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여러분,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경전을 읽다보면, 여러 경전 속에서 보석과 같은 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평소 막연하게 갖던 의문이 사라지며, 구름이 걷히듯 시야가 환해집니다. 그 기쁨은 말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그런 경일수록 이름도 없는, 그저 지나치기 쉬운 짧은 경전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경전을 펼치고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읽어나갈 때 이런 경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잘 알려진 경전은 다시 읽는다 해도, 기존 해석이 앞을 가려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말씀을 드리는 <관찰의 경>은 비록 짧지만, 제게 큰 기쁨을 준 경입니다. 무엇보다 이 경을 읽으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다음은 경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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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의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 때 마침 세존께서는 자신에게 무수한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품성)들이 버려지고, 무수한 착하고 건전한
원리(품성)들이 닦여져 원만하게 되는 것을 관찰하고 계셨다.
3.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 뜻을 파악하시고 때맞춰 이와 같은 감흥어린 시구를 읊었다.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면,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 우다나(전재성 역) 6-3 <관찰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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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의 경>을 읽어보면, 숲에서 선정에 든 부처님은 바로 당신의 내면에서 무수하게 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성품들이 버려지고, 무수하게 많은 착하고 건전한 성품들이 닦여져 원만하게 되고 있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이어 부처님은 탐욕과 분노 등 마음속 무명(無明)은 점차 사라지고, 이제껏 없었던 선한 성품이 일어나 점차 원만하게 되면 내 마음속 악한 성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흥어린 시구(우다나)를 읊었습니다.
저는 <관찰의 경>을 읽으며, 무엇보다 제자들이 어떻게 부처님의 내면을 알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 이렇게 자기의 교주의 내면을 이처럼 무수히 많은 악한 성품이 줄어들고, 착한 성품이 닦여져 새로 채워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 밑에서 고요히 선정에 드신 부처님을 본 제자라면 스승의 내면을 신비화하거나 혹은 절대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종교마다 자기의 스승이나 교주를 초인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칫 스승에 대한 허구를 만들기 쉽습니다. 어떤 스승은 스스로 자신의 수행을 극적으로 꾸미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허구나 위선은 결국 나중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주위에서 스승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나 환상 때문에 자신의 삶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관찰의 경>은 이미 있었던 악한 성품이 점차 사라지고, 선한 성품이 생겨나 점차 성숙해지는 부처님당신의 내면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렇게 당신의 내면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자들이 부처님의 내면을 알 수 있었으며, 나아가 이런 경전을 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경을 읽을 때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내면을 제자들에게 진솔하게 말해주는 광경을 상상해봅니다.
<관찰의 경>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처님의 내면세계가 진솔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위적인 모습이나 초월적인 어떤 신화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나 후세의 수행자에게 이만큼 깊은 위로와 용기를 주는 가르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관찰의 경>은 불교의 깨달음은 현학적인 사변의 세계도 아니요, 초월적인 신통의 세계도 아님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내면은 생로병사가 무상하며 그 속에 내가 없음(無我)을 깨달아 고요해진 해탈의 경지이지만, 아울러 인간 본래의 무명(無明)이 줄어들고, 선한 성품이 늘어나는 것을 스스로 관찰하는 성찰의 세계입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