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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개학과 함께 캠퍼스에는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었다. 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차용하면서 이때까지 선교 중심의 대중교회와는 달리 ‘밥상공동체’와 같은 민중 중심의 교회공동체를 추구했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하고 아시아 기독교협의회가 후원하는 국제신학준비과정에 참석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1970년대 한국에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신학의 명칭을 ‘민중신학’이라 이름을 붙였다.
신학교는 이러한 상황과 맞물리면서 학생들의 의식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대학마다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하고 학교에 대해서도 비리를 들추고 성토하며 개혁을 부르짖었다. 광나루 창신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신학대학과 연계하여 시위를 벌이고, 교수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대자보(大字報)를 통해 폭로했다. 창신대 교수 중에 강의의 약점을 비판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은 어째서 우리 학교는 실력 있는 우수한 교수들을 초빙하지 않느냐고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창신대에서는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용정복 박사를 교수로 영입했다. 이로 인해 기존의 교수진이 진보와 보수로 갈리고 학생들도 그런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학교 게시판에는 ‘미국 유학 중 용정복 박사의 여자 문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선교사 겸 교수인 배석문 박사 선교비 유용 문제’ 등이 대자보로 나붙었다. 배 교수는 한국에 있는 동안 20여 권의 책을 출판하여 한국 신학계에 공헌한 점도 많았다. 그러나 선교사는 선교본부에서 지급하는 월급 외의 수입은 본부에 모두 보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규정을 위반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본부는 그 사실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배석문 선교사에게 해임을 통보했다. 그에 따라 창신대에서도 배 교수를 해임하게 되었다.
당시 다재다능하고 직원들과의 관계도 원활하고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던 총무처장이 직원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소문이 학교 안에 퍼졌다. 신학대학 교직원이 술을 마시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학교 당국은 처음에는 직원 한 사람에게 3개월 정직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징계를 받은 그가 “나 혼자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총무처장과 함께 마셨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바람에 총무처장도 사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숙사생들은 저녁에 모여 앉으면 학교 내외에서 일어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믿음교회 선병희 목사가 새한문교회 원로목사 1주기 추도예배에 순서를 맡아 갔다가 그 교회 여성운동을 이끄는 변호사로부터 ‘여기 왜 오셨어요?’라는 말을 듣고 쫓겨났대.”
“나도 그 얘기 들었어. 그 교회 장로들이 그것 때문에 목사님의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야.”
“무슨 일인데?”
“선병희 목사가 신학교 시절에 좋아하던 동기생 여 전도사가 다른 교회에 시무하고 있는 것을 자기 교회로 청빙하여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야. 그뿐만 아니라 왕십리에 여관을 얻어놓고 그가 가르치던 신학교 여학생 제자들을 하나씩 불러들였다고 했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것처럼 그런 소문이 뜻있는 여성 교우들 사이에 파다하다는 거야.”
“미국 유학 시절에도 여학생 하나를 꾀어 동거하다시피 하다가 지인에게 발각되기도 했다는 말도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서울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지.”
“우리 교회 목사님이 프린스턴으로 유학했을 때 신학교 동기생인 용정복 박사를 학교 기숙사에서 만났어. 용 박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사귀는 여학생이 있었고 친구들은 그가 그녀와 결혼할 것으로 알고 있었대. 그런데 어느 날 우리 목사님이 4층 복도 맞은편에 있는 용 박사의 방에 갔을 때 미국 여학생 하나가 맨발로 거기 앉아 있었어. 용 박사는 자기가 지도하는 미국교회의 청년 중 하나라고 그녀를 소개했다는 것이야. 그 후 한국에서 사귀던 여학생이 그를 찾아 프린스턴까지 갔으나 모든 사실을 알고 학업도 포기하고 귀국하고 말았다고 했어.”
“미국의 대학들은 요즘은 더 많이 변했어. 신학교의 남녀 기숙사가 개방되어 서로가 스스럼없이 드나들고, 교내에 설치된 자판기에서는 맥주와 담배를 맘대로 살 수 있고,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 학생이 기숙사에서 동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이야.”
교내문제 폭로와 시국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는 그칠 줄을 몰랐다. 국가정보원에서는 전국대학생운동을 예의 주시하며 해방신학에 관여하는 것을 용공으로 몰아붙였고, 민중신학도 같은 범주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로 인해 정보부는 용 박사가 창신대에 재직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학교 당국에 압력을 가하며 그의 퇴출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영빈 학장이 이러한 압력에 굴하지 않자 서울의 대형교회 유력한 장로들을 내세워 용 박사를 내보내도록 권고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생들의 민중신학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백형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엇 때문에 정보부가 그처럼 집요하게 민중신학 담당 교수를 축출하려고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틈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서 민중신학을 좀 더 깊이 알기 위해 관계 서적이나 기독교 월간지 등 자료를 부지런히 읽었다.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백형기의 생각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지난주 목요일엔 기독교회관 신학 강연회에 참석했다. 남정서 교수는 “초월적 하나님을 거부하고 역사적 사건 가운데, 인간의 비참한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난 내재적 하나님”만을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들을 실재하게 하는 존재의 힘”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폈다. 그리고 “자기의 신관은 범신론적이며, 역사의 자기 발전이 하나님으로 동일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 나오는 홍해 바다는 갈대밭”이었다는 학설도 접하게 되었다. 설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다윗과 솔로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을까? 백형기는 학자들의 강연을 들으면서 학교에서 배운 성경 지식에도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소돔에서 구원받은 롯의 행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딸들이 잠자리를 같이한 것을 롯은 정말 몰랐을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중심을 보시고 현재와 미래까지 다 아시는 분이 어떻게 사울 같은 인물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허락하셨을까? 욥기는 아무리 뜯어보아도 잘 꾸며진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보였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말씀했는데, 누군가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 징벌을 대신 받아야 한다면 그것도 너무 잔인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은 성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기생들 가운데 반정부 시위를 하다 구속된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가 재판받는 날 서초동 법원 앞에서 신학생들은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앞장서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은 참으로 애국자가 아닌가? 경찰봉도 최루탄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은 순교적 자세 같았다. 백형기는 눌린 자와 억울한 자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그들은 복음의 정신을 펼치는데 참으로 희생적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그들의 행동이 그에게 새로운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2학기 중간시험이 치러질 때였다. 신학교에서도 시험감독은 있지만 구태여 학생들을 살뜰히 감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학생들을 신뢰했기 때문인지 감독 교수는 산책하듯 통로를 어슬렁거리다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홀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시험이란 언제나 어려운 것이다. 뒤쪽에 자리한 그는 고개를 들어 답을 생각하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고심하며 기도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몇몇은 부지런히 옆 사람과 쪽지를 주고받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시위를 주도하고 앞장서서 나아가던 희생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커닝을 하고 있었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가 설마, 하고 다시 살펴보니 그들의 부정행위는 사실이었다. 감독 교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선지동산에 올라온 사람들이 아닌가? 신학생이 커닝을 하다니!’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서로 부정행위를 하던 일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요한계시록3:17)를 떠올렸다. 자기의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후에는 커닝한 과목이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서로 자랑했다. 그들은 모두 말을 잘하고 이론은 정연했으나 행동은 거기에 따르지 못했다. (계속)