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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안에 존재한 시적인 것들
-윤석진의 《내 시간의 풍경》,이은봉의 《생활》 중심으로
<시인. 평론가> 박철영
1. 시간의 층위들
시가 갖는 정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일상이다. 일상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포함한다. 그 모든 것들 속에 시간이 존재한다. 시의 세계에 포섭된 시간의 언어는 시인이 체험한 대상과 밀접하다. 일상에 대한 사유를 시의 세계로 인식하여 재현하는 것처럼 사람마다 결과는 다양하게 표출된다. 모든 결과로 나타난 삶을 생애라고 한다. 시가 갖는 속성만큼이나 분절되어 나타나는 사람들의 생애는 다양하며 현재를 통해 시간의 수렴을 압축으로 보여준다. 시는 일반적 삶을 매개로 하되 내면을 통해 형상화된 개별적 시 세계를 통합적으로 재현한다. 이쯤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시적인 것으로 전화되는 과정은 무엇일까 질문하게 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처럼 사물로 마주친 대상은 전복을 거듭하다 시의 세계로 모습을 드러낸다.
시를 말하지 않아도 잊힌 과거 속 풍경을 추억하며 우리는 그런 심정적 이미지를 심상과 더해 서정이라 한다. 그 일상이 이미지에 멈춰있을 때 문학의 범주 바깥에 있는 의미만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시의 세계로 규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복잡한 사회 현상을 흐름에 비추어 볼 때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문학을 통해 삶의 주체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은 세상이니 그렇다, 그럴수록 심화되는 사회관계가 망라된 일상은 내면이라는 포장 속에 깊숙이 가려져 있다. 이미 예정되어 있고 앞으로도 반복될 일상은 문학으로 변주를 거듭해 갈 것은 자명하다.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가는 일상을 가리켜 뻔한 상투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 시인의 관점 이전 현시대를 살아가는 부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연(사회) 질서를 배우며 성찰로 변화를 모색해왔음을 안다. 시인이 추구하는 문학적 토양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긍정과 부정까지도 범주에서 빠질 수 없는 시의 세계로 포용하고 있다. 상당한 시간이 점적漸積된 시적 자아의 출현이 광주라는 시간의 층위에서 이루어졌다. 생존 행위인 일상이라는 공간 안에서 시의 유력한 관계를 형성한다. 전반적으로 그 시간을 공유한 층위와 간극은 다를지라도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이은봉 시인과 윤석진 시인의 시집을 공감해보는 행운을 맞았다. 우연한 기회가 유용하고 긍정적인 시간으로 환기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적인 것의 담론을 시작하려 한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두 분에 대한 평론은 아주 부분적인 것으로 전부를 말하기에는 지식의 한계를 갖고 있음도 전제하고 싶다.
2. 욕망과 공공성에 대한 인식
먼저 윤석진 시인은 문학을 결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수단, 곧 미학적 자의로 남용하지 않았다. 치열하게 구축해온 시 정신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실재 속에서 끝없이 자기 주체성을 확인하며, 글 쓰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의 연삭硏削을 통해, 삶과 유리遊離되어 있는 문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과로 볼 때 더욱 상투적이지 않은 시인의 삶이 시집 속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흔한 시집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우리는 시인만의 상징화된 언어의 결합을 통해 일상을 초월하는 상상력의 시편들에 사심 없이 다가가야 한다.
윤석진 시인의 늦깎이 첫 시집 출간이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이유다. 사실 윤석진 시인은 삼십 대 초반 92년 신춘을 통해 시에 입문하였다. 이미 80년대부터 혈기 넘친 문청의 시간을 겪어왔고, 그러다 육십갑자를 앞두고서야 수줍게 내놓은 시집 《내 시간의 풍경》(시와 사람)은 세상의 시선으로 볼 때 예상 밖의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윤석진 시인이 보낸 각고의 세월 속에는 시간의 분절로 대신할 수 없던 고통의 80년대 광주의 시간들이 옹이처럼 박혀있다. <시인의 말>에서 스스로도 “오랫동안 내 시간의 풍경은 적막했다”며 결코 이후의 삶도 광주의 시간처럼 순탄치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것마저 말의 겸사임을 알 수 있다. 윤석진 시인의 ‘시간’이란 과거 세월 속에는 과연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토록 오매불망한 시의 세계는 현실과는 매우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세상과 불편해질 때마다 시인은 ‘시’가 던지는 화두를 안고 고민했을 것이다. 시의 세계 속에 함의해야만 하는 인식의 상투성을 벗어던지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삶의 일상을 과감하게 전복하고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을 시詩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공성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는 현실을 초월해선 그 무엇도 이하도 아님을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며 확인해간다.
저기, 저 비행하는 새들을 보아라
저들이 대열을 이루는 것은
외로워서가 아니다
길을 몰라서도 아니다
함께 했던 고단한 수만 리의 시간들
저들은 몸으로 기억한다
기나긴 여로, 같은 운명을
선두를 다투지 않는
누가 낙오하는 것도 원치 않는
저 새들, 날아가다 지치면
맨 뒤로 자리 바꿔 동료들이 만든
상승기류에 날개를 얹는다
천적이 나타나면 제 살길 찾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더 견고하게 대열을 짓는
천년만년 한가지로 변함이 없는
더 빨리, 더 오래,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저들의 비행
보아라, 내 사랑이여
-<동행> 전문
지상을 박차고 하늘을 비행하는 새들이 인간의 눈으로 봐서 간단한 행위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새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연에서의 생존 법칙은 인간이 외면한 ‘사랑’을 우직하게 실천하는 데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관계에서 스스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불필요한 관념으로 봉인해버렸지만, 새들은 공존을 위한 실존의 방편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저들이 대열을 이루는 것은/ 외로워서가 아니다/ 길을 몰라서도 아니다”라는 공동체의 상생 행위가 훨씬 우위에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들의 비행 방법에서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공공의 덕목을 우위로 본 사회관계론적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윤석진 시집 맨 첫머리 시로 선정한 <동행>의 의미는 언어의 일반성을 초과한 상상력으로 깊이 공감해볼 이유가 있다. 시인의 가슴에 오랫동안 도사린 말들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누군가에 닿아야 할 사랑이었음을 알게 한다. 모든 것들이 현대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불편한 것들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갖는 신체 구조 속에 신경 조직을 유지해주는 물질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에는 서정抒情이라는 골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쪽동백꽃>은 인간이 갖는 관계 단절의 의미와 숙명처럼 반복되는 그리움을 찾아가는 정신적 귀소 의지를 나타낸다. 시인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둔각의 절벽을” 보며 자신에게 닥쳤던 현실적 난제들도 만만치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찾아오는 사람 없어도 다소곳이 기다려주는 ‘쪽동백꽃’은 혹독한 그리움을 야무지게 물고 피는 꽃이다. 그 꽃을 통해 우리가 사는 현실의 신산辛酸한 삶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사는 일이 서툴러 나는/ 네 시간 밖을 서성거렸구나”라고 고백하지만, 결코 자조에 그치는 행간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되레 환하게 핀 ‘쪽동백꽃’을 보며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오래된 슬픔의 뼈처럼/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며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 때 생물적 변증을 거치듯 이루고자 하는 여정은 지난한 일임을 안다. 또한 ‘슬픔의 뼈’는 앞으로 더 많은 시詩에서 상징하는 의문과 사유를 예감케 한다. 태생적으로 습득한 쓸쓸함보다 더한 고독을 안고 <땅끝>을 찾아갔지만, 쉽게 해소되지 않는 현실은 망막하다. 시인은 쉽게 그 망막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땅끝’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절망에 상응한다. 그러나 절망 대신 망망하게 펼쳐진 바다를 만나게 된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상상력은 바다처럼 끝없이 시인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땅이 끝나면 바다가 나오고/ 산 너머엔 벌판이 있고/ 세상에 끝은 없다네”라며 자칫 ‘땅끝’을 찾아가 느낄 수 있는 무상감에 경도되지 않는다. 각박한 삶의 현장에서 수시로 내몰리는 현대인들에게 ‘땅끝’이라는 의미는 매번 부닥치는 낯설지 않은 일상일 뿐이다. 좌절하지 않고 새롭게 출발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부 의지는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다. 윤석진의 시는 내면에서 발효된 현실 풍경을 이미지로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한갓지게 자연과 더불어 시적 낭만을 위한 여유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시임을 알게 한다. 냉혹한 현실은 결코 이상에 치우칠 수 없다는 관점에서 현상된 풍경은 시 미학으로 소비되지 않고 사회라는 관계성을 통해 긴장을 견지하고 있다.
<찬란한 시간>은 시인의 평소 갖고 있는 건강한 노동 의식을 확인해준다. “길 건너 마트가 북적거리는 시간/ 기웃거리는 얼굴 하나 없는/ 트럭 적재함의 채소전/ 陰畵 같은 얼굴로/ 시금치를 다듬고 있는 사내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아니”라지만, 사실 이런 풍경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특별하지 않은데 무엇이 시인의 발길을 붙잡았을까?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는 길가에서 묵묵히 채소를 다듬고 있는 초로의 한 사내가 눈에 밟혔을 것이다. 싸락눈 내리는 저녁 추운 날씨에도 “식구의 밥을 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일”로 신성한 삶의 행위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꿈꾸지만,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펼쳐지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행위를 시인은 아름다운 것보다 더 ‘찬란한 것’으로 규정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아름답고 찬란한 것의 일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김씨>도 “식구들의 따듯한 밥을 위해”살아가는 사람으로 “세상의 어떤 추를 얹더라도/ 균형을 이룰 그대의 노동/ 누구에게도 말 못할/ 무시로 습격해오는 모멸을 견”뎌낸 것을 안다. 그 사람을 시인은 궁륭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표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예시된 <찬란한 시간>과 마찬가지로 <김씨>와 <동행>도 새들의 비행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구분 지었다. 찬란하거나 아름다운 것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영원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의 순간은 너무 짧다. 그렇지만, 고통의 과정은 너무 길고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어찌 보면 그 귀한 시절을 보기 위해 우리는 봄 같은 시간을 기다리는 것인지 모른다. 시인의 가슴으로 피운 <복사꽃>은 무슨 시적 상상력을 담고 있을까? “한 시절을 부대꼈던 그곳”에서 과거라는 기억의 풍경을 보게 되었고, 시적 발화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되돌아보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그곳이다. 그 낯선 정류소에서 뿔뿔이 흩어져 지금껏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래도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은 “늙지 않는 그리움으로/ 켜켜로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바람 맑은 날, 벗이여”라고 외치며 다시 만나 술 한 잔을 나누고 싶다는 여운이 짙다. 시가 함의하는 의미는 단순한 욕망에 멈추지 않고 불편한 현실의 긍정적인 변화까지를 절실히 소망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욕망은 시간의 교차를 통해 잘 직조된 옷감처럼 이뤄지길 희망한다. 그런 과정을 우린 인생이라고 한다. 그 인생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시 <후회>는 쉽게 결론을 말할 수 없게 한다. 농담 반 진담처럼 약속한 ‘사랑’이 베틀에 통째로 얹혀버렸다. 그 베틀에 올린 남자와 여자의 생을 옭아버린 “말이 씨가 된다고/ 그 여자 삼십 년 가까이/ 참고, 참고 살아왔다”는 한 생애의 서사가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그 모든 것도 어쩔 수 없는 그 사람들의 몫이다. 죄라면 가장 순수한 자연의 변화처럼 순정한 순리에 따랐을 뿐이다. 따라서 더 이상 지난 사랑에 대한 후회는 불필요할 뿐이다. 세상사의 순리를 이미 알아버린 시인은 보길도에서도 쉽게 범접하지 못한다는 노화도의 이화월백령을 넘었다. 순전히 사람 그리워 <노화도_최철남에게>를 찾아간 시인의 무망한 심성을 그대로 내보였다. 유난히 “배꽃 흐드러진 달밤/ 동네 처녀들의 배를 훔쳤다는/ 옛 고개를 넘는다”지만, 기껏해야 “간간히 흰 머리 돋아난/ 빈손의 세월”뿐인 너무도 헛헛한 신화처럼 삶의 심연 뒤로 이야기만 무성한 이화월백령에는 넘나들던 고개 길만 여전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개입된 ‘사랑’이란 것은 참으로 묘한 인연들로 엮여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건너왔다. 시인은 세상을 두루 살피듯 곳곳의 사연들을 시적 상상력으로 용케도 포획해낸다. 그것은 시인만이 갖는 직관으로 가능한 것이다. 간판부터가 예사롭지 않는 <귀거래 식당>에서 늦은 시장기를 때우고 얻어 마신 눈물차가 시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사람 살아온 사연이 깊어 차를 덖으며 부스러진 찻잎을 모아 만든다는 눈물차의 내력도 남다르다. “아직 情이 배고프던 홀어미 시절/ 한줄금 쏘내기 같았던/ 자식뻘 풋사내의 그림자가 보일락 말락”아련한 이야기가 우린 찻물 속에서 배여 나왔을 법하다. 시는 어차피 사람 살아가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로 생몰을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윤석진 시인은 <인연>에서도 풍경 속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를 사람과 대화하듯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바다를 헤매다 지친/ 雪白의 물새 한 마리 날아오고/ 그 순간,/ 시퍼런 정적의 갈대들/ 모두 설렙니다// 우리 사는 일이라는 것도/ 저들과 다르지 않고/ 한껏 색 바랜 내 적요 속으로/ 홀연 그대 들어서고/ 내 全生이 흔들립니다”라는 시 전문을 따라 읽다 보면 홀로 살아가는 생이겠거니 하지만, 알고 보면 누군가와의 관계(사랑)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소중한 인연들을 <너에게>는 “서로의 시간 밖에서/ 그렇게 살아가다, 혹여/ 먼 뒷날 遭遇하면/ 오래된 관습을 전하겠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며 허언을 남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자는 당부는 속말로 남겼다.
<어느 사월에 부쳐>에서 시인은 ‘사랑’을 잊은 사람들의 냉혹한 가슴을 질타하고 있다. 가슴 아픈 ‘세월호’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어야 하는 시인도 괴로웠을 것이다. 많은 각론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사람에 대한 소중한 ‘사랑’의 결여가 빚은 대 참사임을 훗날을 위해 다시 말해야만 하는 시대정신은 불변의 진리이다. 윤석진 시인을 굳이 분류한다면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봐야 한다. 진정한 학자라면 시대를 올곧게 세우려는 강직한 선비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인은 더 늦기 전 자신이 가져야할 시대에 대한 사명의식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記者>라는 직업군에 대한 불편한 생각들은 한 가지 사례가 될 것이다. 정당한 가치와 사실을 직보 하는 언론관을 가져야할 사람이 곧 기자여야 한다고 볼 때 그렇지 않은 현실을 본다. 물론 사실이 아닌 소설 같은 기사를 남발하는 기자들에게 해당되겠지만, 불편한 현실에 대한 직설도 시인의 영역임을 알게 한다. 굳이 아쉽다면 좀 더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였다면 시적 의미는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시인의 적폐를 가리려는 시적 의지는 점점 사회 중심을 향한다. <철밥통>에서는 정년을 맞은 대학 교수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주 이틀 아홉 시간/ 억대가 넘는 연봉을 받는/ 연구실보다 골프장을 즐겨 찾는/ 제자보다 감성돔을 사랑하는/ --중략--/ 세상은 그를 師表로 공인했다”라며 최고의 학문을 지향하는 대학 사회의 잘못된 사례를 고발하고 있다. 그 고발은 <사문>으로 이어진다. 대학교에서도 교수를 중심으로 또 다른 사제 간 파벌이 형성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계승할 학문적 업적이 없는/ 존경할 인격도 없는/ 천박한 철밥통 하나를 둘러싸고/ 같잖은 것들, 끼리끼리/ 네편 내 편을 가”르면서 일어나는 일상을 환기한 시다. 당연히 공부보다는 교수와의 관계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그래서 가능한 것인지 우리가 모른 현실도 있다. 출석부에 있다는 학생은 한 학기 동안 보이지 않았다는데, 추측일 뿐이지만, <유령>이 사실 존재하는지 모른다. 기말 시험 끝난 뒤 근사한 졸업 사진과 졸업장까지 찾아간다는, 뒷말만 풍문처럼 무성하다. 그런 잘못된 관행이 익숙하게 자리 잡아버린 이유로 부도덕성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 계도할 수 있는 언로가 막혔다는 것이다. <도둑의 얼굴>도 마찬가지의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시를 읽으며 떠오르는 얼굴을 스케치하면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권력자의 얼굴이 누구인가는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그 사람들의 전형은 선과 악에 대한 모르쇠이고 참으로 뻔뻔하다는 것이다. 남의 것을 훔쳐 먹으면서도 “도망은 커녕 시퍼런 안광을 내쏘며/나를 노려본다”는 <도둑 고양이>에서 시인의 간명한 말은 “왜 도둑질로 살찐 놈들은/ 뻔뻔하고 당당한가”라며 속물이 되어버린 사회악에 대한 강한 질타와 염치의 회복을 담고 있다.
시인은 <교훈>을 통해 내 고향에서 “악독한 사람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중략--/ 도칙[盜跖]이 같은 놈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경계했습니다”라며 우리 사회의 무뎌진 윤리의식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다. 윤석진 시인은 시를 통해 계몽적 사유를 은근히 관철하려 한다. 그런 의식이 순수한 시의 본령에서 일탈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 지향만으로 궁구窮究하는 것이 올바른 시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내면의 윤리의식까지 노출하여 자기 갱신뿐만이 아니라 사회 다수의 변화를 도모하는 의지까지 당연한 몫이다. 따라서 시적인 것의 궁극은 서정적 자아의 완성을 위한 것보다 더 높은 사회 윤리적 위의에 다가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일상에서 인식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각성은 타자를 내세워 자아 인식을 전언케 하는 시 형식을 거부하고 있다. 남해안의 작은 포구인 <발포에서>는 풍경처럼 상처의 주체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다. “저 바다는 몸 전체가 길인데/ 네가 갈 길은 전혀 없구나”라며 용골을 흔들어 보지만 움직일 기척이 없다. 바스러진 선체를 보듬고 있는 용골마저 더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기력 없는 폐선이 된 배를 두고 떠나간 선원들의 안부도 궁금하지만, 바다를 누비던 배의 그 용골처럼 시인의 가슴에도 세상 호기를 가득 담았던 적 있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폐선처럼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 주변에 흔하다. 누구한테도 보호받지 못한 심각한 문제를 가슴으로 공감하고 해소하려는 사회적 담론은 멀기만 해서 괴리만 클 뿐이다. 시인의 눈은 국가의 보호망 안의 사람들보다 그 바깥에서 신음하는 부류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응당 시가 갖는 공공성에 대한 합당한 의식이고 지향임을 말해준다. 시인이 갖는 직관이 미래에 대한 담론으로 진전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시인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일상의 풍경을 허투루 보지 않고 풍경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윤석진 시인을 본다. 아래 <하사리에서> 전문을 통해 오랜 시선으로 보이지 않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사람 사는 그리움과 사랑마저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임을 안다. 낯설지 않아 더 시적인 것에 주목하며 불필요한 담론의 농담濃淡을 마감하려 한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의자 하나 바다를 향해 놓여 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쉬며 담배를 피워 문다. 잠시 물옷을 벗은 바다, 무수한 게들이 또 하루를 연명하느라고 분주하다. 멀리 엷은 해무에 휩싸인 섬들과 정박한 배들을 배경으로 어부들이 뻘배를 타고 다니며 짱뚱이를 낚는다. 풍경을 이루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분명 다르므로, 지금 내 시선을 붙들고 있는 저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에도 삶의 고단함이 숨어 있으리라. 그래도 저들은 저 풍경 속에서 자신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혹여 저들이 沒頭를 깨고 뭍에 눈길을 준다면 나는 어떤 풍경일까 주어진 시간에 나이 빛깔을 繡놓으며 감당하는 내 고단함도 헤아려 줄까. 어부들이 돌아가고 바다가 다시 물옷을 입은 뒤에도 나는 그대로 앉아 있다. 다시는 내 눈길이 풍경 하나로 조우했던 저들의 삶에 닿을 수 없을지라도, 나는 하루빨리 저들이 필생을 걸고 갈망하는 풍경을 이루기를 바란다.”
3. 전위적 사유와 시적인 것
이은봉 시인의 시는 전반적으로 난해한 추종에 충실하게 박제된 일단의 시와는 상당한 간극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사회 변화의 추동推動 선에 뛰어들어 과감한 도발이나 사회 변혁을 주도하는 참여 주체와도 일정한 선을 긋고 있다. 수록된 시 전반을 관통하는 세계는 격정보다 진솔한 일상 속 천착에서 깨달은 비의를 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 핵심은 ‘생활’에 대한 행위를 바라보는 안목과 학자적 학문의 깊이까지 더해 인간적 진실과 가치를 시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있다. 소시민의 소박한 시의 세계 안에서 부단히 양심적 사유를 발설하며 사회 모두를 향하는 건강성을 지향하고 있다. 시인도 현실을 살아가는 실존의 존재로서 시대가 초래하는 불편한 제반 문제를 외면해선 안 될 당사자기 때문이다. 응당 사회 층위로 볼 때 문학적인 책임도 부정할 수 없는 의무란 것에서다. 시대와 불화하는 시의詩意는 인간의 정당한 윤리의식이고 사회와 역사 변화를 바라는 생존 인식 행위이다. 올바른 시대의식까지 혼융渾融한 인식의 확장을 문학의 자장으로 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를 기저로 한 시의 세계는 건전한 윤리의식으로 상상력의 결과를 충동하며 시의 형상화에 도달케 한다. 의도적 시어나 시행의 반복적 배치는 형식을 통해 시의 내용을 강화시켜주며 낯설기보다 낯익히기를 통한 타자와의 공감 여력을 점증 표출해간다. 시 세계는 사물로 다가온 추상적 관념이나 개념을 현실적 이미지로 변주해가며 시에서 표출하고자 하는 세계를 은밀하게 관철시키고 있다. 시의 세계로 유입한 일상은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사회적인 관계로 확장해가고 완곡한 상승으로 고도를 유지한다. 시어나 시행의 반복으로 피로감에 빠지기 쉬운 일면도 있어 보이긴 하지만, 후반부의 전위를 통해 빠르게 극복해간다. 유형의 반복이 자칫 단순한 전달 기능에 빠질 수 있는 우려까지 예감했기 때문이다. 지루해질 때쯤 시의 본래적 전언 기능을 수행하게끔 의미 전달을 위한 사물(대상)로 환기한다. 언어의 전달 기능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대상(사물)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비유나 상징의 형식으로 전환해간다. 시의 고유한 상징체계가 압축과 전위라면 그에 수긍하지 않고 솔직한 노출(드러냄)을 통해 정제된 시어로 현현해낸다. 다시 말하자면 이은봉 시인의 시가 갖는 긍정성은 현대인들에게 친밀한 일상어를 변용하여 효과적으로 전용하는데 능하다는 것이다. 오용이나 과용을 통한 약물 중독처럼 나쁜 해악이 아닌 일상 언어가 갖는 본래의 순 기능을 회복하는 데 있어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자칫 상투성으로 외면당할 수 있는 일상을 시적 대상으로 재발견하여 자연스럽게 환유한다. 그 범주에 들어있는 시편들을 모아 시집 《생활》(실천문학)을 최근 출간하였다. 대다수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다 보니 현대 사회 논쟁의 쟁점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몫까지 시인은 영역으로 들이고 있다. 문학적 위의 뿐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공공성을 지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은봉 시인이 오랫동안 이뤄온 문학적 성과에다 현실적인 생활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생활 시의 함의는 가볍지 않다. 문학적으로 담아내야 할 층위의 다양성을 표방하면서 상징하는 의미는 현실과 밀접해서 시적인 것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시의 결에 대하여 너무 장황한 말을 늘여놓아도 염치없는 것이 맞다. 누군가는 그런 내막을 모르니 불편해진 밤의 저의가 사뭇 궁금할 것이다.
이놈, 한때는 반달곰 새끼들처럼 세상의 골짜기 여기저기에서 나와 뒤엉켜 뛰어놀던 놈이다
이놈, 한때는 국감장의 의원님들처럼 으르릉거리며 내게 침을 튀기던 놈이다
참 한심한 놈, 췌장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밤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tv 채널을 바꿔가며 시간의 모가지를 비틀어대는 밤이다
리모콘에서 쏟아져 나오는 총알들 피웅피웅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밤이다
침대머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꼬마등을 꺼버리자 창밖의 달빛들조차 파르르 몸을 떠는 밤이다
참 싸가지 없는 놈, 이놈의 칼에 발꿈치가 잘려 제대로 걷지 못하던 날이 도대체 얼마인가
이놈, 죽어가면서 내 마음 속 깊이 소용돌이를 만드는 놈, 이놈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시간의 모가지를 비틀어대는 밤> 전문
인간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는 신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은 밤이다. 그 시간만큼은 인간의 주관이 아닌 일몰을 통해 구분된다. 인간에게 밤은 낮의 피로를 다스리며 안정을 취하는 시간이다. 몸은 다스렸으나 정신을 다스리지 못한 지경을 시인은 맞고 있다. 시발이 어찌 되었든 고통의 시간을 격앙된 분노로 표출하고 있다. 본래‘놈’이라는 단어는 나쁜 의미만은 아니어서 상대를 부를 때 속정 깊은 호칭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비하하는 말로 인식되면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놈’을 대수롭지 않게 발설하면서 시의 첫머리부터 일갈 대서하고 있다. 정황으로 봐서 “이놈”은 상당히 나쁜 사람이 분명하다. “이놈, 한때는 반달곰 새끼들처럼 세상의 골짜기 여기저기에서 나와 뒤엉켜 뛰어놀던 놈”으로 말한 것을 보면 그 사람도 우리 곁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았던 이웃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어떤 연유가 되었는지 나쁜 대상으로 변절한다. 통상적으로 으르렁거린다는 의성어를 보면 위압을 가할 수 있는 유리한 힘이나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차별적으로 부여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임을 암시한다. “참 싸가지 없는 놈, 이놈의 칼에 발꿈치가 잘려 제대로 걷지 못하던 날이 도대체 얼마인가”를 회상한다. 그 사람에 의해 자행된 언어폭력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과거가 떠올랐을 것이다. “이놈”은 “한심한 놈”과 “싸가지 없는 놈”으로 행위의 구체적 적시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췌장암’으로 죽어간다. 한 때 잘 나가던 그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초라할 뿐이다. 그래서 인생무상이 따로 없다. 죽음을 맞는 모습을 보며 인간적 연민으로 편치 않는 밤이다.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성찰하게 한 밤이다. 시류에 편승한 일탈이 초래한 결과의 시비보다 인간적인 화해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밤이 새면 무의식의 시간은 의식 속으로 새롭게 편입된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 그리고 점심도 모자라 하루 세끼에 길들여진 식습관이다. 그걸 위해 밤낮으로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이다. <돼지국밥집에서> “돼지국밥, 더는 먹지 말아야지/ 거듭거듭 다짐한다 돼지국밥// 세상에서 최고로 싸고 맛있는 음식/ 내일부터는 집에서 밥해 먹어야지/ 집에서 미역국 끓여 밥해 먹어야지”라며 반복되는 현실과는 다른 심리를 잘 보여준다. 어떤 연유이든 가족과의 별거에서 오는 현대인의 풍속이 된 생활상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간에 쫓겨 챙겨 먹지 못한 끼니를 집이 아닌 ‘돼지국밥집’에서 반복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현대인의 일상을 말해준다. 그곳에서 해결하는 한 끼는 “너무 많이 먹어 역겨워진 음식”이지만, 어쩔 수 없어 선택한 생존 방법일 뿐이다. 시인은 “이번으로 돼지국밥은 끝이다”라며 뻔한 다짐을 한다. 마음은 항상 사랑하는 가족과의 따뜻한 식사를 그리워한다. 당장이라도 가족과 미역국이 올라온 밥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깊어지는 그리움을 달래 보려는 <초여름 밤>은 되레 객고의 적적함을 더해준다. 몸마저 아파 더 절실한 시인의 자서 같은 시를 보자 “독감으로 몸져누운 초여름 밤이다/ 달님이 내려와 한 손에 턱을 괸 채/ 기웃거리고 있기 때문일까/ 불 끄자 창밖 환하게 밝아온다/ 매운 코 킁킁거리며 베란다에 나가본다/ 창문 열고 달님의 얼굴 올려다본다/ 무슨 설움 있나 무슨 아픔 있나/ 하늘 나는 백제관음처럼 하얀 달님의 얼굴/ 물끄러미 내 마음 내려다본다/ 안개가 피어오르기 때문일까/ 부드럽고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달님의 마음, 내 가슴 촉촉이 적신다/ 촉촉이 젖은 마음으로 나도/ 먼 하늘, 먼 도시의 변두리/ 어린 자식 키우느라고 종종대고 있을/ 늙고 주름진 달님의 얼굴 올려다본다/ 초여름 밤, 저도 독감으로 몸져 누워 있나 보다”라며 해소할 수 없는 그리움이 절절하다. 시를 통해 시인이 추구하는 정서를 가늠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긴장이나 시적 수사도 가동되지 않는 심정을 날것처럼 보여준다. 시 속 화자가 꼭 시인일 수만은 없다.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초여름 밤의 “달님”이 촉발한 시상은 이내 자아의 완벽한 전이를 이뤄낸다. 초여름 밤에 뜬 ‘달’이 화자의 감성을 더해 “달님”으로 상징되고 백제 시대에 건네졌다는 호류사지에 봉안된 “하늘 나는 백제관음”으로 형상화되다 기어이 “어린 자식 키우느라고 종종대고 있을/ 늙고 주름진 달님의 얼굴”은 이내 ‘아내의 얼굴’로 변주된다. 그것마저 가슴으로만 읽어야 하는 현대인의 안타까운 생활상이다. 가족의 의미는 생활공간을 공유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헤어져 살 수밖에 없는 도시인들의 각박한 삶의 뒷모습이다. 내색 없이 묵묵히 기다려준 아내처럼 창밖의 라일락과 불두화 꽃 핀 기색을 그제야 알게 된다.
낙엽 져 걸음에 차이는 소리가 간결해졌다는 가을날이다. <저녁 산책길>에서 “휘영청 달 밝고, 화들짝 바람 시원하”여 발걸음도 가벼웠다. 막상 나섰지만 “선뜻 갈 곳 없다 먼 하늘 둥근 달이나 올려다본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 있다 오랜 시간 함께 견뎌온 둥근 얼굴”에서 자연현상인 “둥근 달”이 “둥근 얼굴”로 변용되면서 아내의 상징으로 확장되어 상기되는 추억은 “지난 해 여름 박연폭포 산마루에서/ 늙은 어머니를 위해 둥근 얼굴이 / 5달러를 주고 산 으름나무 지팡이”로 잠시나마 잊었던 가족들을 떠올리는 노구의 시인이다. 가을밤의 추흥秋興에 외로워 떨어져 있는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던 두보를 닮았다. 상징화된 달빛 고운 둥근 얼굴을 차마 지울 수 없다. 시의 낭만을 과잉해 심미적 전달 효과를 암시하는 감각적 언어를 의도적으로 시도했다고 볼 수는 없다. 감정도 본능이기에 그렇다.
생존을 위한 행위에서 발화된 언어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본능에서 발화된 시어의 전개는 정서적 반응과 어우러져 의식의 전 단계인 무의식까지 닿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틈을 구분할 수 없듯 <사람들 지금 어지럽다>는 고속열차와 시속 700km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초스피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염려한다. 부적응으로 혼란스럽던 상태 인식마저 점점 무감해져 “책도 읽고 시를 퇴고한다”며 과거의 한양 천리가 무색해져 버린 신 풍속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시인만 우려하는 것인가 “속도가 없는 속도의 시대, 속도 속이 가장 안전한 시대, 속도 속에 있지 못하면 불안하다 속도 밖에 있으면 초조하다”는 속도 경쟁이 주는 폐해에 대한 경고다. 속도만큼 빠르게 확산되는 불안감은 “지구는 객실이 딸린 핵폭탄”처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인간의 종種의 안위가 더 우려스럽다.
<김밥 두 줄>도 그와 다르지 않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도시 생활자의 일상의 모습이다. 속도 경쟁에서 패배할 수 없기에 두 발로 보행하는 낭비를 줄일 수 밖 없다. 매사가 바쁘다 보니 밥때 집에 들어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실상이 애처롭다. 본능에서 버금보다 으뜸인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다. 생존의 문제로 피부에 와 닿는 “광주역 근처 ‘김밥 천국’에서/ 급하게 김밥 두 줄 산다/ 검정 비닐봉지에 담겨 있는 슬픔 두 줄/ 왼손에 들고 역을 향해 뛴다”는 모습이 고스란히 오버랩된다. 여기에 무슨 놈의 복잡한 시적 욕망이 개입할 수 있겠는가. 김밥 두 줄로 허기를 채운 뒤 식곤증으로 “졸음 쏟아져 내리는데/ 이 고마움 누구에게 표해야 하나”라고 묻는 마음이 안타깝다. 자유로운 시간은 겨우 KTX가 달려오는 동안뿐이다. 못다 해소한 식곤증은 가족을 향해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꿈처럼 이루어진다. 달리는 내내 무의식 속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만나게 된다. ‘김밥 두 줄’이 갖는 의미는 그래서 서러움이 아닌 소시민의 따뜻한 희망이 되었다. 삶이나 문학이나 정신의 근본이 바로서야 한다.
우리 집 거실 귀퉁이에는 무말랭이가 마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말랭이가 마르던 곳이다 땅콩알이 마르던 곳이다 구린내를 풍기며
인삼주도 더덕주도 호박덩이도 함께 마르고 있는
우리 집 거실 귀퉁이
-<생활> 부분
시인의 솔직한 고백으로 봐도 무방한 <생활>은 시인의 시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문학적 공간이자 생활공간인 집안이 문학의 전경으로 스스럼없이 노출되었다. 수분 가득한 무와 감의 노출된 속살이 말라가듯 불필요한 관념을 건조한 사유로 환원한다. 화려한 수사나 언어의 조합이 아니어도 시적 성공을 보여주는 것은 시에서 숨기지 않는 본능에 대한 천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한 복판에서 살아가지만, 먹거리들을 다듬고 챙기면서 “고향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농촌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라며 진정한 삶을 배제한 시의 무망함을 깨닫게 한다. 도시인으로 살아가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근원에 대한 의식으로 시의 함의까지 제시해준다. 대다수 사람들이 꺼리는 먹고사는 일상을 문학의 복판에다 부려 놓았다. 그 제재는 생활이고 일상 행위 의식이다, 그 일상의 행위를 시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나만의 문제로 머물지 않고 관심은 더불어 사는 사회로 확산된다. <궁시렁 할머니>는 진월동 17평 서라 아파트에서 산다. “이집에 혼자 사는 궁시렁 할머니/ 달포 전 계단에 낙상해/ 왼쪽 팔목 부러뜨린 궁시렁 할머니”에 대한 관심이다. 오랜 관계에서 이웃으로 낯을 익힌 ‘궁시렁 할머니’다. 평소 궁시렁대는 것을 봐서 정상적 언어활동이 불편한 것을 알게 한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누군가와 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갈망을 해소하지 못해 언어장애로까지 진전되어 궁시렁대는 증상으로 심화되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의 낙상으로 신체적 불편마저 가중되고, 모습마저 뜸한 안부가 긴요해졌다. 혹시나 하는 인간적인 염려가 무탈을 염원한다. 궁시렁대는 할머니를 통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추락하는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시의 형식인 화자의 어조를 빌어 관심을 촉발하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멜로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처럼 슬프고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자아의 실현과 완성을 향한 자기애의 절실함은 존재에 대한 소외감에서 같다고 보았다. 인간의 실존은 생존의 의미와는 다르다. 엄연하게 존재한 사람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슬픔보다 더한 고통이다. 시인이 심정이 그렇다.
잠시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설움이 울컥, 목젖을 뚫고 올라왔다 곧이어 지도에 없는 아름다운 섬 하나를 생각했다
잠시 그는 눈을 떴다가 감았다 몽롱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구져기고 찢어진 한겨레 신문이 어지럽게 쓰러게 통에 처박혀 있었다
너무 한심해 그는 제 가슴 한번 탁, 쳤다 아직도 이름 따위에 연연하다니!
-<지도에 없는 섬> 부분
평생 문학을 생애 이정표로 삼아온 이은봉 시인이다. 조간신문을 펼쳐보다 공교롭게도 “전국 시인 지도······ 오늘 아침에는 한겨레 하단 통광고”와 마주친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본 그 지도에는 이은봉이란 이름은 없다. 응당 국민이라면 부여받아야 할 호적처럼 시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올라있어할 인권인 것이다. 아니지, 시인의 권리라 하자. 불쾌해진 여기까지는 범부와 다를 바 없다. “너무 한심해 그는 제 가슴 한번 탁, 쳤다 아직도 이름 따위에 연연하다니!”라는 시행은 원효가 당 유학길에 마신 해골바가지의 물이 떠올랐다. 시인의 마음먹기로 관점이 바뀌어버렸다. 사실 밤하늘의 별들이 죄다 이름 불러지는 것이 아니듯 호명되지 않은 별들이 우리의 밤하늘을 빛내고 있다. 자기 성찰을 통해 세상의 불화와 화해하는 해학이 포용의 여백으로 빛나고 있다.
의식은 일상에 머물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휴전선 너머까지 시심이 향한다. <그리운 금강산>은 사진 속 아버지의 추억으로 점화되지만. 긴장의 해소보다 강화되는 대치를 걱정하고 있다. 아버지의 사진도 남과 북의 상황에 따라 장롱 안과 바깥을 넘나 든다. 좋았던 시절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내내 정작 시인은 “군화와 군복과 철모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권총도 내려놓았다 입 활짝 크게 열고서는/ 숨 크게 쉬었다 참으로 한심했다라고” 마음의 벽을 쌓고 있던 잘못된 편견을 고백한다. <기차를 타고 갈 거야>라는 소망은 언젠가는 이뤄질 역사임은 분명하다. 어차피 사람이 가로막은 철로이니 사람이 풀면 된다.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평양과 서울은 지근거리다. 현재의 방법은 하늘을 우회하거나 중국 국경을 넘어 자동차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시인은 아버지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철길이 끊겼으니까 걸어서도/ 갈 수 있기는 하지 옛날에는 걸어서 갔지 어깨에 괴나리 봇짐을 메고, 발에 감발을 하고, 짚신을 신고 몇날 며칠을 걸어서 갔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를 죄다 들어서 기억하고 있다. 단지 시간이 문제지 “얼마 안 남았어 금방이야 금방 갈 거야”라는 시인의 확신은 단호하다. 당당하게 들어가 문산역과 개성을 거쳐 평양의 능라도와 단군 왕릉까지 여차하면 “신의주로, 단둥으로, 연변으로, 하바롭스크로, 시베리아로 중앙아시아”까지 가보겠는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는데 소식 없어 무정할 뿐이다. 소통보다 단절을 좋아하는 <정치>가 변해야만 한다. “정치는 염치없는 잔치”라고 단정한다. 그냥 둬서는 도저히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잘못된 정치판을 “아침 까치의 마음으로/ 거리를 치우며 어지럽게 도치된 세상/ 차분히 정치시키는 일 아닌가, 바르게.”세우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모든 기능이 정상화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껏 일별한 시편들의 시의를 탐색하며 지루한 담론을 이어왔다. 내면으로 유입한 일상적 세계는 단순한 생존 활동의 행위(의식)가 아니다. 시적 주체인 충실한 대상은 개개인의 일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통섭한 인문학적 담론처럼 문학도 가족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정치로 국가에서 지구적인의 관계 인식으로 확장되며 당 시대를 아울러 사람과 사람의 마음으로 순환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근본적인 생존의 일상을 시로 형상화한 이은봉 <시인의 말>에서 “아무런 내포도 유추할 수 없는 관념적 진술의 시를 즐길 만큼 내 마음은 열려 있지 못하다. 그러니 나로서는 관념적 진술을 조작하고 있는 시들로부터 비켜설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번 시집의 이름을 ‘생활’이라고 붙인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시가 추구하는 궁극은 아름다운 삶을 지지하는 정신적 작용재이다. 문학도 현실이라는 근본에 충실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고, 그랬을 때 공공성을 우선하는 윤리적 우위에서 문학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진 시인과 이은봉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세계는 층위의 변별성으로 구분할 만큼 상이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문학적으로 소중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밝히며 결어로 대신한다.
첫댓글 잘 읽었네. 갈수록 글이 좋아지네 그려. 그나저나 석진이 얼굴 한번 보고 싶고만.
석진시인 덕분에요~~^^
수고했네. 근데 어디서 이런 긴 글이 나오는가 모르것네 그려!! 다음 글 또 기다리고 있겠네.
그냥 써보는거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