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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그의 친구들은 안식일에 굳이 왜 밀 이삭을 잘랐나
예수는 왜 내일이 아니라 오늘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을까
<굳이 오늘>
1. 안식의 날을 만든 다정한 신
성서를 읽다보면, 성서 속 이야기들을 입으로 입으로 옮겼을 사람들이 궁금해집니다. 그들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잠자리에 누운 아이가 “엄마, 엄마도 엄마가 있어?”라고 물을 때 엄마는 아이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듯 이야기를 했겠죠. “그럼, 엄마도 엄마가 있어. 엄마의 엄마도 엄마가 있고,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 엄마가 있고. 그렇게 엄마의 엄마들 위에는, 그 처음에는 하느님이 계셔.” 엄마는 무슨 마음으로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 아이는 어떻게 자라서 자신의 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을까. 얼굴도 모르는 그들을 떠올려보면 애틋해집니다.
찢겨진 타이맛의 살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저 도자기를 빚듯 흙으로 빚어서 숨을 불어넣고 ‘보기 좋다’라고 말한 신을 상상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귀엽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로를 죽이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자’ 궁리하는 신을 상상한 사람들. 저는 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아마 그 애정이 하느님에 대한 애정으로 흘러갔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자 하는 하느님이 태초에 천지를 지으시고, 생명들을 만드시고, 그러고 나서 무엇을 하셨죠? 안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해보셨나요? 하느님에게 안식이 어떤 의미였을까? 엿새동안 일을 하시고 하느님께서 지치신 걸까요? 성서에 보면, “하느님이 지치셔서 하루는 쉬자 하셨다.” 이런 말씀은 없으십니다. 다만, “하느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이렛날에 하느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느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안식’은 지쳐 나가 떨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다 만든 것을 두고 ‘좋다’ 말하는 감탄의 순간, 경이의 순간, 감사의 순간이었을 겁니다.
무언가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이 기분을 모를 리 없습니다. 하다못해- 제가 집사님들 생일을 맞이하면 축하 그림을 그리잖아요. 그림을 다 그리면, 그림을 멀찍이 떨어져 찬찬히 살피며 저는 혼자 이런 말을 되뇌입니다. “제법인데? 괜찮은데?” 그리고 바라죠. 이 그림을 받은 사람이 기쁘면 좋겠다고요. 그림 한 장에도 이럴진대 세상을 만들고나면 그 감탄과 경이, 감사의 순간이 하루가 꼬박 걸리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주며 이 안식의 날을 지키라고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건 어쩌면 자부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희도 앞만 보고 달리지말고 한 박자 쉬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감탄해라” 하신 게 아닐까요. 앞만 보고 달리면 주위를 둘러볼 새가 없으니까요. 나는 무엇 하나 헛으로 지은 게 없어. 네가 보고 기뻐하면 좋겠어. 하늘에는 해가 있고 구름이 있고 새가 있어. 새의 쉴 곳이 되는 나무가 있고, 나무의 쉴 곳이 되는 너른 땅이 있고, 너는 나무에 기대서 한 숨 자도 좋아. 때가 되면 달이 뜨고, 별이 빛날 거야. 그 빛이 너를 외롭지 않게 할 거야. 하느님은 이런 말들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치여서 이 좋은 것들을 잊지 말라고요. 저에게 있어 안식일은 참 다정하신 하느님을 느끼게 합니다.
2. 안식일의 변천
그런데 안식일 계명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 의미가 조금 변화했습니다. 경이의 날이었던 안식일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사회적 압력과 법적 제재에 따라 이 악물고 지켜야 하는 민족적 자존심 같은 것이 된 것인데요. 1세기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은 유대민족을 구별하는 지표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의 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교인 그리스 종교를 모든 사람에게 따르도록 하였는데 그때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 했던 것이 안식일과 할례, 음식 규정과 성전 제사를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이후로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을 나타내는 민족적 표지가 되었고, 정체성을 지키기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더욱 더 촘촘하고 세밀하게 준수하도록 다른 사항들을 덧붙인 것이지요.
저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만은,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주일이 곧 안식일이다는 개념을 가지시고, 주일에는 노동은 물론이고 식당에서 돈을 내고 밥을 먹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하셨던 분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서 안식일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면 그 당시 저희교회 목사님은 자신은 주일날에 버스도 타면 안되는 줄 알고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하시곤 했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 규정을 촘촘히 했던 것과 정확히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주일 성수와 관련된 어떤 강박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분투정도로 읽어낼 수 있을 듯합니다.
여하간에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애초에 하느님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굉장히 중요한 날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하셨는가’가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어 읽은 성서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3. 굳이 화를 일으키는 예수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과 계속해서 척을 집니다. 2장 초반부에 예수님이 중풍병 환자를 고치시며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자 율법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요.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할까?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은 한 분 밖에 없을진대,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바로 말씀하셨죠. “어찌하여 그런 생각들을 하십니까?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를 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하고 걸어가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말하기 쉽습니까?”하고 바로 대꾸를 하시지요. 그 다음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자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어찌 죄인들과 어울려 밥을 먹느냐며 또 한마디를 합니다. 예수는 그 말에 한 번을지지 않으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죠. 그 다음 절은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금식을 하고 있을 때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있어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묻자 예수는 “잔칫날에 금식을 할 수 있느냐”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한다”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2장에서는 오늘 우리가 나누어 읽은 안식일 논쟁 이전에도 사사건건 율법학자들과 부딪치는 일들이 가득합니다. 예수는 굳이 굳이 왜 화를 부르는 걸까요? 사람들의 신경을 살살 긁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니까, “예수와 그의 친구들은 안식일에 굳이 왜 밀 이삭을 잘랐나”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왜 내일이 아니라 오늘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을까”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어라 답하실 수 있나요?
4.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제가 종종 듣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왜 사서 고생을 하냐” 굳이 안 해도 되는 짓을 골라서 굳이 굳이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사실 어려서부터 저는 이 질문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일은 다 굳이 하는 거 아닌가. 왜 내가 하는 일만 굳이 하냐고 물어? 다들 뭐 하나 해도 굳이 하는 건데.’ 그렇지 않나요?
세상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굳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 오늘 소개해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어제 있었던 서울 퀴어문화축제의 일입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트레일러)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비롯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어우러져 즐기는 장을 마련하는 것”을 비전으로 삼아 매해 서울에서 열리는 복합, 공개 문화행사입니다. 주요행사로는 서울퀴어퍼레이드, 퀴어영화제 등이 있으며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로 구성된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주관하는 행사이죠.
어제 열렸던 서울퀴어퍼레이드는 성소수자의 가시화, 인권증진, 문화향유, 자긍심 고취를 위해서 매년 도시 한복판을 무대로 열리는 행사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수 많은 도시에서 열리는 프라이드 퍼레이드와 궤를 같이 합니다.
저는 2년 전에 졸업여행으로 호주 시드니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에 다녀왔었는데요. “마디그라”라는 이름의 행사였습니다. 이 축제에 시작은 1978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스톤월 항쟁을 시작으로 한 연대의 행진이었습니다. -스톤월 항쟁은 뉴욕 주점이었던 스톤월인에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성소수자로 의심되는 손님들을 난폭하게 검문하고 체포했던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발발했던 항쟁이었습니다- 여하간에 이 일을 계기로 전세계에서 성소수자 탄압에 항거하는 행진이 일어나게 된 것이지요. 호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78년 6월 24일 시드니를 중심으로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거리 행진을 하였고 시드니 경찰은 거리 행진을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체포된 사람만 53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집으로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경찰의 부당한 폭력에 항의 했습니다. 시위와 행진은 3개월 동안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178명의 활동가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날을 이후로 매년 이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축제가 열리고 있는 것이고요.
마디그라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시드니에 도착했을 때 시드니가 온통 무지개 세상이었습니다. 시청에 무지개 깃발이 걸려있고, 시립 미술관, 도서관, 시내에 있는 대학에서는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여러 전시와 공연이 연일 이어졌고요. 횡단보도도 무지개, 길거리 우체통도 무지개, 집집마다 무지개 깃발이 내걸려 있어서 처음에는 신기해서 카메라를 들었다가도 나중에는 지긋지긋해져서 더 무엇을 찍지도 않았습니다.
행진이 시작되고, 도로 한가운데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많은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유니콘 머리띠를 쓴 어린이, 집에서 손수 피켓을 만들어 온 사람, 휠체어를 타고 무지개 손 깃발을 흔드는 할머니, 행진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아저씨, 집 베란다에 커다란 무지개 깃발을 걸고 행진 대오에 손을 흔드는 동네 사람들,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웃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신기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남의 나라’같았거든요. 제가 이제껏 퀴어문화축제에서 봤던 풍경들은 이런 것, 이런 것, 이런 것이었으니까요. 영상도 하나 볼까요? 뉴스앤조이에서 퀴어문화축제 방해 10년 잔혹사라는 이름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그 티저영상입니다.
(뉴스앤조이 영상)
영상에서 보셨다시피 보수 개신교 진영의 성소수자 혐오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언제쯤 방해를 받지 않고 축제를 즐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은 ‘우리는 언제쯤 방해를 하지 않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퀴어문화축제의 참가자들에게 “그러게 왜 나와서 욕을 사서 먹느냐”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니들이 그런 건 알겠으니까 굳이 기어 나오지 말고, 안 보이는 데서 니들끼리 잘 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말은 공식 석상에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2021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안철수 후보는 서울광장에서 퀴어축제가 열리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던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를 하면서 차라리 ‘퀴어특구’를 만드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소수자들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특정 지역에 묶어두고 살게 하자는 발언이었지요.
이 ‘굳이 기어 나오지 말고’라는 말 말입니다. 이 말과 함께 앞전에 제가 드렸던 질문. “왜 예수는 굳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랐을까?” “왜 굳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셨을까?” 하는 질문들과 함께 놓고 봅시다. 이 ‘굳이’라는 질문이 여러분께 어떻게 들리시는지 궁금합니다.
예수가 그의 친구들과 안식일에 굳이 밀 이삭을 자른 이유는 특별히 없습니다. 밀 이삭을 먹기 위해서였죠. 예수가 안식일에 굳이 사람을 고치신 이유는 놀랍게도 특별히 없습니다. 그가 아팠고 예수는 그것을 보았고, 예수는 자신의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논란은 누가 만들고 있습니까? 예수입니까?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보려고 예수의 행동을 살피던 사람들이 논란을 만든 것입니다.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셨다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그의 분노와 그의 탄식은 사람들이 안식일이라는 날이 무엇인지 감도 못 잡고 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안식일은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이 세상을 둘러보시고 기뻐한 날이었으니까요. 하느님이 사람을 빚으시고 얼마나 좋다 말씀하셨습니까.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라 하신 것은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하느님이 우리를 빚으신 순간을 기억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날에 누군가 주린 배를 채우고, 아픈 이를 낫게 했다면 좋은 일이죠. 이 날을 안식일 답게 보낸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식일의 의미를 잊은 채 현상만을 보고 손가락질 하기 바쁜 겁니다.
예수는 굳이 화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화를 자초한 것은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동료시민들이 “왜 굳이 화를 부르느냐”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역할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안식일을 안식일 답게 보내십시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세요. 주위를 둘러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굳이 찾아서 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굳이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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