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실록 (귀양길 전전하던 조선시대 관료들)
사극을 보면 정쟁이나 역모에 연루돼 의금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양반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의금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던 이들은 거의 사약을 받던가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 유배길의 뒷이야기가 오늘의 주제이다. “전 하!. 호조참의 김 도진이 수한 대군의 사저를 자주 드나들었다 하옵니다. 이는 필시 분경(奔競)일 공산이 크오니 엄히 치죄 하시옵소서!.” “무엇이라?. 당장 김 도진을 잡아 들여라!.” 호조 참의 김 도진은 그길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게 된다.
여기서 분경이라 함은 권력자 옆에 붙어 인사 청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분경 금지법까지 만들어 인사 청탁을 엄히 금 했었다. “김 도진이 분경한 것을 순순히 인정 하였습니다.” “고얀 놈,…. 형조 판서 이런 경우 어찌 처단 하여야 겠소?.” “에또,... 그러니까 이런 경우엔 원지에 유배하는 것이 좋을 거 같사옵니다.” “그래?. 그럼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해 김 도진을 도성에서 3000리 밖으로 유배 보내라!.” 자,... 문제는 이때부터인데 조선 시대에는 형법이 없었다.
경국 대전이나 속 대전을 보면 민법에 관한건 있어도 형법에 관한건 없는데, 그건 명나라의 대명률을 그대로 가져와 쓰면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은 그 사이즈 부터가 다르지 않았던가?. “아따, 임금님도 너무하시네 3천리 밖이 어디여 3천리 밖이!.” “아따, 이사람 그럼 어쩌란 말이여?. 임금님도 3천리 보내고 싶어 보내는 줄 알어?.
대명률에는 그렇게 밖에 안 나왔는디 어쩌란 말이여?.
자 봐봐, 유배길 종류는 2000리, 2500리, 3000리 딱 3개 밖에 없잖여.
좋네!. 귀양길 3종세트...” “그러니까 답답하단 소리잖여, 조선땅이 만리가 돼, 2만리가 돼?.
중국이나 되니까 3천리 밖으로 보내버리지. 난쟁이 콧구멍 같은 나라에서 어떻게 3천리를 찍어?.” “이 사람이 일단 충청도까지 쭉 내려와 와서 공주찍지?. 공주찍고 다시 경기도 와서 그길로 평안도로 가.
평안도 평양찍고 그대로 함경도로 내달려 가서 길주 찍으면 대충 3천리 나온다니까. 궁하면 다 통하는 겨. 그래도 임금님 가오가 있지 3천리 보내라는데 나라가 작아서 3천리를 못간다 그러면 월매나 존심 상하시겄어?.
우리가 대충 맞춰드리자고,...” (세종대왕 시절 이 귀양길 3종세트는 한국적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2000리는 600리로, 2500리는 750리로, 3000리는 900리로 조정하게 된다.)
의금부 서리와 나장들이 귀양길 코스를 점검하는 동안 유배길을 떠나게 될 김도진은 조용히 유배길 갈 준비를 하는데, “여보 마누라, 이번에 가면 좀 길거 같거든?. 나 갈때 동안 집안 건사 잘하고 있어.” “알겠어요. 그런데 꼭 유배를 가긴 가야해요?.” “이 사람이 당신은 조폭도 몰라?.
조폭들도 클려면 전부 빵에 한번씩 들어갔다 나와야 돼.
지금 조정에 유배 한번 안 갔다온 사람이 있는 줄 알아?. 내시들 빼고는 다 유배 갔다 왔어.
두고 봐 나도 조만간 클테니까,...
아 그리고 속전(贖錢)은 준비했지?.” “가계 경제도 어려운데 그냥 몸으로 때우면 안 될까요?.” “이 사람이 누굴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곤장 100대를 어떻게 맞아! 잔말 말고 속전이나 준비해 둬!.” 유배형에 장100대를 선고받은 김 도진은 장100대는 벌금으로 때우고(이걸 ‘속전’이라 한다.) 홀가분하게 유배길을 떠나는데,
북쪽끝 길주에 도착하게 된 김 도진 자신이 거처해야 할 방을 보게 되는데, 그 동안의 유배길이 고단했는지 김도진 대뜸 밥을 요구한다. “어이구 배고파 돌아가시겄다. 여기 밥좀 내와.” 김 도진 앞에 떡하니 차려진 밥상,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조와 보리가 섞여있는 밥에 간장 한종지, 백 김치와 고사리 나물이 고작이었다. “이 사람들이 나보고 지금 이걸 먹으라고 내놓는거야?. 나 김도진이야, 김도진.
한양에서 호조 참의하던 김 도진이라니까!. 솔직히 고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게 뭐니 이게?. 고사리가 남자 정력 죽이는 음식이라는 거 알아 몰라?. 내 나이 아직 한참인 30대인데 이거 먹고 어쩌라고?.” “나으리, 낸들 어쩌라는 겁니까?. 원님이 이렇게 내주라고 해서,...” “원님 어딨어 원님!. 내 이 녀석을,...
기껏 길주 땅에서 수령짓이나 하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아니 저기,... 나으리는 몸통이 아니라 깃털이라고 대충 밥이나 한술 뜨게 해주면 된다고,...” “언놈이야?. 언놈이 나보고 깃털이라고 그랬어?. 이거 왜이래 나 이래뵈두 한양에서 잘 나갔다니까!.
누구야, 누가 나보고 깃털이라고 했어!. 당장 누군지 안불어?.” 김 도진이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를 했으나 김 도진의 처우는 거기서 더 나아지지 않았으니, 당시 귀양을 온 전직 관리들은 그 지역 관리들의 통제와 보살핌을 받게 된다.
문제는 이 관리가 다시 서울로 올라갈수 있는 실세일 경우에는 그 대우가 괜찮았지만, 별볼일 없는 깃털이란 판단이 서면 꼭 ‘깃털’대우만 받는 것이었다.
귀양 생활에도 몸통과 깃털의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몸통인 경우엔 구치소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이나 한국이나 나라의 이름만 바뀌었지, 그 돌아가는 꼴은 거기서 거기란 생각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이다.
= 받은 글 편집 =
漢陽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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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요소리와 조선 왕조 실록글을 읽으면서 머물다 가네요 지금생활이 개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