
언덕 아래로 함께 굴러내리는 몽돌들도 아닌
그런 삶을 본 적이 있는가?
한 골에 그냥 모여 살고 싶어서
모여 서로 몸 비비며 살고 싶어서
만어산9부 능선까지 만 마리 물고기가 기어오르다
저 멀리 낙동강 가을 물빛이 불렀던가
한번 모두 뒤돌아보아
소금기둥 대신 바위들이 되어
두드리면 생각난 듯, 잘들 있지? 종을 치고
두드리지 않으면 달개비 구절초와 함께 질펀히 살고.
일으켜 세우려 들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저도 몰래 주지(住持) 되어 만나고
다음 순간 손 털면 범종 소리
범종 소리.
2001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 중앙일보.문예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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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風葬) 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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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52
싸락눈 내리는 늦겨울 저녁
꽃도 병(病)도 없이
기계적으로 물 주며 잊고 살던 소심(素心)과
최근 들어서는 늘 곁에 놓아두고 두리번 찾던 시간을
( 내 안경 어디 있지?)
다시 만나리.
한번 만나고 나면 세상의 온갖 선(線)들이 시들해지는
부석사 무량수전 가벼이 살짝 쳐든 처마의 선을
받침기둥 하나와 수인사하고
서로 자리 슬쩍 바꿔
두 팔로 바치고 서 있으리.
싸락눈 맞으며.
마음엔 마음놓고 금가리.
[`94 현대문학상 상시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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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나는 나무들이 꽃을 잔뜩 피워 놓고
열매가 생기기를
우두커니 서서 기다린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벌이 잉잉거릴 때
꽃들은 먼발치서 달려 오는 벌을 맞으러
하나씩 문을 열 것이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마침 파고든 벌을 힘껏 껴안는
이 팽팽함!
배나무나 벚나무 上空에서
새들은 땅 위에서 환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잠시 天上과 地上을 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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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어렵게 살아야 1
이성복 시인이 물었다.
"시인은 끈질기게 어렵게 살아야 시인이 아닐까요?
보들레르, 랭보, 두보(杜甫)를 보세요."
어려운 삶!
일찍이 호머는 눈이 멀어
지중해를 온통 붉은 포도주로 채웠고,
굴원(屈原)은 노이로제에 시달리며
양자강을 온통 흑백으로 칠했다.
저 어려운 색깔들!
"시인은 끈질기게 어렵게 살아야......"
말 잠시 끊고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시야 한번 닫았다 여는 눈보라,
그 열림 속으로 새 하나가 맨발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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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어렵게 살아야 2 / 황동규
이백(李白)은 꿈속에 고향땅 밟다가
채석강가에 신발 벗어놓고
달빛 되어 물 속으로 사라지고
백여 년 뒤 최치원(崔致遠) 은 세상 온갖 구석 떠돌다
가야산 홍류동, 타오르는 단풍 속으로 증발했다.
바위 위에 신발 한 컬레.
호머도 굴원도 떠돌이 시인,
신발 성한 날 어디 있었으랴?
그들이 귀찮은 신발 벗어놓은 곳,
삶의 맨발에 뛰는
환한 실핏줄!
몰운대행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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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금으로 내리지르는 보이지 않는 세월의 빗줄기 / 황동규
단풍 가운데도
산벚단풍
남들 앞에 나서지 않는
단풍잎 하나
우연히 눈앞을 스치며
속을 보이려다 말고
숨죽이고 마지막까지 마른
혈관 채 보이려다 말고
날아간다.
그래 속 보이지 마라.
그냥 바람이 좋아, 라고 말해봐라.
삶이 헐거워졌어, 라고.
외계인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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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어느 날, 바보처럼 2 / 황동규
안동군 천등산 봉정사
오백 살 먹은 늙은 기와집들이
(칠백 살 넘은 극락전도)
돌계단 뒤뚱뒤뚱 올라가
축대 위에 의좋게 모여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래도 모여 사는 것이
흩어져 사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너무 바투 지어
고려 극락전 지붕과 조선 고금당 지붕이 겹쳐진 극락전 뜰에
아 가을 이구나, 하기도 전
천등산 낙엽이 온통 쏟아져 굴러올 때
여기 구르다 발에 밟히고
저기 날다 용케 발 피해 혈연(血緣) 밝히고 눕거나
끝까지 굴러가 마당 귀에 무더기로 쌓이는,
쌓여 잠시 몸을 숨겨주는,
바람 불면 무더기의 허리가 잘려,
반이 또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날아가는 곳 어딘지 통 보이지 않는 그런 가을날,
봉정사 뜰을 정신없이 걷다 보면,
바보처럼.
외계인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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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가을엔 이별의 앞차를 타리.
길 뚫려 미리 터미널에 나가
시간 안 찬 차 타듯.
길 양편에서 손짓하는 억새들을 지나
그 뒤를 멋대로 색칠한 단풍들을 지나
낯익은 도시의 바뀐 모습에 한눈 팔다가
광장 한구석 조그맣고 환한 과일 좌판 위에
낙엽 한 장으로, 혈맥(血脈) 한 장으로,
내리듯
과일에 닿기 직전
바람을 놓치고 한 번 맴돌며
왜 이곳에 왔나를 환히 잊듯
그렇게 살다 가리.
떠남의 한 모습.
미시령 큰바람 / 문학과지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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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린 사랑 노래 6 / 황동규
가을 들면서 잔 비가 뿌려도
무지개가 제대로 떠지지 않았습니다.
저녁 안개 가끔 낄 뿐
햇빛 속에서도
보이지 않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모르는 새 마음이 조금씩 식더군요.
지하철에서 석간을 읽고
읽던 기사 좌석에 놓은 채 일어서
마을버스를 타고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꽃가게의 꽃들이 웃고 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 ( 사람 살려!) )
몰운대행
화동규 시전집 2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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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도 벼과(科)지 / 황동규
바쁜 길 가다
막 건드린 도깨비바늘
온통 쏘여 마음 바쁠 때,
아 그게 국화과 식물이지,
(그 싸한 내음)
빙긋이 마음 풀었다.
그러고 보면
대나무도 벼과(科)지.
생김새 고향 달라도
우리는 얼마나 같은가!
얼마나 다르지 않는가!
마음속에 감춘 냄새까지도.
일에 밀려 정신없이 뛰다보면
사람과(科) 사람들과 허물없이 떼지어가고 있어,
사람냄새!
[몰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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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쓸하고 더딘 저녁
이제 컴퓨터 쓰레기통 비우듯
추억통 비울 때가 되었지만,
추억 어느 길목에서고
나보다 더 아끼는 사람 만나면 퍼뜩 정신 들곤 하던
슈베르트나 고흐
그들의 젊은 이마를
죽음의 탈 쓴 사자使者가 와서 어루만질 때
(저 빠개진 입 가득 붉은 웃음)
그들은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밀밭이 타오르고
밀밭 한가운데로 달려오는 마차가 타오르고
사람들의 성대聲帶가 타오를 때
그들은 왜 몸을 헤픈 웃음에 허술히 내주거나
몸을 피스톨 과녁으로 썼을까?
'왜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재빨리
빠져나가고 싶어했는가?
시장 인심이 사납던가,
악보나 캔버스가 너무 비좁던가?
아니면 쓸쓸하고 더딘
지척 빗소리가 먼 땅 끝 비처럼 들리는 저녁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던가?'
2004,현대문학,6월호
좋은시 20005 / 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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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유혹 / 황동규
난세에는 떠도는 것이 상책이다,
너는 말한다.
굴원을 보라 두보를 보라 랭보를 보라
문질러진 고향을 지니고 떠도는 자들,
그들의 눈의 물에
무수히 비치는 지평선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지평선도 있었어.
해들이 지지 않고 서쪽 하늘에서 계속 머물러 있는
저녁도 있었어.
너는 말한다.
나는 꿈꾼다
부풀어 빵처럼 부풀어 터지는 지평선을
지평선 터진 사이로 원무를 추는
원무를 추며 지평선을 꿰매는
서로 손잡은 무희들을.
황동규 시전집 1/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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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그 여자는 또 손을 반쯤 들고 서 있구나
햇빛이 잔잔한 속에
밀려 있는 하나의 파도와 같이.
햇빛은 얼마나 잔잔한 것일까
얼마나 고요한 것일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를 느끼게 하는 것일까
그 여자의 마음 속을 적시는 맑은 물결의 흐름을.
햇빛처럼 내리는 지난날의 이야기에
가느단 폭포처럼 쏟아지는 알 수 없는 속삭임에
그 여자는 지금 손을 적시는가.
바람은 머얼리서 또 가까이서 기웃거리며
지워주고 있는가
그 여자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모든 생각들을.
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 일까.
허나 우리는 안다, 그 여자가 손을 반쯤 들고 서 있는 것을
그리고 맵시 있게 모든 하고픈 말을 않고 있는 것을.
시선집 / 어떤 개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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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띄운 사랑노래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화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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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서귀포, `소라의 성`에서
건축가 김중업의 한때 소망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방 하나 있었으면!`
허름한 콘크리트 재료로
서귀포에 이 `소라의 성`을 쌓을 때쯤?
나중에 번듯한 방 가지게 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니 성 앞은 바로 바다,
성 쌓던 김중업보다 스므 해는 더 노회老獪한 몸으로 성벽에 나가
바다에 땅거미 자욱이 깔리는 것을 바라보노니
배 한 척 자리 뜨고
낮은 물결마저 잠들기 시작한다.
바람도 멎어 있다.
어느 날 모든 게 내리고 자리 뜨고 잠들고 멎고 할 때,
주위를 둘러보고 그는 되뇌지 않았을까,
`헌데 마음 놓고 울 마음은
도대체 어디 있지?`
겨울 하늘 한 구석에 그려 논
가물가물 실 달.
2004 제49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 피어라,석유!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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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를 깨트리다
책꽂이 옥상에서 책들 앞에 촘촘히 서서 살다가
책 뒤질 때 와르르 방바닥에 내리꽂힌 CD들
아 슈베르트 얼굴이나 이름이 적힌 판들.
이 한세상 살며 그래도 마음에 새길 것은
슈베르트,고흐와 함께 보낸 시간의 무늬들이라 생각하며
여태 견뎌왔는데.
껍질만 깨지지 않고 혹 속까지 상한 놈은 없는가
며칠 동안 깨진 슬픔을 하나씩 들어본다.
아니 슬픔이 아니라
슬픔마저 깨진 맑음이다.
이틀 만에 듣는 폴리니가 두드리는 마지막 소나타는
맑음이 소리의 물결을 군데군데 지워
몇 번이나 건너뛰며 간신히 흘러간다.
뛸 때마다 마음이 금가려다 간신히 멈춘다.
슈베르트여,몸 뒤척이지 말라.
가만히 둘러보면 인간은 기실
간신히 깨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시방 같은 봄 저녁
황혼이 어둠에 막 몸 들이밀기 전 어느 일순一瞬
홀린 듯 흐려진 눈 아니고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2004 제49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 피어라,석유!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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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항지 1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황동규 시선 / 三南에 내리는 눈 / 민음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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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편지
우리는 정신없이 이어 살았다.
생활의 등과 가슴을 수돗물에 풀고
버스에 기어오르고, 종점에 가면
어느덧 열매 거둔 과목의 폭이 지워지고
미물들의 울음 소리 들린다.
잎지는 나무의 품에 다가가서
손을 들어 없는 잎을 어루만진다.
갈 것은 가는구나.
가만히 있는 것도 가는구나.
마음의 앙금도 가는구나.
면도를 하고 약속 시간에 대고
막차를 타고 밤늦게 돌아온다.
밤 세수를 하고 거울 속에서
부서진 얼굴을 만지다 웃는다.
한번은 문빗장을 열어놓고 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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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고 싶었다
십오년 전인가 꿈 채 어슬어슬해지기 전
바다에서 업혀온 돌
속에 숨어 산 두 사람의 긴 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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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魔王)
1
마음속 악마가 속삭인다.
뒤돌아보지 마라.
뒤를 보이지 마라.
시간 됐다 , 출석부와 책을 끼고 곧장 강의실로.
서가에 다가가 다른 책을 뽑는다.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내가 만난 꽃들의 입술엔
모두 진이 묻어 있었고
내 혀 양옆 침 샘 속에도 진 흐르고 있었네.
그 꽃 향기 달았지 , 악마 몰래
핥던 핥던 꽃들의 속들.
2
악마가 속삭인다.
싸구려 술 마시지 마라,
진로 보해 금복주 경월 손대지 마라.
어제는 가짜 시바스 리갈 마시고
진짜 때보다 더 화끈한 경지에 들어갔었네.
동서남북을 구별 않고
지하철 3호선을 꺼꾸로 타고
밤중에 구파발로 달려갔었네.
북한산 뒷모습이 안개 속에 잘 보이지 않아
봄밤 속을 우주 헤매듯이 헤집고 다녔네.
3
여의도 FM 방송국엔 지금 장대비 쏟아진다고?
연구실 밖은 그냥 흐린 하늘.
FM 끄고 마음잡아도
악마가 오지 않네.
전화번호르르 잊었는가,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옳거니, 그 물래 산에 들어가
작디작은 기차게 아기자기한
( 침 고인다)
냉이꽃 벼룩이자리꽃들과 만나 놀고 올까.
산자락에 채 들어서기 전
퍼뜩 누군가 나를 부른다.
아 내 악마!
순간 내가 강의실 쪽으로 몸을 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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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빗소리
물방울 하나하나가 꽃에 잎에 인간의 몸에
그리고 저희끼리 몸 부딪쳐 만드는 소리 아닌,
땅 위에 뒹굴며 내는 소리 아닌,
서로 간격 두고 말없이 내려와
그냥 땅 위에 떨어져 잦아드는 저 빗소리.
그 소리 마냥 어두워 동공(瞳孔)이 저절로 넓어진다.
나무들의 뿌리들이 보인다,
서로 얽히지 못하고
외로이 박혀 있는 뿌리의 떨림도.
내 잘못한 일, 약게 산 일의
밋밋한 뿌리들도 보인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푸덕이고 날아간다.
마음 바닥에 잦아드는 저 빗소리.
시간이 졸아드는 소리.
황동규 시전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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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끓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
몰운대행(沒雲臺行)
1
사람 피해 사람 속에서 혼자 서울에 남아
호프에 나가 젊은이들 속에 박혀 생맥주나 축내고
더위에 녹아내리는 추억들 위로
간신히 차양을 치다 말고
문득 생각한 것이 바로 무반주(無伴奏) 떠돌이.
폐광지대까지 설마 관관객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길들의 고요.
지도를 펴놓고 붉은 볼펜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치고
방학에도 계속 나가던 연구실 문에 자물쇠 채우고
다음날 새벽 해뜨기 전 길을 나선다.
2
영월 청령포를 조심히 피해 31번 국도를 탄다.
상동 칠랑에서 국도를 버리고
비포장 지방도로로 올라선다.
중석 걸러낸 크롬 옐로우 물이
길 옆 시내 가득 흘러오고
저단 기어를 넣은 "프레스토"가
프레스토로 떤다.
차 고장 없기만을 길의 신(神)에 빌며
망초꽃이 모여선 길섶을 지나
아다지오로
덤프트럭 자국 깊이 파인 언덕을 오른다.
길의 신이 급커브를 약간 풀어놓으며
아슬아슬한 낭떠러지를 보여준다.
크롬 옐로우가 꿈결처럼 몸을 바꿔
흑인 영가로 흐르기 시작한다.
흑인 영가의 어두운 음을 끼고
에어콘 끄고도 헐떡이는 차를 천천히 몰아
온갖 생물학이 모여 썩고 있는 쓰레기 낟가리를 돈다.
아! 폐광 하나가 검은 입을 벌리고 비탈에 박혀 있다.
입술 위로 너와지붕이 튀어나오고
그 위엔 다듬지 않은 풀들이
수염처럼 자라고 있다.
빠지고 남은 이빨처럼 녹슨 쇠기둥 두 개가 박혀 있고
녹슨 밀차 한 대가 굴 밖으로 나오려다 말고
뒤틀린 선로 위에 심드렁하게 서 있다.
들이밀면 머리부터 씹힐 것 같아
목을 움츠리고 슬쩍 몸을 들이민다.
귀가 먹먹
아 사람 사라진 사람 냄새!
천장에서 물 한 방울이
정확히 머리 위에 떨어진다.
3
고개가 가파르다.
자장율사가 진신사리 봉안했다는 정암사 가는 길
그도 헐떡이며 넘었으리라.
앵앵대는 소형차를 길가에 그냥 내버리고 싶다.
가만, 자장이며 의상(義湘) 같은 쟁쟁한 거물들이
경주, 황룡사, 부석사를 버리고
왜 강원도 산속을 방황했을까?
왜 자장은 강원도 산골에서 세상을 떴을까?
입적지(入寂地) 미상의 의상도
강원도 산골의 행려병자가 아니었을까,
이곳 어디쯤에서?
가파른 언덕을 왈칵 오르자
해발 1280m의 만항재.
태백시 영월군 정선군이 서로 머리 맞댄 곳.
자글자글대는 엔진을 끄고 차를 내려 내려다보면
소나무와 전나무의 물결
가문비나무의 물결
사이사이로 비포장도로의 순살결.
저 날것,
도는 군침!
황룡사 9층탑과 63빌딩이
골짜기 저 밑에 처박혀 보이지 않는다.
바람 없이도 마음이 온통 시원하다.
잠시 목숨 잊고 험한 길 한번 마음놓고 차를 채찍질해
황룡사, 63빌딩, 정암사를 순식간에 지나서
정선 쪽으로 차를 몬다.
4
화암약수터 호텔 여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제철인 데다 버섯 재배농가 회의로
정선군 모든 방이 다 찼지요.
몰운대 저녁노을이나 보시고
밤도와 영월이나 평창으로 나가시죠."
표고버섯죽 한 그릇 비우고
길을 나선다.
선선하고 기이한 뼝대
저녁빛을 받아 얼굴들이 환했따.
그 위에 환한 구름이 펼쳐진 길
그 끝을 향해.
5
몰운대는 꽃가루 하나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엿보이는 그런 고요한 절벽이었습니다. 그 끝에서 저녁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앉아 있었습니다.
새가 하나 날다가 고개 돌려 수상타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모기들이 이따금씩 쿡쿡 침을 놓았습니다.
(날것이니 침을 놓지!)
온몸이 젖어 앉아 있었습니다.
도무지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
초여름의 꿈
간 겨울 눈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가
생시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꿈
깬다.
초여름에 겨울 꿈을 꾸다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진짜 꿈은 다 개꿈이라지만,
꿈의 출구에 삶의 입구 표지를 붙일 수는 없다.
새벽길 나서니 길섶 홍건히 젖어 있고
먼동 트는 하늘에는 금빛 별 무리
땅에는 은빛 별꽃 무리
별꽃, 석죽과의 막내 꽃,
별빛 한 줄기 줄기는 별꽃잎의 하트형이라고
초여름 새벽이 일러준다.
지금 뛰는 가슴도 하트형이다.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삶의 이마에 뜰 때까지,
삶의 출구가 꿈의 입구로 열릴 때까지.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아니면 또 어떠리.
이 세상 어디엔가 꽃이 눈뜨고 있는 길이면,
초여름 새벽을 가라.
~~~~~~~~~~~~~~
땅 속을 흐르는 강이여
땅 속을 흐르는 강이여,
앞에 단 얼굴만 다른 여러 꿈의 근원이여,
흘러가는 모든 것의 뵈지 않는 깊이여!
나는 언덕에 앉아
그대가 언덕에 오르려다 채 오르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되내려가
마을을 몇 바퀴 돌며 숨 고르고
연(蓮) 하나 촉 내민 못도 돌고
이윽고 방향 되틀어
언덕을 향해 달려오는 걸 본다.
초여름과 여름 사이
시퍼런 창(槍)들로 몸 꾸민 엉겅퀴만 피어 있다.
마지막 몇 뼘을 채 못 오르고
그대 다시 되지쳐 내려간다.
땅 속에 흘러내리는 성호(聖號) 그림자,
마을을 돌고 되달려 오르는 기호(記 ) 그림자,
위아래서 엉겅퀴들이 서로 창 끝을 겨눌 뻔 했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 문학과지성사
~~~~~~~~~~~~~~~~~~~~
기억이 지워지면
새벽에 깨어 헤아려보면
뇌의 한 자리가 또 비어 있다
썰물 빠진 뻘같이
태풍 놀다 간 논같이.
물 빠진 개펄을 씻어내는 저 새벽빛.
기억 지워진 자리에
물감을 뿌리리
잭슨 폴록이 거나하게 취해 걸으며
듬뿍 적신 솔로 신나게 뿌린
우연의 물감을.
솔에서 떠나면서도 인연 채 끊지 못해
긴 줄 멈칫멈칫 그리는 지옥도 만들고,
점 하나 잘못 떨어져
일순 황홀한 천국도 되는,
무지개 채 지워지지 않은
눈물 방울
싱그럽게.
~~~~~~~~~~
詩人
고기를 잡지 않는 어부가 살았다.
바다가 그의 귓전에 늘 머물러 있었다.
온 세상에 꾸중들은 아이들만 보이는
어둡고 고요한 저녁이면
바닷속이 환히 뒤집어지기도 하였다.
어둡던 골짜기가 밝아지고
쌍쌍이 속삭이며
헤엄쳐 오는 물고기들
허리에 오색 구슬 두른 놈도 있었다.
꼬리에 뽀오얀 등을 단 놈도
섬들이 긴 숨 들이키고
가라앉기도 하였다.
모든 강의 밑바닥 바다에 닿듯이
마음줄 모두 내린 어부가 살았다.
아꼈어,그래 참 환했어.
추억 속에 나란히 헤엄친 물고기에겐 듯
만나는 사람에게 두 손 내민다.
온 세상에 꾸중들은 아이들만 보이는
어둡고 고요한 저녁이면.
~~~~~~~~~~~~~~~~~~~~~~
봄날은 간다
배가 속력을 늦춘다
제부도 앞바다 봄날 해질녁
꽃불
바람섬 승봉섬 이작섬 벌섬 동백섬
앞에 떠도는 꽃불 서로 먼저 건지려다
옆 섬에게 자리 내주며 한 발 물러서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결 한껏 성글어 진다
인간들이 저리 정답게 노는 광경 본 게 언제지?
빗물 얼룩진 유리 훔치듯
눈을 훔치면
수평선이 섬들 사이로 홍옥끈처럼 흘러 들어와
섬의 허리들을 가볍게 맨다
자 허리의 끈을 당겨라!
학처럼 날기 시작하는 섬들
쿵쿵대는 바다의 심장 박동
이 순간만은
신의 눈길과 인간의 눈길 가르기 힘들리.
눈길 서로 헷갈릴까
인간의 눈을 잠시 시야 밖으로 밀어놓는다.
문학과 지성사 / 우연에 기댈때도 있었다 / 황동규
~~~~~~~~~~~~~~~~~
대설(大雪)의 날
-故(고) 김현에게
겨울하고도 흐린 날
눈도 제대로 내리지 않고
눈송이 몇 공중에 날려놓고 바람만 불다 말다 하는 날
이 식은 지구 껍질에 미열(微熱)이나마 심을 것은
그래도 버섯구름이 아니라
알맞게 거냉(去冷)한 술 한 잔이라면
오늘 양평 네 잠들어 있는 곳에 가
찬 소주 대신
가슴에 품고 온 인간 체온의 청주 한 잔 땅에 붓노니
그 땅이 네 무덤이건
우리 자주 들른 `반포 치킨`이건
그냥 지나쳐버린 어슬어슬 산천이건
작정한 듯 검푸른 하늘
바람이 눈송이 하나 무덤 위에 띄어 놓고
술 방금 받는 부운 위(胃)처럼 한번 부르르 몸을 떤다.
시집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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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장승업의 활물도(活物圖)
세상살이 끓는 죽 먹는 것 같을 때면
속절없이 세잔의 정물 앞에 서곤 했으나,
금시 방바닥에 쏟아져 구르고 터지기 직전
식탁보에 몸 붙이고 있는 사과 오렌지 물병을 마주 보며
뜨거운 죽 눈감고 삼키곤 했으나,
아 일월(日月)의 먼지!
이제는 혀도 닳고
목구멍 데게 하던 죽도 설핏 식었으니
장승업의 빛 바랜 한지(韓紙) 활물도(活物圖) 구석에
슬며시 게로 기어 들어가
그냥 편히 놀고 있는 붓이랑 벼루랑 아직 살아 있는 조개랑
며칠씩 계속 싹 트고 있는 겨울 무랑
어렵지 않게 함께 뒹굴며 나머지 날을 날까.
내일인가 모렌가
하늘에 나무에 집에 바람 속에
생사람 못살게 굴 봄빛 터질 때
잽싸게 살고 싶어하는 것 다 밖으로 내보내고
게마저 나가고 싶어한다면 집게발 들려 내보내고
어느 날 문득 생각나 털이개로 먼지 털듯 목숨을 털면
목숨 한 장 붙어살던
몸의 진면목 비로소 나타날까.
시집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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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行
- 故 金正岡을 위하여
이제 죽은 者를 경애하지 말고
죽은 者의 죽음을 생각하라
무성한 잎은 잠자는 나무의 꿈이요
꿈 속의 한 안씨로움이로다
내 꿈많은 날의 地上의 윤곽을 아노니
地圖 지닌 者들의 잠든 얼굴이요
눈에 오는 소금기
지극히 가까운 자의 목마름이로다
친구여, 죽음과 생시 둘다 사랑할 수는 없노니
허리 위의 잠
오늘도 거리엔 말없이 燈불 켜지고
허리 위의 잠
내 그토록 잠든 사내를 사랑하므로
나는 때로 잠자는 법을 잊는다
~~~~~~~~~~~~~~~~~~~~~~~
집보다는 길에서
집에서보다는
길에서 가고 싶다.
톨스토이처럼 한겨울 오후 여든 두 살 몸에 베낭메고
양편에 침엽수들 눈을 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눈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 기차역에 나가겠다가 아니라
마지막 쑥부쟁이 얼굴 몇 남은 길섶,
아치형으로 허리 휘어 흐르는 강물
가을이 아무리 깊어도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뼝대
그 앞에 멎어 있는 어슬어슬한 세상.
어슬어슬. 아 이게 시간의 속마음!
예수도 미륵도 매운탕집도 없는 시간속을
캄캄해질 때까지 마녕 걸어.
~~~~~~~~~~~~~~~~~~~~~
다시 마르는 이파리
어느 가을바람 불 때
외로움 감별사 자리 내주고
참새도 쑥부쟁이도 하루살이도 그냥 살고 있는 곳에
살게 해다오.
달포 전 윤선도 고택 마루에 기어다니던 왕지네도 계속 기고
차 앞 유리를 빛살처럼 환히 때리던 부나비도 날고 있는 곳에
살게 해다오.
술맛 감별사 심연섭이 혀 암으로 가듯이
외로움 감별사 자리마저 내주고
외로움의 진면목을
살게 해다오.
그저 낙엽이 아닌, 공중에 뜬 채
온몸으로 바람 쏘여
새로 다시 한번 마르는 이파리로.
~~~~~~~~~~~~~~~~
日記 / 황동규
하루종일 눈. 소리없이 전화 끊김. 마음놓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음.
길 건너편 집의 낮불, 함박눈 속에 켜 있는 불, 대낮에 집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불, 가지런히 불타는 처마. 그 위에 내리다 말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눈송이도 있었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나비채를 휘두르며 불길을 잡았음. 불자동차는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달려옴. 이하 생략.
늦저녁에도 눈. 방 세 개의 문 모두 열어놓고 생각에잠김. 이하 생략.
"혼자 있어도 좋다"를 "행복했다"로 잘못 씀.
~~~~~~~~~~~~~~~~~~~
피 / 황동규
'그린 스위트’ 한 알을 넣으면 아침 커피가 너무 달아
면도날로 알갱이들을 반쪽씩 쪼개고 있었다.
“건강 되게 좋아하시네” 하고
면도날의 마음이 한번 삐끗했는지
왼손 검지에 칼날이 꽂혔다.
흐르는 피를 닦으며 나는
꽃병에서 시드는 꽃을 보았다.
며칠 동안 물을 갈아주지 못했군.
왜 나는 바쁘게만 살지?
손가락으로 꽉 누르니 피는 멈추고
그곳 감각이 아기자기해진다.
그냥 멈추기만 해서 될까?
별로 깨끗지 못한 몸 어둠 속에서 피가
머리에서 배로 배에서 사타구니로
사타구니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발바닥으로
발바닥에서 다시 멍청해진 머리로
계속 맴돌다 이따금
밖으로 나가보고 싶지 않을까?
아침 대야를 확 물들이는 코피
때로 눈에서 터지는 실핏줄……
손가락을 뗀다. / 피가 길을 묻는 듯이 우물쭈물하며
그러나 되돌아서는 일이 없이 흘러나온다.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노라면 }
‘나’라는 생명도 어둡게 맴돌던 삶에서
한번 슬쩍 겁없이 벗어나보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출구를 순색(純色)으로 물들이고
삶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
흙, 혹은 시멘트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소리없이) 철썩!
저녁 약속한 친구가 벌써 불현듯 그리워진다
'미시령 큰 바람 .1993.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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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의 풍경
눈 멎은 길 위에 떨어지는 저녁 해
문 닫은 집들 사이에 내 나타난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살고 깨닫고
그리고 남몰래 웃는 것이 많이 있다.
그리곤 텅 비인 마음이 올거냐.
텅 비어 아무데고 이끌리지 않을거냐
우는 산하, 울지 않는 사나이,
이 또한 무연(無緣)한 고백이아닐 거냐.
개인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스산한 바람소리
뻘밭을 기어다니는 바다의 소리,
내 홀로 서서 그 소리를 듣는다.
내 진실로 生을 사랑했던가, 아닐건가
~~~~~~~~~~~~~~~~~~~
세 개의 정적
1
열 평의 마당
나머지는 외부다.
가을날
미물이 모두 떠난 집의 고요 한편에
목숨을 사각의 대문에 달고
남은 목숨은 마루 위에 굴려놓고
잘 익은 박과 도르래 우물을 뒤뜰에 두고
오래 더 놓임을 잊고 살아간다.
마당에는 은행나무가 바람에 잡혀
조심스런 첫 잎을 떨구고 있었다.
2
저녁 무렵
우물물을 길어 올린다.
오래 길들인 높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
길들인 깊이에서 삐꺽이는 소리.
나를 포기한 친구를 생각해 본다.
추억이 포기되지 않았구나,
울타리 안에 문득 확대되는 조망
두레박에 가득 차는 빛
보인다, 정신의 床 위에 단념이,
황금빛 물을 다시 깊이 떨어뜨린다.
3
열 평의 마당
풍로 위에서 물이 아프게 끓는다.
찻종에 반쯤 따른다.
얼굴에 감기는 김의 뜨겁고 흰 머리카락
짧은 온기 속에 몸을 맡기고
창 밖을 내다본다.
진눈깨비 친 길이 언덕 위에 눕고
행인이 가고 있다 가고 있다.
낯 모르는 그와 화해한다, 오래오래,
개인 하늘에 한 마리 새가 한없이 날고 있다.
~~~~~~~~~~~~~~~~~~
버클리 시편 4
사람에게 온전 고독은 주어지지 않는다.
일부러 잘 간수한 마지막 우표 넣어둔 곳 잊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아파트 온통 뒤지고
내일 아침 부칠 편지 하루 미뤄야 할 때,
전화 벨을 울려야 할 친구에게서
끝내 소식이 없을 때
(그도 바쁠 테지
또 전화 걸면 독촉),
거실의 불빛 반으로 낮추고
샌프란시스코 하행선이 막히는
80번 도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때,
FM에서 흐르는 모짜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저 슬픈 바이올린.
뉘 알았으리
외로움과 슬픔이 이처럼 가까운 이웃!
마음과 음악이 만나 같이 여울지며 흘러가다
이윽고 잔잔해질 때
전화 벨이 울린다.
잘못 걸려온 전화.
수화기 속 사내의 사과 말
지금까지 들은 그 누구의 사과보다도 부드럽고 달다.
가만!
여권 속에 안전하게 끼어둔 우표를 찾아낸다.
외로움이 홀연 홀로움으로......
시집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
~~~~~~~~~~~
김수영(金洙暎) 무덤
빗소리에도 바람이 부는지
풀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가지가 흔들리고
이 악물고 그대가 흔들리고
마지막으로 풀들이 흔들린다.
뿌리 뽑힌 것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뿌리는 뽑히지 않도록
흔들리자
~~~~~~~~~~~~~~~~~~~
탁족(濯足)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슴슴한 곳
강원도 늦겨울 텅 빈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푸른 옷 바꿔 입을 때
흔들어 봐도 흔들어 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 보면
그새 면허증 신분증 카드 전화수첩 명함 휴대폰
내지 않은 교통 범칙금 고지서
너무 많이 끼고 다녔다는 생각 절로 든다.
시냇가에 앉아 바지 걷고 구두와 양말 벗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선약 없이 문득문득 화끈하게 만난
찌르듯이 아팠던
문신(文身)!
~~~~~~~~~~~~~~~
어떤 은유
이제 무얼 더 안다 하랴.
저 맑은 어스름 속으로 막 지워지려 하는
무릎이 안개에 걸려 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저 조그만 간이역(簡易驛),
안개 밖으로 잘못 얼굴 내민 코스모스 몇 송이
들켜서 공중에 떠 있다.
한 줄기 철길이 숨죽이고 있다.
아 이 찰나 이 윤곽, 어떤 추억도 끼여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윤곽 모서리가 순간 예민해지고
눈 한번 감았다 뜨자
아 가벼운 지워짐!
이 가벼움을 나는 어떤 은유,
내 삶보다 더 X레어 선명한,
삶의 그릇 맑게 부신, 신선한 물음으로
받아들인다.
시집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2000
~~~~~~~~~~~~~~~~~
걷다가 사라지고 싶은 곳
오늘 우연히 지도 뒤지다가 기억 속에 되살아난
소광리(召光里)길
봉화에서 불영계곡 가다가
삼근(三斤) 십리 전 왼편으로 꺾어 올라가는 길
잡목 속에 적송들이 숨어 숨쉬는 곳.
차 버리고 걸으면
냇물과 길이 서로 말 삼가며 만드는
손바닥 반만한 절터 하나도 용납 않는 엄격한 풍경.
자꾸 걸으면 길은 끝나지 않고
골짜기와 냇물만 남는다.
고목 덩이 같은 쏙독새 한 마리
한걸음 앞서 불현듯
새가 되어 날아갈 뿐.('울진 소광리 길')
~~~~~~~~~~~~~~~~~~~~~~~~~
바다로 가는 자전거들
1
어둠이 다르게 덮여오는군요. 요샌 어둡지 않아도 오늘처럼 어둡습니다.
이젠 더 자라지 않겠어요. 마음먹은 조롱박 덩굴이 스스로 마르는 창엔 이
상한 빛이 가득 끼어 있습니다. 그 빛 속에서 동네집들이 모두 언덕으로
기어오릅니다. 이상한 빛이 되어 기어오릅니다. 언덕 위에서는 어깨 높은
일단(一團)의 집들이 줄지어 길을 막고 있습니다. 길이 없군요. 없습니다.
한점씩 불을 켠 채 언덕을 오르는 아이들. 자 문들을 나서 아이들의 길을
걸어보실까요. 아이들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쓰러집니다. 우리들이 휘청대다
넘어집니다. 모든 것이 너무 가벼워져서 가슴속에 몰아가는 바퀴들과 공기를
밀어 넣는 펌프가 보입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2
모두 넘어지고도
날이 저물지 않았어요.
언 빨래들이 묵묵히
매달려 있었어요.
빨랫줄에는 놀란 듯 한두 점
흰 눈이 묻어 있었어요.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그렇게 조그맣게
묻어 있었어요.
《여보세요, 당신은 바다를 보셨나요?
《여보세요, 나는 개를 향해 짖었어요.
《여보세요, 바다로 가는 길엔 아직 자전거가 달리고 있습니까?
《여보세요, 요새는 짖는 개도 물어요.
3
또 비탈? 눈 자갈이 튀고 그가 쓰러지고 나도 쓰러졌다. 자전거는 밭에 들
어가 돌고 있었다. 수수 그루터기마다 한모금씩 한모금씩 눈이 녹고 있었다.
그를 일으켜세우며 나는 바다 냄새를 맡았다. 그의 흰 옷엔 피가 배어 있었
다. 어떤 꽃무늬보다도 눈이 부신, 허리에 크게 번지는 꽃. 또 비탈! 자갈
이 튀고 우리는 다시 쓰러졌다. 그가 나를 일으켜주었다. 내 옷에도 피가 배
었다. 신기했다. 내 몸에서도 바다 냄새가 났다. 우리 자전거는 나란히 달렸
다. 서로 살필 필요 없이.
~~~~~~~~~~~~~~~~~~~
지붕에 오르기
나이 들며 신경이 멀어지는 것은
즐거운 일
고통은 삐걱거리는 마루처럼
디딜 때만 소리를 낸다.
수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출근하려고 구두를 신을 때
목수들이 신나게 초인종을 누른다.
버스 정류장 옆에 그 소년이 없다.
목발 짚고 일간스포츠 곁에 붙어 서 있던 아이
대신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가 앉아 있다.
없으면 없을수록 마음 가볍지
난 예수가 아냐
로마 병정도 아니고
예루살렘 대학에서 아랍어를 가르치고
별들이 무사한 것을 보고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지도 않고
내가 만만하게 차서 발이 아플
돌멩이는 없었어.
돌아오는 길에는
10층 창 위에서 유리 닦는 사내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어.
저녁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빛나는 창, 그 많은 창 하나에 매달려
전혀 빛나지 않게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어.
목수들이 파업만 했더라도
예수를 십자가에 달지 못했을 텐데.
목수들은 하루종일 마루를 고치고
나머지 목재로 사다리를 만들었다.
발을 굴러도 마루가 삐걱대지 않는다.
소리가 더 깊이 들어갔을까
더 깊은 데, 우리가 자갈처럼 가라앉아
더 이상 남이 될 수 없는데.
사다리 둘 곳을 찾다가
이사온 후 처음으로
슬라브 지붕에 올라간다.
각목이 모자라 두 칸은 베니어를 겹으로 붙여
내 가벼운 무게도 모르고 마구 떤다.
떨림이 멎지 않는다 동남쪽으로
모래내 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묘사 덜 된 소설처럼 그러나
신기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지붕과
굴뚝을 달고 집들이
모여 있고 헤어져 있다 어스름이
내린다 손이 흔들린다 어디선가
낙엽 한 장이 날려와 흔들리는 손에
잡힌다 메말라붙은 신경이
선명하게 보이는,
신경이 모두 보이는 이 밝음!
공포, 생살의 비침, 이 가을 한 저녁.
~~~~~~~~~~~~~~~~~~~
마크 로스코*의 비밀 -k에게
마크 로스코의 비밀 하나를
오늘 거제 비치호텔 베란다에서 건졌다.
이른 봄 새벽 어둡게 흔들리는 바다와
빛 막 비집고 들어오는 하늘 사이에
딱이 어떤 색깔이라 짚을 수 없는
깊고 환하고 죽음 같고 영문 모를 환생(還生)같은
저 금,
지구가 자신의 첫 바다 쩍 추억을 반죽해 발라논
첫 바다 쩍 추억을 발라논
금,
점차 가늘어져 그저 수평선이 될 뻔한
저 금.
2002,제47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 현대문학
*마크 로스코:러시아 출신의 미국 표현주의 화가.그는 주
로 사변형 두 개를 캔버스 위아래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우리가 때로 '종교
적'이라고 부르는 한없이 깊고 그윽한 금[線]의 공간을 만들곤 했다.
~~~~~~~~~~~~~~~~
얕은 잠
얕은 술 마시고 잠들면
얕은 잠에 들지만
이제는 얕은 잠마저 거(巨)하다.
온갖 슬픔이 다 모여드는
살면서 잘못 식탁 밑에 떨군 숟가락까지 보이는
깊은 꿈은 슬프다.
오늘은 벌써 12월 15일 영하 8도의 아침
베란다의 꽃들은 오래 전에 다 지고
한 구석 볼품없는 화분에
크기 3X5판 사진 속 딸기꽃 하나로 축소된
새끼손톱만한 이름 모를 하얀 풀꽃 한 송이가
아랫 줄기를 모두 말리고
숨기운만 반 뼘 파랗게 남긴 채 피어 있다.
이 한 송이만큼의 잠이면 흡족하다.
이제 꽃받침까지 바싹 말라오리.
얕은 꿈, 얕은 슬픔, 숨기운마저 밑동까지 마르면
고개 숙인 수술들을 일으켜세워
오래 연 맺었던 뿌리와
초면(初面)으로 만나리.
~~~~~~~~~~~~~~~~~~~~~~~
겨울에서 봄으로
겨울 편지
어제 오후 큰눈이 내려
포구의 길이 모두 지워졌습니다
새벽녘에는 뒷산 눈이 몰래 마을로 내려와
담장을 부숴 길을 내기도 했습니다.
짧은 방파제 안에 배 몇 척 모여 떨고 있을 뿐
앞 언덕의 전나무도 소나무도 오리나무도
다 숨어버렸습니다.
당신도 삶의 흰색 속에 숨곤 했지요.
동서남북이 온통 흰빛일 때
국도를 달리던 승용차 하나가
눈에 밀려 포구로 들어와 감히 바다에 뛰어들진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축대 위에 정지했습니다.
갑자기 따악 소리가 나고
흰눈 속에서 소나무 하나가 거짓말처럼 나타나
기괴한 몸짓으로 자신의
눈 뒤집어쓴 팔 하나를 부러뜨렸습니다.
봄 편지
살과 친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고
오늘은 머리 위가 온통 다른 색깔입니다.
남보라에 따뜻이 베이지를 푼 하늘이
수평선까지 넘실대고 있습니다.
아낙들이 건지는 해초들도
가만히 못 있고 몸들을 뒤척이고
방파제를 나서는 통통배도
가볍게 둥싯거리는 품이
허리춤이 되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과장은 삼가겠습니다.
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고기들이 한눈 팔며 나다니는 바다를 끼고
혼자 방파제를 마음놓고 왔다갔다 하겠습니다.
되돌아온 편지
고장난 부표 등대를 끌고
통통배가 헤엄쳐 들어왔습니다.
버스가 들어왔다 나가며
마을을 온통 흙탕칠해놓았습니다.
버스 편에 당신 편지가 떨구어졌군요.
건성으로 읽고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건성으로 읽었습니다.
이제 아주 숨으시겠다고요?
혹 성공하신다면
내 마음속 어디엔가 숨으시지 않겠어요?
주막 밖으로 나가니 어둠 속에서
그물 널린 방파제에 배가 살짝 살짝
그러나 잘못 부딪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안 부친 편지
새벽 뜰을 쓸다보니
참새 한 마리가 얼어 죽었군요.
그처럼 가벼울 수 없었습니다.
입다물고 눈 꼭 감고
두 발 오므리고
가볍게 잠든 것 같았습니다.
마당 한켠에서는 대들이 파랗게 얼어
바람도 없이 한참 떨었습니다.
다시 봄 편지
쌓아놓고 읽지 못한 책도 많겠지만
오래 소리 없던 대숲에 새들이 드나드는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봄은 좀 많습니까?
X레이 찍을 때만 가슴 펴본 봄은 또 얼마겠습니까?
진단카드 들고 공연히 마음죄인 봄은?
가슴 못 편 사람끼리 모아 찍을 때
당신과 내가 나란히 X레이 필름 속에 나타난다면?
새들이 날읍니다.
한 새가 이상한 몸짓 하며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땅 위에선 새 한 마리가
고개 갸웃대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이 젖어 있군요.
오랜 만에 삽을 들고
옆집 청년이 돈사 자리잡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한참 파던 그의 괭이에 무슨 흰 것이 닿았습니다.
반듯이 누운 사람의 뼈군요.
가슴 언저리가 가장 복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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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零下)의 베란다에 양란 피다
누구에게 속삭일까
이 부끄러움.
한란으로 알고 베란다에 내어논 양란
다른 풀들 속에 숨어 있다가
눈감고 동상 걸려 웅크리고 떨다가
오늘 영하의 베란다에서 엉거주춤 고개 들고
꽃을 피웠다
난 분 가슴에 안고
아파트 속을 뜻밖에 서성이며,
생각 속을 더듬어본다.
내 기르던 것 가운데
자리 잘못 받아 떨며 사는 것은 없나
혹시 피 흘리는 것은?
베란다 속 영하에 마음놓고 얼지도 못하고.
마음을 얼리지 못하고
마음을
우리 인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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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 뒤 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 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 한번 날으는 길 위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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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노래
미소
너의 집 밖에서 나무들이 우는 것을 바라본다.
얼은 두 볼로 불 없이 누워 있는
너의 마음 가에 바람소리 바람소리.
내 너를 부르거든
어두운 뒤꼍으로 나가
한겨울의 팡팡한 얼음장을 보여다오.
보라, 내 얼굴에서 네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네 말없이 고개를 쳐들 때
하나의 미소가 너의 얼굴에, 하나의 겨울이 너의 얼굴에.
아는가
그 얼은 얼굴의 미소를 지울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가.
불
나보다도 더 겨울을 바라보는 자여,
목 위에 타오르는
얼굴을 달고
막막히 한겨울을
바라보는 자여,
무모한 사랑이 섞여 있는
그런 노래를 우린 부르자.
언젠가 오 우리 여기 있다, 대답하고
얻은 우리의 일생에 우린 올라서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바람소리 바람소리
그 속에 서 있는 우리는
손잡고 조용히 취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되어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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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게 한마리의 걸음마처럼
끝간데 없는 갯벌 위를 걷습니다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문득 손톱만한 게 한 마리
휙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쩐지 그 게 한 마리의 걸음마가
바닷물을 기다리는
갯벌의 마음처럼 느껴집니다
그 마음 그토록 허허롭고 고요하기에
푸른 물살, 온통 그 품에
억장 무너지듯 안기고 마는 걸까요
아아 바닷물처럼 출렁이는 당신이여
난 게 한 마리 지날 수 없는
꽉찬 그리움으로
그대를 담으려 했습니다
그대 밀물로 밀려올 줄 알았습니다
텅텅 빈 갯벌 위, 난 지금
한 마리 작은 게처럼 고요히 걸어갑니다
이것이,
내 그리움의 첫 걸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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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부엌 창턱에 올려놓고 이 년 간 즐기던 조그만 장미 분을
햇빛 더 받으며 살아보라고 베란다에 내놓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잔디와 더위에 말라붙었다.
들여다보니 눈에 감겨 있었다.
가지를 몽땅 자르고,
-저 사지(四肢)의 절단
잘린 면을 물들이던 진-
다시 부엌 창턱에 올려놓고,
링거 주듯이 찔끔찔끔 물을 주자
이틀 만에 새끼손톱 잎 세 개가 돋았다.
다음날엔 여섯 개가 삐죽했다.
바다와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또 헤어지는 맛 때문에
포구마다 들어오는 몸 얹고 싶은 배들 때문에
꽃인 듯 냄새인 듯 흐르는 잎인 듯
밤꽃 속에 편안히 서 있는 집들 때문에,
아 이건 두 시간 전에 만난 집
그런데 뭐가 다르지?
저 햇빛 받는 창!
하루종일 강화를 방황하다 돌아왔다.
물을 마시려고 켠 부엌 전깃불 속에
아직 음지 쪽은 덜 자랐지만,
전 모습 거의 회복한 장미.
사지 잘릴 때 엉기던 진, 그 아픔, 그 희미해지던 의식,
지금 이 줄기 속 어디에 각인되어 있는가?
혹은 눈물처럼 증발해 천천히
잊을 맛으로 새 삶에 혀를 내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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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낙조
'서쪽으로 간다'는 서양말로 죽는다는 뜻이고
오늘 태안 앞 바다 낙조(落照)는
갈매기 한 무리를 물 위로 날리며
바다 위에 출렁이는 붉은 카펫을 깔았다.
죽으면 그 위를 걸어
곧장 서쪽으로 가라는 뜻이겠지.
카펫 한껏 넓고 황홀히 출렁여
정신없으리.
어쩌면 제대로 걷지 못하고
도중에 멍하니 서 있으리.
해가 지고도 한참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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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취
1
수술실에 실려 갈 때는 모든 것을 두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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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처 카에 실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또 복도를 지나 몇 번 꺾어져 문을 들어가
수술대에 옮겨 뉘어지고
괴석(怪石)처럼 우뚝 선 마취과 의사에게
다시는 깨어나지 못해도 좋다는 선서를 하고
(좋고 안 좋은 걸 그때 어떻게 알지?)
마스크를 해 눈만 보이는 간호사가
입에서 의치를 뽑아낸다.
2
나는 모래바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곳 저곳 불려다니던
모래바람이었다.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자 불리고 날리고 하기를 좋아했다.
때로 사람들 속에 나도 모르게 일어나
그들의 눈을 맵게도 했다.
외로울 때면
공터에 며칠씩
재처럼 뿌려져 있기도 했다.
지금은 바야흐로 사방에 아무도 없는 때
솔솔 소리내며 날려다닐까
그냥 수술대 위에 뿌려져 있을까.
3
마취 직전
나는 간신히 용서라는 말을 생각했다.
머리 약간 들어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삭막한 기계와 등불
마스크한 사람들.
앞 공간 속에서
간호사가 마스크 위로 눈을 한 번 꿈쩍했다.
얼굴에 무엇이 뒤집어씌워졌다.
갑자기 용서받은 기분!
메고 다니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4
그 어둡지도 환하지도 중간도 아닌
그 동서남북이 없는
전후좌우 없고 위아래도 없는
길도 없고
그 어디 칠 북도 없는
나 자신도 없는
네 시간 반의
그 설맹(雪盲) 보행을
아무리 해도 다시 걸을 수가 없다.
내 체험을 체험할 수가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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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돌아보지 마라
매달려 있는 것은 그대뿐이 아니다.
나무들이 모두 손들고 있다.
놓아도 잡고 있는 이 손
목마름,
서편에 잠시 눈구름 환하고
목마름,
12월 어느 짧은 날
서로 보이지 않는
불 켜기 전 어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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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기러기
슬퍼하지만은 않았다
북한강 상류
사방에 눈 몰린 산
그 너머를 향한 야포의 행렬을.
들기러기 날아 내렸다.
잠자고 깨고 불현듯 없는 꿈
꿈의 자리에 올려진 포대경.
들기러기 흩어져 사는
다섯 달 겨울
사면에서 깃 높이 펴고
살 부비며 떠는 들기러기들
탄대 안의 무서운 조망
보고 울고 웃다 기합받았다.
포신 높이 쳐든
155밀리 포의 구애 자세를
없는 지도를
전생애로 꿈꾸고 꿈꾸었었다.
군번도 동상도 생명도 잊고
겁 없이 기다리고 기다렸었다.
《三南에 내리는 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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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그만 가을날
이제 아무도 살고 있지않은 집은 없다.
마음의 집을 팔고
아직 거느려보지 못한 책들도 팔고
빈 봉우리 하나쯤 사고 싶다.
잔뿌리 덮인 저녁하늘 한편에는
해가 굴러가고
나머지에선
온통 바람이 분다.
사적으로 분다.
두 눈이 지워진 돌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딸애는 자꾸 고마 귀신이라 부르지만
바람 속에 자세히 보면
내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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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上의 양식
토요일 오후
혼자 있을 때만이라도
한번 다르게 살아보려고
나하고도 달리 살아보려고
주말이라 주차장이 비어
일부러 아파트 제일 먼 곳에 차를 세우고
걸었다.
한 동(棟) 화단에 영산홍들이 때맞춰 환하게 피어
너무 피어 시드는 기색 있는 놈을 막 지나자
어째 이리 됐지?
반으로 깨어져 속이 드러난 ‘우는 벤자민’ 분
빛나는 잎 멀쩡한 줄기 밑에
뿌리가 서로 감고 얽고 눌러
큰 뱀에 조여 울부짖는 삼부자(三父子) 조각(彫刻) 라오콘!
바티칸 박물관 한 귀퉁이 비틀린 공기
저 고통의 기호(記號),
잎새 빛나는 저 나무마다 그 기호 하나씩 흙 속에 숨기고 있다면!
고통 없는 곳은 혹시 이 지상(地上)이 아닐지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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